세르쥬의 긴장감 없는 모습에 다이안은 성이 난 눈치였다.
세르쥬는 올리비아가 확인차 나를 도발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하지만 막상 그녀의 공세를 정면에서 직접 받고 있는 내가 느끼기에는, 지금 올리비아에게서 장난 아닌 살의가 느껴졌다.
아니, 진짜 뭔데? 혹시 이것도 시스템의 농간인가?
물론 지금 올리비아가 모로스나 악령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나를 제거하려고 시스템이 이제까지 없던 유형을 도입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몹시 의심스러워졌다.
“이건 또 뭐지? 린 씨, 지금 기대하던 환영 인사를 받는 중이에요?”
“체스휘 씨!”
바로 그때, 체스휘가 나타났다. 그는 서둘러 건물까지 달려온 나나 다이안과는 달리,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늦장을 부리며 걸어오느라 이제야 우리가 있는 곳에 도착한 것 같았다.
“이상한데. 인사치고는 너무 과격하고 위험한 것 같은데….”
그러다가 발견한 우리가 바쁘게 복도를 뛰어다니면서 치고받고 있어 이상해 보였는지, 체스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2호실! 너도 모로스야? 먼저 7호실부터 상대하고 봐 줄 테니 딱 기다려! 우리 쥬쥬한테 접근하지 말고!”
“아, 진짜! 모로스 아니라고!”
체스휘는 올리비아와 내 대화를 듣고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그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러네. 나도 깜빡 잊고 있었는데 상황이 좀 애매하긴 하네요.”
“2호실! 그렇게 보기만 하지 말고, 빨리 가서 린을 도우란 말이야!”
다이안이 체스휘에게 달려가서 또 솜 주먹으로 그를 마구 때리며 닦달했다. 그러는 동안 올리비아는 여전히 나를 무섭게 공격하고 있었다.
지금의 그녀는 꼭 흥분한 불곰 같았다. 그녀가 한번 움직일 때마다 벽과 바닥에는 곰의 손톱자국 같은 굵직한 흔적이 남았다. 저렇게 세게 휘두르고 부딪히는데도 올리비아의 지팡이는 휘어지거나 부러지지 않고 멀쩡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올리비아가 무기와 장신구 겸용으로 들고 다니는 저런 물건들은 도대체 뭐로 만들어진 건지 급격히 궁금해졌다.
어쨌든 저 예쁜 드레스에 감춰진 올리비아의 몸이 사실 엄청난 근육질인 건 나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직접 당해 보니 생각보다도 파괴력이 대단했다. 되도록 올리비아를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반격하지 않고 피하기만 했으나, 계속 이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올리비아 씨, 진짜 계속 이럴 거예요? 나도 이젠 가만히 안 있을 거예요!”
“덤벼 봐! 어디 한번 덤벼 보라고, 이 모로스야!”
나도 내 말을 들어 볼 생각조차 없는 올리비아에게 짜증이 나서, 내게 달려드는 그녀의 몸을 바닥에 확 메다꽂았다. 물론 올리비아는 금방 몸을 굴리며 다시 일어나 지팡이로 나를 겨누었다. 그때 체스휘의 목소리가 우리 둘 사이를 가로질렀다.
“올리비아 씨. 열의가 넘치는 건 좋은데, 그러다가 우리가 진짜 모로스가 아니면 어쩌려고 그래요?”
“흥, 언제 모로스가 자기 입으로 모로스라고 하는 거 봤어?!”
“그건 그렇지만, 멀쩡한 양육자를 죽인 셈이 되면 당신도 세르쥬의 양육자로 저택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없을 텐데.”
바로 그 순간, 나를 공격하려던 올리비아가 주춤했다. 아무래도 세르쥬를 언급한 체스휘의 말이 올리비아의 집 나간 이성을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불러들인 모양이었다.
“지금은 더더군다나 이렇게 소란 떨 때가 아니지 않나? 응접실에 손님이 와 있잖아.”
체스휘가 무심한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쨍그랑!
아까 올리비아와 내가 벽에 부딪힐 때 삐뚤어진 액자가 간당간당하게 매달려 있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깨졌다.
올리비아도 그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는지, 지팡이를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녀는 바로 복도의 한구석에 있던 세르쥬에게 달려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쥬쥬! 마이 스위트 하트! 미안, 내가 널 지키려고 마음이 앞서서 아주 중요한 걸 잊을 뻔했어! 우리 쥬쥬는 나 없이는 안 되는데!”
“아니, 괜찮은데….”
“오, 그렇게 강할 척할 필요 없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나는 우리 귀여운 말랑 달콤 우유 푸딩의 마음을 다 알아!”
올리비아에게 안겨 눌린 찐빵같이 된 세르쥬의 얼굴에 짙은 한숨이 어렸다. 그는 올리비아가 몹시 귀찮은 듯했지만, 그래도 손을 들어서 그녀를 한두 번 성의 없는 손짓으로 토닥여 줬다.
방금까지의 흉악함은 어디로 갔는지, 저 모습만 보면 꼭 올리비아가 연약하고 가련한 피해자인 것만 같았다.
“린, 괜찮아?!”
다이안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후다닥 내게 달려왔다.
“에구, 괜찮아요. 보기에는 좀 위험한 느낌이었을지 모르지만, 올리비아 씨가… 진심으로 공격한 건 아니었어요. 하하….”
나는 다이안을 안심시켜 주면서도, 지킬과 하이드처럼 두 얼굴을 가진 올리비아를 살짝 질린 눈으로 힐끔거렸다.
“그냥 총으로 쏘지 그랬어요?”
체스휘가 내게 다가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만져 주며 속닥거렸다. 나는 그런 그를 한 번 째려봤다.
그때, 올리비아가 어미 새처럼 세르쥬를 꽉 끌어안은 상태로 나와 체스휘를 의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자기들, 진짜 모로스 아니야? 나 속이고 그러는 거 아니지?”
“아니거든요! 사람 말 좀 믿어요.”
나도 울컥해서 아까보다 강력하게 소리쳤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올리비아는 우리를 향한 의심이 반쯤은 걷힌 기색이었다.
“좋아, 그럼 믿겠어. 나중에 내 뒤통수치면 가만 안 둬!”
“올리비아 씨야말로 이렇게 다짜고짜 사람 앞통수 갈기지 마세요….”
나는 살짝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자기는? 내가 언제 앞통수를 갈겼다고…. 아, 맞다! 지금 1호실 애를 데리러 위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이 와 있는데. 아우, 나 옷 구겨진 것 좀 봐! 자기, 너무한 거 아니야? 좀 살살했어야지! 응? 잠깐, 바닥에 떨어진 이건 내 머리핀? 악, 그러고 보니까 지금 나 산발이잖아! 내 머리 꼴 어쩔 거야?!”
올리비아는 나와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느라 엉망이 된 자신의 행색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한바탕 난리를 쳤다.
“다행히 루스카가 아직 안 갔나 봐! 빨리 보러 가자.”
다이안이 올리비아의 말을 듣고 약간 밝아진 얼굴로 내 손을 잡아당겼다.
나는 문득 새삼스러운 눈으로 다이안을 쳐다봤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다이안은 냉소적인 모습으로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피하며 저택 안의 자신의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굉장히 많이 밝아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그럼 좀 서둘러 볼까요?”
“잠깐, 7호실. 옷도 안 갈아입고 가? 또 나처럼 자기를 모로스로 생각해서 공격하는 사람이 있어도 난 모른다?”
“그럴 시간 없어요. 방금 올리비아 씨랑 싸워서 다쳤다고 하죠, 뭐.”
“뭐?! 그럼 내가 엄청 난폭한 사람으로 보이잖아!”
올리비아가 펄쩍 뛰었다. 그녀는 살짝 껄끄러운 눈으로 나를 보더니, 슬금슬금 다가와서 바닥에 떨어뜨렸던 머리핀을 나한테 건네줬다.
“이걸로 가리기라도 하든가? 내가 방금 자기를 무작정 죽이려고… 아니, 죽일 생각은 아니었고! 모로스가 맞는지 확인해 보려고 공격했던 게 조금 신경 쓰여서 빌려주는 거야.”
역시 죽일 생각인 게 맞았잖아…?
“그러니까 방금 나랑 싸웠다는 소리는 응접실에 있는 사람들 앞에서 하지 말고. 알았지?”
아무튼, 올리비아가 준 머리핀은 쓸모가 있어 보였다. 그걸 가슴 부근에 달자 보석 아래에 덧대진 검은 레이스가 밑으로 늘어지면서 핏자국도 거의 가려지고, 제법 자연스러운 장식품 같은 느낌이 났다.
“그럼 이제 진짜 응접실로 가죠.”
그러고 나서 우리는 다 같이 응접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는 일단 루스카가 다른 사람들을 따라 저택을 떠나지 못하게 막을 생각이었다.
루스카가 이대로 저택을 나가면 미카엘이나 린 도체스터가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폐기되어 버려지게 될 가능성이 컸다. 아니면 세라나 콘라드 같은 단체의 사람들에게 빼돌려져서 실험체가 되든가.
하지만 그 두 가지 이유가 아니더라도 루스카가 레드포드 저택을 떠나는 걸 말려야 할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나는 그의 쌍둥이 형제인 루시오가 예전에 저택을 벗어났을 때 비정상적으로 앓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 참, 그러고 보니 그때 미카엘이 데려갔던 루시오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따가 체스휘에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스카!”
하지만 일단은 응접실이 바로 코앞이라,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뭐, 뭐야! 7호실? 그리고 2호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접실에는 나머지 두 명의 양육자들도 같이 있었는데, 특히 4호실의 레이븐은 엉덩이에 벌침을 맞은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뭐야, 언제 왔어? 아니, 그보다 두 사람 도대체 뭐야?! 왜 동시에 사라졌다가 동시에 나타나는데?”
그는 아까 올리비아가 그랬던 것처럼 체스휘와 나를 삿대질하며 버벅거렸다. 6호실의 길버트는 평소처럼 우직하고 조용한 모습이었지만, 우리를 향한 얼굴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가만, 그러고 보니까 지금 저택에 남은 양육자는 올리비아, 레이븐, 길버트뿐인데? 그런데 체스휘와 나를 마리엔과 유지니아의 살해범으로 의심한 사람이 이 중에 있다니…. 올리비아가 아니라면, 그럴 만한 사람은 레이븐밖에 없잖아? 나중에 두고 보자.
“루스카, 잠깐 시간 좀 내 줄래? 다른 아이들이 인사하고 싶대. 다이안하고 세르쥬랑 같이 잠깐만 옆방에서 이야기 좀 해 주면 안 될까?”
일단은 루스카를 데리러 온 사람들을 자극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를 빼내려고 둘러댔다. 다행히 루스카는 말없이 내 뒤에 있는 다이안과 세르쥬를 쳐다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