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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286)화 (286/300)

“있죠. 내가 린 도체스터 이전의 시간들이 다 기억난다고 했잖아요.”

나는 의자에 앉은 남자를 잠깐 말없이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체스휘 씨하고 처음 만나기 전의 일도 다 기억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부분은 나한테 있어 굉장히 중요하고 또 민감한 사항이라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나 이제 미카엘 카드리고가 누구인지 알아요.”

그래서 결국 아까부터 계속 마음에 담고 있던 얘기를 꺼내자, 내 시야에 비친 남자의 표정이 한순간 살짝 변했다.

체스휘가 내 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던 몸을 천천히 의자에 기대며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말투도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앞에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의자에 앉아 나를 지켜보고 있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바보같이 몰라봐서 미안하다는 뜻이야.”

남자는 내 품에 머리를 파묻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어깨와 머리를 팔로 끌어안고 그의 정수리에 얼굴을 기대자, 맞닿은 몸이 약간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 오랜만이어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나는 지금 이 남자의 안에 깃들어 있는 소년에게 계속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렇게 널 보낸 후에….”

“…….”

“매일 네 걱정을 했어.”

그때 그 소년을 그렇게 떠나보내지 말았어야 했다고 줄곧 후회했다. 소년이 저택을 떠나던 그 마지막 모습이 꼭 눈에 박히기라도 한 것처럼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선명히 떠올랐다.

“예전에 완전히 혼자가 되었던 이후로, 살면서 나한테 그렇게 큰 의미를 가졌던 건 네가 유일했지. 너는 나한테 내 동생이었고, 친구였고, 그때 나를 살게 하는 유일한 이유 같은 거였으니까.”

이하린일 때의 나는 삶의 목표나 즐거움 하나 없이, 그냥 하루하루를 연명하듯이 살아가던 빈껍데기였다. 그 당시의 내가 그나마 사람같이 지냈던 건 게임 속에서의 시간이 유일했다.

그러니 지금까지도 내 무의식에 남아 있던 소년의 존재가 나한테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는, 이제 와서 굳이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소년과 그렇게 헤어진 뒤에, 늘 그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때는 얼굴을 보고 평범한 인사를 하고 싶었다.

안녕, 오늘 날씨가 참 좋다. 그동안 잘 지냈니? 나는 그럭저럭 잘 지냈어. 네가 조금 보고 싶긴 했지만….

꼭 어제 만났다가 헤어진 것처럼 그런 말을 여상히 건네고, 기분 좋게 웃으면서 얼굴을 마주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저택에서 죽고 나서도 떠나지 못하고, 아주 오랫동안 계속 널 찾아다녔는데….”

그러나 나는 저택에 갇힌 신세였고,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기도 전에 먼저 죽어 버렸다.

“하지만 다시 시작하면 모든 걸 잊게 돼서, 그래서 그때마다 가장 먼저 만난 아이들을 너로 착각했던 거야.”

사실 내가 계속 찾던 그 소년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늘 내 옆에서 자신을 알아봐 주길 바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네가 먼저 약속대로 날 찾아와 줬네.”

마냥 어린 동생 같던 소년은 내가 모르는 곳에서 어느새 훌쩍 자라 훤칠한 청년이 되었다. 뒤늦게 세월이 참 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목숨 걸고 지켜 줘야만 할 것 같던 소년은 더 이상 내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는 강한 어른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너무 일찍 죽었다.

체스휘의 몸 안에 남겨진 미카엘 카드리고의 영혼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심지어 체스휘와 미카엘이 융합된 이 남자는, 그 후에도 셀 수 없는 절망과 죽음을 맛봐야만 했다. 전부 나 때문이었다.

“고마워. 네 덕분에 그동안 이곳에서 끝없이 헤매던 시간이 그래도 덜 외로웠어.”

하지만 지금 그런 말을 해 봤자 이 사람에게 기억하기 싫은 끔찍한 과거의 일들만 떠올리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은 미안함 대신 다른 마음을 우선적으로 더 많이 전하고 싶었다.

바로 그때, 나한테 안긴 순간부터 미동조차 없이 멈춰 있던 남자가 처음으로 움직였다.

“뭐야….”

명치 부근에서 작게 읊조리는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 직후에, 소리 없이 들어 올려진 손이 내 허리춤에 닿았다. 그 손은 곧 내 옷자락을 으스러뜨릴 듯이 세게 움켜쥐었다.

“그게 언제 있던 일인데, 이제 와서….”

조금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시작되었던 그의 말은 이내 감정을 억누르는 것처럼 끝맺음 없이 멈춰졌다. 그러고 나서 또 그는 한동안 말없이 내 품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나는 내 옷을 움켜쥔 남자의 손에 점점 더 강한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진짜 어이없네…. 이게 도대체 무슨 기분이야.”

이윽고 체스휘가 고개를 들었다. 우스워서 실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짜증스럽게 구겨진 것 같기도 한 그의 얼굴에는 뭐라고 형언하기 어려운 표정과 감정이 녹아 있었다.

“감동적이면서 질투 나잖아.”

아무래도 하나의 육신 안에 두 개의 영혼이 있어서 그런지, 감정의 일치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싸고돌던 그 애들이 나인 줄 알았다고?”

그는 약간 허탈한 듯이 입술 사이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작게 실소했다.

“난 원래 이하린이 버려진 애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못하는 성격인 줄 알았지. 그래서 나도 사실은 당신한테 그냥 잠깐 스쳐 지나가는 사람 중 한 명이었던 것 같아서 좀 분했는데.”

나지막하게 이어지던 목소리가 서서히 낮게 가라앉았다.

“그런데 나라고 생각해서 그동안 그렇게 목숨 던져 가며 그 애들을 지키려고 했던 거라고….”

나는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베일 듯이 아주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그의 기운이, 꼭 폭풍이 멎은 후의 고요한 바다처럼 조금씩 잠잠하게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나도 애잔한 마음에 손을 들어, 지금 마주한 남자의 안에 깃든 두 개의 영혼을 모두 어루만지듯이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지금의 당신에게도 미안하게 생각해. 마지막이 그런 식이면 안 되었는데, 매번 슬프게 해서.”

“나 안 미워요?”

체스휘가 속삭이듯이 잦아든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지난번에 내 손으로 당신을 죽였는데.”

“안 미워요. 어떻게 미워해.”

나는 그가 이 문제를 그동안 남몰래 아주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바로 대답해 주었다.

“그때 그게 내가 원했던 거잖아.”

사실은 그 모든 게 전부 다 앞에 있는 이 남자를 찾기 위해서였다는 게 우스우면서도 허망했다.

“당신이야말로 그때 내가 지긋지긋해져서 다신 안 만날 생각이었던 거 아니었어요?”

“그랬었지, 그땐.”

나도 말이 나온 김에 내심 마음에 걸렸던 걸 묻자, 체스휘가 담담하게 긍정했다.

“하지만 잘 안 됐어.”

그리고 그는, 나로서는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깊고도 긴 고뇌와 괴로움이 녹아들어 있을 것이 분명한 눈으로 나를 보며 덧붙였다.

“이하린 없이는 살아도 사는 것 같지가 않았어.”

그저 고요한 목소리로 읊조리듯이 나직하게 속삭이는 그의 모습이 내 두 눈에 박혔다.

어쩌면 나는 지금 이 순간 역시 앞으로 아주 오랫동안 잊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 어렴풋이 직감했다.

사실 지금 이 남자와 내 관계는 어딘가 이상했다. 우리 모두 어떤 의미로는 이 저택에서 가장 기묘한 존재이기도 했다.

일단 그의 몸 안에는 내 소중한 소년인 미카엘의 영혼과 이후에 만나 조금 마음이 끌렸던 체스휘의 영혼이 뒤섞여 있었다. 두 영혼이 각각 얼마큼의 비중을 가지고 있는지는 내가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완전히 일체화되지 않은 상태인 듯했다.

게다가 나는 죽을 때마다 새로운 육신을 빌려 다시 돌아오는 괴이한 존재였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저택에서 이상하지 않은 게 있던가? 그러니 일반인의 상식과 규범 같은 건 이제 와서 복잡하게 따지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체스휘 씨. 그리고 미카엘…. 당신이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조금 전처럼… 그런 생각은 다신 하지 마요. 난 이 세계를 벗어날 마음이 없어. 내가 어떻게 그래? 당신이 여기에 있는데 어떻게 나 혼자 떠나겠어.”

그리고 나는 역시 이 남자를 버릴 수가 없었다. 나 때문에 그 기나긴 시간 동안 혼자 외로운 날들을 인내해 왔던 이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이 레드포드 저택이 있는 18세계의 주인이 된 체스휘가 마음대로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내 말을 들은 체스휘의 눈에 얕은 파문이 이는 것이 보였다. 내 허리를 옥죈 팔의 힘이 강해졌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나 멋대로 기대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마치 한계까지 감정을 집어삼킨 양, 아주 낮게 억눌린 목소리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럼 이제는 그런 식으로 떠나지 않고 계속 나랑 같이 있을 거야?”

당연히 그렇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이어진 체스휘의 말이 나를 멈칫하게 했다.

“이제는 진짜 나만의 이하린이 되어 줄 거예요?”

흘러가는 분위기상 그렇다고 대답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지금 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의지도 그러했으니, 더욱이 고개를 끄덕이는 게 어려울 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말을 듣자, 어째서인지 쉽게 수긍하기가 어려워졌다.

어둠이 모두 걷힌 듯이 낯설 정도로 밝은 광채가 어린 눈을 마주하며 나는 등에 식은땀이 배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왠지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달싹이는 내 입술에서 대답이 금방 흘러나오지 않자, 나와 마주한 사람도 수상함을 감지한 것 같았다.

나를 응시한 남자의 얼굴이 서서히 싸늘하게 식었다. 찬연한 이채가 어려 있던 눈동자도 점차 온도를 낮추며 어둡게 가라앉았다.

“뭔데, 이 반응은?”

“…….”

“저기요, 이하린 씨? 우리 방금 되게 감동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았어요?”

체스휘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는 듯이 실소하며 미간을 깊게 구겼다.

또 그가 흑화하기 전에 나는 서둘러 변명했다.

“아, 아니. 당신이 내 1순위 맞아요. 그럼요, 그 전제는 당연한 거고.”

“그런데?”

“그런데… 언제 끝날지 모를 이 세상을… 꼭 둘이서만 살 필요는 없으니까…?”

신박한 헛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체스휘의 눈에 어린 빡침의 강도가 더해졌다. 나는 그를 이해시키기 위해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이건 꼭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원래 세상은 완전한 검은색도 흰색도 아닌 회색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둘이 같이 살면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도 겸사겸사 도와주면 좋겠다… 뭐 그런 얘기인 거죠. 애초에 권태기인 부부 사이에 아이가 있으면 관계 회복과 분위기 전환에 도움이 된다는 말도 있지 않던… 가?”

“이하린 씨랑 내가 권태기 부부야?”

“아, 물론 그건 아니지만! 그냥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의미로…!”

아니, 씨. 당황했더니 아무 말이나 막 내뱉게 되네.

체스휘는 황당함과 짜증이 어린 눈으로 나를 보다가, 이윽고 한숨과 실소가 섞인 얕은 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일단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내 말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막 치솟으려 하던 열도 가라앉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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