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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287)화 (287/300)

“하여간에, 잠깐 방심하면 기회를 안 놓치지.”

나를 응시하는 체스휘의 시선은 어딘가 복잡미묘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왠지 김이 새서 그냥 속으로만 삼키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쿵! 쨍그랑!

그때, 복도에서 또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가 깨지거나 부서지고, 사람들이 고함과 비명을 내지르는 소리로 밖은 금방 소란스러워졌다.

또 모로스인가? 내가 되살아난 지 시간이 조금 흘렀으니, 슬슬 또 모로스가 나온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어쨌든, 하던 대화를 더 이어갈 만한 상황과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얼추 중요한 얘기는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금만큼은 살짝 어색하던 참에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체스휘에게서 슬쩍 몸을 떨어뜨리며 물었다.

“여기 계속 있을 거예요?”

“혹시 지금 상황이 이렇게 돼서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해요?”

체스휘가 꼭 내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미약한 의심이 섞인 목소리로 약간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이 예리한 인간. 나이를 먹으면서 눈치도 빨라졌나?

“뭐라는 거예요? 저것들이 지금 누굴 죽이려고 나타난 건데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하지만 내가 일부러 보란 듯이 정색하자 체스휘도 나한테 뭔가를 더 따지려 하지는 않았다.

“글쎄, 어떻게 할까. 일단 나가서 상황을 보고 생각해 봐도 될 것 같기도 한데.”

체스휘는 이 상황이 마뜩잖은 듯이 미간을 좁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그에게서 떨어져 방을 뒤졌다.

“지금 뭐 해요?”

“무기로 쓸 만한 거 찾아요.”

가지고 있는 총은 총알이 없었으니까 나도 유사시에 사용할 만한 다른 도구를 찾아봐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게, 이 방에는 부지깽이밖에 없었다.

아쉬운 대로 일단 이거라도 챙긴 다음 복도나 다른 방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고개를 들었는데, 체스휘가 뭔가를 고민하는 눈으로 말없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체스휘는 갑자기 멈칫하더니, 고개를 창문 쪽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그의 눈에는 어느새 싸늘한 빛이 어려 있었다.

“갑자기 왜 그래요?”

“아니….”

내 물음에도 체스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일부러 나를 무시하는 건 아닌 것 같았고, 조금 전에 내 시스템에 접촉할 때처럼 뭔가에 집중한 듯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살짝 찌푸려진 그의 얼굴에 의혹과 짜증, 그리고 불쾌함과 황당함이 차례로 깃들었다. 나는 갑자기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어서 그를 따라 창밖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보이는 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거기에 매달린 갈색 이파리뿐이었다.

찡그린 눈을 다시 돌렸을 때, 체스휘는 이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그의 눈빛이 꼭 귀찮은 걸 달고 온 사고뭉치를 보는 듯했다. 나는 흠칫해서 몸을 살짝 뒤로 빼며 체스휘에게 경계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왜 날 또 그렇게 봐요? 뭐야, 도대체 뭔데?”

“난 가끔 진짜… 이하린 씨 때문에 언젠가 내가 화병으로 죽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요.”

느닷없이 또?

“나 지금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부지깽이도 아직 안 들었는데?”

“가만히 좀 있어 봐요. 지금 중요한 고민 중이야.”

뭔데 이렇게 거창한 소리를 하나 싶었지만, 체스휘는 정말 심각한 고뇌에 빠진 얼굴이었다. 그는 아까처럼 손을 들어 얼굴을 훑어 내리면서 잠깐 갈등하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눈빛이 퍽 싸늘한 걸 보면, 잘은 몰라도 단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그에게 발생한 게 틀림없었다.

나는 좀 긴가민가하긴 했지만, 혹시 또 내가 자살이라도 할까 봐 체스휘가 이렇게 우중충한 분위기를 풍기나 싶어졌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을 접고 부지깽이를 발로 쓱 밀었다.

그걸 보던 체스휘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뒤이어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작은 욕설을 읊조린 그가 문으로 향하던 걸음을 옮겨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창문으로 나가죠.”

“창문?”

체스휘는 정말 창문을 열고, 미심쩍은 눈으로 다가간 나를 낚아채 그 밑으로 뛰어내렸다.

“어? 지금 어디 가요?”

다행히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모로스로 변해서 쫓아오거나, 우리를 보고 놀라서 경계하는 사람들의 방해 없이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체스휘가 지금 무슨 생각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정해진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거침없이 달리고 있긴 한데, 아까는 분명 밖으로 나가서 상황을 좀 보자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다가 나는 문득 체스휘가 어디로 향하는지 짐작하고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우리가 도착한 곳은 저택의 후원, 악마의 화원이 있는 곳이었다.

철커덩, 하고 녹슨 쇳소리가 울린 뒤 악마의 화원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체스휘가 안으로 들어서자 역시나 괴물 꽃들은 두려운 존재를 마주치기라도 한 듯이 그를 피했다.

체스휘는 시스템의 농간으로 괴물 꽃들이 달려들기라도 할까 봐 우려되었는지, 나를 내려놓지 않고 그대로 안은 채 화원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굉장히 깊이, 아주 깊이…. 짙은 안개 때문에 이곳이 아예 세상과 단절된 고립된 하나의 공허 속인 곳처럼 느껴질 정도로 깊은 곳까지 걸어갔다.

“…역시 여기였구나.”

그리고 마침내 시야에 들어온 광경에 나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하얀 안개 속에 혼자 이질적일 정도로 선명하게 우뚝 솟아 있는 검은 문.

어쩐지 얼마 전에 악마의 화원에 들어갔을 때, 괴물 꽃들에게 끌려가면서 언뜻 뭔가를 봤던 기억이 있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예전에 이곳에서 미카엘 카드리고와 마주쳤던 것도 심상치 않았고 말이다. 그래서 내심 의심하고 있었는데, 정말 여기에 문이 하나 더 있었다니….

“그런데 여긴 왜 온 거예요?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거예요?”

나는 미심쩍은 기분으로 체스휘를 힐끔 쳐다봤다.

지금까지 이 남자는 나를 혼자 독점하고자 하는 집착 어린 마음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집념으로 눈이 돌아 있던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마음이 변하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데리고 지금까지 숨겨놓았던 문 앞에 오다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를 회유하는 내 태도에 미온한… 아니, 상당히 회의적이고도 불만스러운 반응을 보였으면서 말이다.

체스휘는 여전히 이 상황이 탐탁지 않은 것처럼 살얼음이 낀 것 같은 서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않고, 나를 데리고 문으로 한 발자국씩 걸어갔다.

“그냥 무시하고 싶었는데, 그럼 이하린이 날 용서하지 않을 것 같아서.”

체스휘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그 말의 정확한 의미를 묻기도 전에, 체스휘의 손이 문에 먼저 닿았다.

파앗!

이미 수없이 경험해 봐서 익숙한 보라색 빛이 가장 먼저 시야를 잠식하고 온몸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자, 여전히 뿌연 안개가 서린 화원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방금까지 있던 악마의 화원과 아주 미묘하게 흐르는 공기의 느낌이 달랐다. 그래서 지금 이곳이 다른 레드포드 저택에 있는 악마의 화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퍼뜩 눈을 돌려 내 몸을 살폈다. 입고 있는 것은 여전히 피 묻은 옷 그대로였고,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익숙한 보라색이었다. 손으로 더듬거려 확인한 얼굴도 확실히 린 도체스터의 것이었다.

역시 짐작했던 게 맞았다. 지하실이 아닌 악마의 화원에 있는 문으로 이동하자, 정말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지 않고 원래 상태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체스휘 씨, 나 지금 린 도체스터 맞죠?”

“응.”

“그럼 여기가 원래 있던 레드포드 저택이에요? 우리 지금 거기로 돌아온 거예요?”

“아니.”

뭐, 아니라고?

갑자기 각성하여 백화한 체스휘가 나를 데리고 다이안과 미뉴엘, 그리고 다른 양육자들과 아이들이 있는 레드포드 저택으로 돌아온 줄 알고 일순간 마음이 두근거렸었는데, 체스휘가 초를 쳤다.

“뭐야, 그럼 여긴 왜 온 거….”

“쉬잇. 린 씨가 찾던 게 여기에 있으니까 조용히 귀 기울여 봐요.”

그런데 체스휘가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했다.

나는 얼굴을 구기며 해명을 바라는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체스휘는 다른 설명을 더 해주지 않고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하는 수 없이 의혹 어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내가 찾던 게 이곳에 있다니… 뭘 말하는 거지?

그 정답은 생각보다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흐흑, 후웅… 훌쩍.”

안개 속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언뜻 귀신이 곡하는 소리같이 느껴지기도 했는데, 나는 미묘하게 익숙한 느낌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나는 안 무서워…. 정말 안 무서워. 흡….”

그러다가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한 소년의 훌쩍이는 목소리가 귀에 꽂혀서 눈을 번쩍 떴다.

“다이안?”

나는 내 생각이 맞는지 확인하듯이 체스휘를 한번 쳐다본 뒤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서둘러 뛰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안개 속에서 소년이 몸을 작게 웅크린 채 ‘나는 무섭지 않다, 나는 이겨 낼 수 있다’ 같은 혼잣말을 스스로에게 세뇌하듯이 중얼거리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불쌍하게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는 모습을 보면, 소년은 지금 전혀 괜찮은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거대한 꽃들이 소년의 주위를 얼쩡거리며 그를 얼기설기 둘러싸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이 화원에 들어왔을 때처럼 먹잇감을 발견한 듯이 득달같이 달려들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어린 소년에게는 괴물 같은 꽃이 단지 그렇게 주변을 기웃거리는 것만으로도 공포였던 모양이다.

나와 체스휘가 다가가자 꽃들은 여지없이 후다닥 몸을 비켰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 숨겨져 있던 소년의 모습이 더욱 분명히 내 눈에 들어왔다.

“다이안!”

나는 뒷모습만으로도 저 소년이 누구인지 확신하고 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뭐야, 왜 다이안이 여기에 있어? 이곳은 우리가 원래 있던 레드포드 저택이 아니라고 했는데? 아, 그럼 혹시 이건 내가 아는 다이안이 아니라 다른 분열된 시공간의 다이안인가?

“린!”

하지만 소년은 내 목소리를 듣고 촉촉하게 젖은 눈을 홉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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