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 들르는 거예요. 가 봤다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지 다시 나올 거고.”
나는 반색하며 입술을 벌렸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체스휘가 내 손을 아플 정도로 강하게 움켜쥐면서 가까이에서 시선을 얽었다.
“그리고 잊지 마.”
마지막으로 내 귀에 떨어진 짤막한 음성은 손에 가해지는 압력처럼 묵직했다.
체스휘는 그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대답하듯이 그의 손을 꽉 맞잡았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악마의 화원 속의 검은 문을 넘었다.
***
“여기예요?”
내 물음에 체스휘가 대답 없이 앞으로 걸음을 뗐다. 하지만 그 행동이야말로 대답을 대신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 오오…. 생각보다 되게 간단하네?
역시 체스휘가 있어서 여러 시공간을 헤매지 않고 바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린, 내가 그랬잖아. 어차피 계속 여기로 되돌아온다니까?”
사정을 모르는 다이안은 왜 바로 악마의 화원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 안에 있는 검은 문을 굳이 한 번 더 통과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눈치였다. 지금 자세한 설명을 해 주기에도 여의치 않아서 나는 그냥 다이안의 손을 붙잡고 체스휘를 따라 걸어갔다.
거대한 꽃들이 알아서 사사삭 비켜 길을 만들었다. 그래서 악마의 화원을 벗어나기도 쉬웠다.
“이거 가져가요.”
녹슨 철문 앞에서 체스휘가 나한테 총을 건네줬다. 어쩐지 의외라 나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싫으면 말고.”
“아니! 고마워요.”
체스휘는 아직 탐탁지 않은 마음이 있는 듯이 슬쩍 눈매를 찌푸렸다. 혹시 그의 마음이 변할세라 나는 얼른 총을 받아 챙겼다.
“다이안, 같이 가요!”
그사이에 다이안은 마음이 급했는지, 앞장서서 아무도 없는 길을 뛰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넘어지지 않게 좀 천천히 뛰라고 했을 테지만 오늘은 나도 그를 말리지 않고 그냥 바짝 따라갔다.
오랜만에 돌아온 레드포드 저택은 조용했다. 사실 어느 시간 선의 분열된 세계이든, 레드포드 저택은 늘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지금도 주변 풍경이 낯설 건 없었다.
하지만 드디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는 생각 때문인가? 기묘하게도 이곳의 공기는 뭔가 좀 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다이안과 나는 체스휘보다 먼저 건물에 도착했다.
그러고 나서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은….
“앗, 7호실?! 뭐야, 살아 있었구나! 자기 도대체 며칠 동안 어디에 틀어박혀 있다가 이제 나타난 거야?”
검은 레이스 리본으로 장식한 올리브그린색 머리칼과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갈색 눈을 가진, 오늘도 아주 화려한 검은 드레스를 입은 올리비아였다.
그녀는 양육하는 세르쥬의 손을 잡고 복도를 걷다가 나를 발견하고 두 눈을 부릅떴다. 생생한 경악의 감정이 드러난 얼굴과 격렬하게 나를 삿대질하는 손짓을 보니 내 등장에 정말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나도 정말 오랜만에 보는 올리비아가 반가워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올리비아 씨? 오랜만이에요! 하나도 안 변하고 그대로네요.”
“으, 응? 뭐야, 왜 이렇게까지 반가워해? 자기… 내가 되게 많이 보고 싶었나 보다? 하긴, 나도 그동안 7호실이 어디 안 보이는 곳에서 죽은 게 아닌가 싶었는데, 이렇게 얼굴 보니까 반갑긴 하네.”
올리비아는 내가 반색하며 다가가 손을 덥석 붙잡자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하긴 그녀의 입장에서는 나와 겨우 며칠만 보지 못했을 뿐일 테니, 이런 내 태도가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최소한 한두 달 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올리비아가 나를 부르는 이 ‘자기’라는 소리에서마저 그리운 느낌이 다 들까?
“그런데 7호실, 그 피는 뭐야? 어디에서 한탕 하고 왔어? 정말 멀쩡한 거 맞아?”
“올리비아 씨야말로 오늘은 검은색 옷으로 깔맞춤했네요. 물론 그래도 색깔 말고 다른 건 올리비아 씨답지만요.”
“뭐어. 둘 다 평소에 재수 없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된 건 조금 안됐으니까…. 하지만 조의의 마음만 담으면 됐지, 굳이 수수한 검은 옷을 입어야 할 필요는 없잖아?”
올리비아의 말을 듣고 나도 마리엔과 유지니아의 일을 떠올렸다. 나와 타인의 죽음은 이미 내게 익숙했고, 어차피 다른 분열된 레드포드 저택에서 그들이 살아 있을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크게 슬프거나 연민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지만 살짝 기분이 가라앉기는 했다.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올리비아의 옆에는 오늘도 영혼 없는 눈을 한 세르쥬가 있었다. 그는 나와 체스휘를 힐끔 쳐다본 뒤 다이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결국 찾아왔네. 너도 참 열성적이다.”
“응! 2호실 양육자도 찾았는데 미뉴엘한테도 알려 줘야지.”
세르쥬는 어지간하다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다이안은 그것을 칭찬으로 받아들였는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세르쥬의 반응을 보니, 아이들의 경우에는 다이안이 나를 찾으러 간 걸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2호실 양육자도 같이 왔다고?”
그때, 올리비아가 슬쩍 눈매를 찌푸리며 아무도 없는 내 뒤를 힐끔거렸다. 나와의 갑작스러운 만남으로 느낀 놀라움이 어느 정도 가셨는지, 그녀의 얼굴은 한결 차분해져 있었다.
“근데 진짜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2호실하고 7호실이 귀신같이 사라져서 다들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1호실이랑 3호실 양육자처럼 저택 어딘가에서 이미 죽었는데 시신만 찾지 못한 거라느니, 사실은 두 사람이 다른 양육자들을 죽인 범인이라 도망간 거라느니, 얼마나 말이 많았다고. 아, 물론 나는 자기들이 살인범이란 의견은 안 믿었어. 그래도 지금까지 친하게 지냈던 의리가 있는데 그런 의심까지 하는 건 좀 너무하잖아?”
나는 올리비아의 말을 듣고 멈칫했다.
…그렇구나!
그동안 생각해 보지 못한 관점인데, 이건 내 실수였다. 그동안 내 사정에만 정신이 팔려서, 나와 체스휘가 이곳에서 사라진 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을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다.
마리엔이 모로스화 되어 죽고 난 직후에 나와 체스휘가 증발한 셈이니, 과연 저택의 분위기가 이상하고 흉흉해졌을 만했다.
“아, 그건 사정이 좀 있었는데….”
“그래, 사정. 있을 수 있지. 그런데 내 생각에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닌 것 같아.”
응? 그런데 올리비아가 뜻밖에도 지금 굳이 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내 말을 가로막으며 손을 들었다.
“7호실 자기 말이야….”
나는 올리비아의 시원스러운 모습에, 그녀가 원래 이렇게 대인배였던가 의아했다. 하지만 바로 뒤따른 그녀의 말에 곧 당황하고 말았다.
“살인범은 그렇다 치고, 혹시 모로스인 건 아니겠지?”
“예?”
“그러고 보니 그 핏자국도 수상하네…. 그거 다른 사람 피 아니지? 옷에 작게 구멍도 뚫려 있고, 아무래도 총상을 입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멀쩡하게 돌아다녀?”
올리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런 그녀의 눈빛은 벼려진 송곳처럼 예리하고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올리비아는 옆에 있던 세르쥬를 붙잡고 조용히 한 발 뒤로 물러나 나와 거리를 벌리기까지 했다.
“생각해 보면 좀 그래. 결국 1호실 양육자도 모로스면서 태연하게 멀쩡한 인간 행세를 해 왔던 거 아냐?”
“아니, 올리비아 씨?”
“방금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갑자기 나타나서 나한테 지나치게 반가운 척하지를 않나. 역시 생각할수록 뭔가 이상해.”
그건, 너무 오랜만이라 직전에 저택에서 있었던 일들을 까먹어서!
하지만 올리비아는 이미 마음속의 의심을 굳힌 듯이 섬뜩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들고 있던 지팡이를 고쳐 쥐고 있었다.
“린이… 모로스…?”
다이안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하게 서 있다가, 올리비아의 말을 듣고 지진이 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아니, 오해예요! 오해라고!”
“오해? 그럼 어디 한번 증명해 봐!”
내가 급히 입을 열었지만, 올리비아는 이미 내 정체가 모로스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그녀는 대뜸 내게 달려들어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휘둘렀다.
슈욱!
날카로운 심이 빠져나온 지팡이가 곧장 나를 찔러 들었다. 나는 황급히 몸을 틀어 올리비아의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곧장 궤도를 튼 지팡이가 이번에는 내 머리를 터트려 버리려는 듯이 사선으로 부웅 소리를 내며 강하게 휘둘러졌다.
“내 말부터 좀… 들어 보라니까!”
이, 이 여자가 진짜!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이렇게 대뜸 공격하다니! 정말 날 죽이려는 거야? 게다가 이 살기등등한 눈빛을 보니, 그냥 내가 모로스인지 가볍게 확인만 하려는 게 아니라 완전히 진심으로 없애 버리려는 거잖아!
이렇게 돌아오자마자 올리비아와 뜬금없이 혈전을 벌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쩌다가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정말 기가 막혔다. 나는 이 사달을 낸 원흉 중 하나인 체스휘에게 이제 애틋한 마음 대신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나, 난 린이 모로스여도 같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만해! 린을 해치지 마!”
복도의 한쪽에서 다이안이 가련하게 외쳤다. 그는 올리비아와 내 싸움에 어떻게든 끼어들려고 노력 중이었지만, 우리가 워낙 복도 여기저기를 붕붕 빠르게 움직여서 겨우 쫓아오는 게 전부인 것 같았다.
“다이안, 위험하니까 가까이 오지 마요!”
“모로스 주제에 연기하지 마! 당장 애들한테서 떨어져!”
다이안의 눈물 젖은 말은 물론 엄청나게 감동적이고 고마웠지만, 올리비아를 진정시키는 데 도움은 안 됐다. 그녀는 오히려 광분한 듯이 나를 더 거칠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세르쥬, 빨리 네 양육자 좀 말려 봐!”
“귀찮아…. 그리고 언제 올리비아가 내 말 듣는 거 봤어? 좀 저러다가 말겠지.”
다이안이 세르쥬를 다그쳤으나, 그는 한숨만 폭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