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변이 일어난 건 지극히 한순간이었다. 퀘스트 창은 금방 다시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래도 나는 찰나의 순간 똑똑히 목격한 낯선 현상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뭔가 건드린 느낌이 들었는데.”
“지, 지금 뭘 한 거예요?”
“아, 반응을 보니 제대로 짚었나 보네.”
체스휘가 입술 끝을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체스휘 씨가 시스템 건드렸어요?”
“그런가 본데요.”
저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아까부터 설마설마하긴 했지만, 정말 체스휘가 시스템에 접촉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진짜 이렇게 간단히 시스템에 관여할 수 있다고? 그럼 지금까지는 왜….
“지금까지는 이 시스템이란 게 이하린을 죽이려 한다고 말 안 했잖아.”
내가 소리를 내서 말한 건지, 아니면 얼굴에 생각하는 게 드러난 건지, 체스휘가 삐딱하게 웃는 얼굴로 눈매를 설핏 찌푸리면서 말했다.
나는 체스휘의 말을 듣고 ‘그건 그렇지.’ 하고 납득했다. 확실히 시스템이 나를 노리는 것도 내가 기억을 되찾은 지금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방금은 살짝 닿기만 한 거라서 아직 뭘 한 것도 아니고. 애초에 존재감이 너무 희미해. 이렇게 노골적으로 찾으려고 시도해도 겨우 솜털이 스친 정도의 미약한 느낌만 드는 걸 보면….”
나를 응시한 체스휘의 눈이 살짝 날카로운 느낌을 풍기며 가늘어졌다.
“기생충 같은 게 쓸데없이 용의주도해서 불쾌한데. 어쨌든 지금까지 내가 이 시스템의 존재를 특별히 인식하지 못했던 게 이상한 일은 아닌 것 같네요. 그런데 방금 린 씨는 내가 뭘 한 걸 어떻게 알았어요?”
“갑자기 시스템 창의 글씨가 깨져서요. 아주 잠깐 그러다가 말긴 했지만.”
“좀 더 시도해 보면 뭔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시스템을 어떻게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난 또 체스휘의 능력으로 바로 시스템을 제거할 수 있는 줄 알고, 지금까지 시스템의 농간에 당했던 게 좀 허무해질 뻔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하니 묘하게 안심이 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 한 번 더 시험해 볼까.”
잠깐 혼자서 뭔가를 생각하듯이 나를 보던 체스휘가 다시 몸을 움직였다. 그에게 아직 붙들려 있던 손이 앞으로 당겨지고, 귓가에 내려앉는 목소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잠깐만 가만히 있어요.”
애초에 내 의견을 묻는 게 아니었다. 체스휘는 통보하듯이 말한 뒤 내 어깨에 턱을 올렸다.
허리를 감싼 그의 왼쪽 팔에 몸이 끌어당겨져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체스휘의 다른 손이 내 등 전체를 받치듯이 지그시 눌러서 몸이 더 가까이 맞붙었다.
그러니까, 설명이 쓸데없이 장황했지만 결국은 마주 보고 끌어안은 모양새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 상태로 체스휘는 또 방금처럼 집중하는 듯이 말이 없었다.
나는 졸지에 몸을 포박당해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아니, 시스템과 접촉해 보려는 의도인 건 알겠는데… 꼭 이렇게 가까이 붙어야 하는 건가?
하긴, 아마도 이 시스템은 내 영혼에 얽혀 있을 가능성이 컸고, 또 육신은 영혼을 담는 그릇이니까…. 그러니 이렇게 직접 맞닿아야 뭔가를 좀 더 확실히 감지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혹시 내가 괜히 방해하면 체스휘가 시스템을 잘못 건드려서 부작용이라도 생길까 봐 그냥 조용히 있기로 했다.
그런데…. 기분이 뭐랄까, 상당히… 이상했다.
체스휘의 쇄골 부근에 코를 묻은 채로 숨만 들이마셨다가 내뱉고 있는 이 상황이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의미로 나를 좌불안석으로 만들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과거의 기억을 모조리 되찾고 나서 이렇게 이 남자와 밀접한 접촉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물론 기억 열람 직후에 막 눈을 떴을 때도 체스휘에게 안겨 있는 상태이긴 했다. 하지만 그때는 충격과 혼란으로 거의 공황 상태였고, 문밖에서 모로스가 한참 시끄럽게 아우성치는 중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시계 초침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했고, 그래서인지 서로의 얕은 숨소리조차 크게 의식되었다. 혼자 차분히 주변을 살필 수 있는 상황이라 그런지, 맞닿은 사람에게서 전해지는 온기와 심장박동, 체향 같은 게 온몸의 감각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느낌이 들었다. 가슴이 기묘하게 저릿하고 울렁거리기도 했고, 왠지 조금씩 숨이 차오르면서 살갗이 닿은 곳마다 예민하게 열이 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역시 이건 내가 이 남자와 함께 보냈던 시간들을 기억하게 되면서, 그를 향한 감정의 농도가 변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아, 하지만 시스템 창을 건드리는 중이라 그런 걸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러다가 문득 조금은 미심쩍은 마음이 들어서 시스템 창을 확인해 봤다. 하지만 이상은 없었다. 그래도 기분 탓인지 미묘하게 뭔가가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긴가민가했다.
“저기, 지금도 시스템하고 접촉해 있어요?”
“왜? 어디가 이상해요?”
“아니. 그냥 물어봤어요.”
“문제가 있으면 정확히 말해 줘야 나도 어느 정도까지 손을 대도 될지 가늠하지.”
말을 얼버무리려고 했는데 체스휘는 내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불편한 기색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시스템인지 뭔지 하는 기생충을 떼려다가 이하린을 죽일 수는 없잖아.”
귀에 연달아 나지막하게 읊조려진 음성은 조금 무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태연하고 담담하기만 했다. 그래서 이 상황을 의식하고 있는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를 채근하려는 의도인지, 아니면 내 몸에 문제가 없는지 직접 확인하려는 건지, 등을 받친 그의 손이 척추를 훑듯이 살짝 움직였다. 그것조차 오래전의 기억들을 떠오르게 만들면서 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 증상이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심해지는 걸 보자, 체스휘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게 정말 시스템을 잘못 건드려서 생긴 문제라면 큰일일 수도 있었다. 나는 결국 마지 못해 입을 열었다.
“별건 아니고, 그냥 숨이 좀 막히는 것 같은데….”
“숨 쉬기가 어렵다고? 그것 말고는?”
“심박 수도 올라가는 것 같고…. 열도 좀 나는 것 같고….”
“아아…. 심박 수랑 열.”
체스휘의 반응이 미묘해졌다. 나도 덩달아 어색함과 불만을 느꼈다.
본인이 겁을 줘서 내키지 않는데도 입을 열었더니 반응이 뭐 이래?
“그, 부작용까지는 아닌 것 같고, 지금 확인 중인 시스템하고 제 영혼이 연결돼 있어서 영향을 받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잠깐 멈췄다 하는 게 어떨까요?”
“아직 시스템하고 접촉 안 했는데.”
“…….”
“상당히 새삼스러운 말을 들어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조금 고민하긴 했네요. 이하린은 나랑 같이 있을 때 늘 이랬는데. 심박 수 빨라지고, 숨소리 의식하고, 몸에 열 오르고.”
차라리 체스휘가 대놓고 나를 놀리듯이 장난스럽게 말했으면 내 기분이 조금은 더 나아졌을까? 하지만 그는 정말 특이할 것 없는 진실을 읊듯이 굴곡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이런 소리를 했다.
나는 체스휘를 퍽 밀쳤다. 체스휘는 의외로 순순히 나한테서 떨어졌다.
“역시 이건 좀 까다롭네요. 매번 접촉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앞으로 시간을 좀 들여서 살펴봐야겠어.”
지금은 이 정도로 시험해 보고 끝낼 생각인지, 그는 아예 내가 있는 침대에서 벗어나 아까 앉았던 의자로 다가갔다.
“어쨌든, 이런 상황이면 린 씨가 그토록 아끼는 다이안이 있는 곳에도 이제 못 가겠어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같이 공격당해서 죽어 버릴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역시 체스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차라리 린 씨가 없는 게 아이들한테도 더 안전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태연히 말하는 모습이 좀 얄미울 정도로 상당히 뻔뻔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까 그 시스템을 완전히 없애면, 이하린이 이제 죽어도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잖아.”
다음 순간, 나를 응시한 체스휘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아니면 혹시 그걸 원하고 나한테 시스템을 없애게 시키려던 거예요?”
그리고 그는 또 혼자서 통렬한 오해를 하기 시작했다.
“그걸 바란 거면 유감스러워서 어쩌나. 난 이하린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할 것 같은데.”
“…….”
“이번에 린 도체스터로 정말 모든 걸 다 끝낼 생각이었나 본데, 어림없지. 그렇게 쉽게 나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고? 혹시 뜻대로 안 돼서 실망했다면 미안하게 됐어요.”
나는 좀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는데, 체스휘는 그걸 오인해서 또 마음대로 흑화를 가속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 좀 봐. 언제 내가 먼저 시스템을 봐 달라고 했나? 자기가 먼저 마음대로 확인해 본다고 나서 놓고는 왜 뒤늦게 딴소리지? 게다가 어째 이어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 남자, 참 삐뚤어졌다. 정말 예전에는 나름대로 순하고 착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예 내 말을 전부 다 꼬아서 듣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당연히 나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실망스러움이 아니라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아까 이 남자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걸 미뤄서 이런 참사가 벌어진 것 같았다.
아까는 기억을 되찾자마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리도 안 되고, 문밖에서는 모로스가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또 지금은 시스템 때문에 잠깐 우리 둘 다 신경이 다른 곳으로 쏠려서 제대로 된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했다.
상황을 보니, 지금이 바로 깊은 대화를 나눠야 할 때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