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만 가만히 보고 있는 모습이 조금 이상하고 답답했다.
나한테 먼저 죽으라고 권유했던 건 본인이면서 왜 이렇게 호응이 없단 말인가? 게다가 어차피 이렇게 된 김에, ‘기억을 가진 이하린’이 죽었을 때 시스템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나도 한번 확인해 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그가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자리에서 걸음을 떼 체스휘에게 다가갔다. 손이 닿았을 때 체스휘가 한순간 움찔거렸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직접 떼서 총을 빼냈다. 그런 뒤 바로 생각한 걸 실행에 옮기려다가 잠깐 어떤 생각을 하고는 다시 팔을 내리고 옆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그럼 이따 봐요.”
체스휘가 제자리에 서서 무슨 말인가를 할 듯이 입술을 뗐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나도 주저 없이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체스휘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 후에야 나는 망설임 없이 나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죽음은 익숙했고, 문밖에 있는 사람이 나를 다시 되살릴 것을 믿었기에 불안감도 들지 않았다.
타앙!
곧바로 나를 둘러싼 세상이 새까매졌다.
***
“아, 눈부셔….”
눈을 뜨자마자 체스휘의 굳은 얼굴이 나를 맞아 주었다.
아까는 밤이었는데 지금은 커튼을 투과한 은은한 햇살이 시야를 밝히고 있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먼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이곳은 내가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던 방이 아니었다. 모로스의 소리로 시끄럽던 주변도 지금은 작은 소음 하나 없이 아주 조용했다.
그 모든 정보를 종합했을 때, 체스휘가 내 말처럼 다른 레드포드 저택으로 장소를 옮겨 와 내 몸을 복구한 모양이었다.
린 도체스터의 몸은 확실히 편리했다. 이전과 달리 여벌의 목숨이 많아서, 이렇게 죽어도 다른 육신을 찾아 방랑하는 영혼이 되는 게 아니라 다시 이 몸으로 되살아나는 게 가능했으니 말이다.
“여기는 지금 아침인가 보네요. 커튼 좀 살짝 쳐 주면 안 돼요?”
물론 커튼이 얇아서 창문을 가려도 햇빛이 안으로 들어올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지금처럼 직사광선을 얼굴에 그대로 받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침대맡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던 체스휘가 말없이 몸을 움직여 창가로 다가갔다. 그가 내 부탁대로 커튼을 쳐서 햇빛을 가려 주는 사이에, 나는 침대에서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어디 보자, 딱히 아픈 데는 없고. 총알이 관통했던 가슴도 핏자국이 남은 것 말고는 멀쩡해 보였다.
총으로 자살할 때는 머리를 쏘는 게 정석이라지만, 그렇게 하면 죽은 내 상태가 너무 처참할 것 같았다. 적어도 가슴을 쏘면 피나 살점이 조금 밖으로 나와도 머리가 터지는 것보다는 주변이 덜 지저분할 테니, 이쪽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그건 역시 잘한 선택인 것 같았다.
“잘 고쳤네요. 옷만 아니면 티도 안 났겠어요.”
“불편한 데는?”
“음, 없는 것 같은데.”
체스휘가 다시 침대맡으로 돌아와서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몸을 이리저리 조금씩 움직여 보다가, 옆에서 계속 느껴지는 시선에 그를 힐끔 올려다봤다.
아까부터 왜 계속 이런 얼굴이지? 차갑게 굳어서 툭 찌르면 얼음조각이라도 떨어질 것 같잖아. 아무래도 말로는 나한테 한 번만 죽어 보라고 해 놓고, 막상 진짜로 이런 상황이 되니 뭔가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좀 새삼스럽지 않나?
“저기, 최근에 악마의 화원에서 나 두 번 정도 이미 죽었던 거 아니에요? 그때도 아무렇지 않았으면서 지금은 왜 그래요?”
왠지 기억을 되찾은 후로 체스휘를 자극하는 게 조심스러워져서 약간 소심하게 물었다. 물론 말을 꺼내 놓고 괜한 걸 물었다 싶어서 살짝 후회했다.
“그때는 안 죽었는데. 아슬아슬하게 죽기 직전인 상태까지 가긴 했지만.”
이어진 체스휘의 말에 나는 침묵했다.
나한테 화가 난 상태라 악마의 화원에서 그냥 죽게 내버려 뒀을 줄 알았는데, 아니라고?
그리고 또 한 번 깨달았다.
‘아, 이 사람 말만 태연했던 거구나.’
말로는 내가 죽어도 상관없다느니, 자기 손으로 나를 죽일 수도 있다느니 하면서 냉소적으로 굴었지만, 사실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던 것이다.
“어쨌든, 말한 대로 한번은 시험해 봤으니까 이제 마음대로 죽지 마요. 그런 모습은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생각보다 기분이 더 나빴어.”
무표정한 얼굴로 싸늘히 읊조리는 체스휘의 말을 듣자 조금 더 숙연해졌다.
예전에도 이 린 도체스터의 몸으로 초상화의 영혼에게 한번 죽어서 체스휘가 나를 복구시킨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 체스휘가 보이는 반응은 달랐다. 아마도 그 첫 번째 이유는 체스휘가 그때는 내가 이하린인 것을 확신하기 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죽음에 대한 내 태도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적어도 그때는 내가 죽은 게 사고사였고, 이번처럼 자살하는 모양새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내가 크게 고민하지 않고 스스로 죽어 버린 게 체스휘에게 예전의 상황을 떠오르게 만든 것 같았다. 바로 지난번의 회차 때도 그런 식으로 생을 마감했었으니까….
“알아? 당신 정말 최악이야. 지독해도 이렇게 지독할 수가 없어.”
문득 나는 그때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궁금해졌다. 이번에 기억을 되찾으면서 자아를 잃은 영혼 상태로 18세계를 떠돌았을 때의 일도 살짝 생각났다. 각각의 분열된 18세계는 시간의 흐름이 달랐다. 그러니 지금까지 내가 곧바로 새로운 육신을 찾아 다음 회차를 시작했었다고 해도, 체스휘는 훨씬 긴 시간 동안 나를 찾아 헤맸을 가능성이 컸다.
“아무튼, 이제 조용해졌으니 얘기를 좀 해 볼까.”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한 질문은 왠지 내 죽음에 대한 얘기보다도 가볍게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저하는 사이에 체스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모로스들이 왜 갑자기 뭘 잘못 먹은 것처럼 저렇게 날뛰는 거예요? 지금의 린 씨는 아는 것 같은데.”
나는 침대 근처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는 그를 보며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내가 그동안 잊고 있던 기억을 전부 찾아서 그런 거예요. 나를 이 저택에 보낸 시스템은 날 죽이고 싶어 하거든요. 숨겨야 하는 진실을 내가 알게 돼서.”
“숨겨야 하는 진실? 그게 뭔데?”
“여기 사람들 입장에서는 별것 아닐 텐데…. 그냥, 내가 있던 45세계에서는 문에 대한 걸 일반 사람들에게 철저히 감췄거든요. 게다가 게임이라고 속이고 플레이어들의 육신은 그대로 45세계에 두면서 영혼만 이곳 18세계에 보내는 실험도 했고…. 정확히 뭘 위한 실험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빈 세계를 연구하려던 것 같기는 한데.”
역시 체스휘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이었을 게 분명했다.
“45세계가 있다고?”
하지만 의외로 체스휘는 내 말에 흥미를 드러냈다.
“사람들의 영혼만 레드포드로 보내는 실험을 했다니, 가끔 이상한 경로로 외부의 영혼이 들어올 때가 있었던 게 어쩌면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네. 그런 기술이 있다는 것도 희한하고.”
그는 새로운 정보를 머릿속에 정리하는 것처럼,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하지만 이 세계의 주인은 나인데, 다른 세계에서 만든 시스템이라는 게 내 허락도 받지 않고 이하린을 멋대로 죽이려 한다고?”
다음 순간 그의 입가에 떠오른 가느다란 미소는 보는 이의 등줄기를 오싹거리게 만들 정도로 섬뜩했다.
“제법 건방진데.”
나는 왠지 한기가 들어서 몸을 흠칫 떨었다.
“그 시스템이란 거, 지금도 반응하나?”
“그런데요….”
체스휘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속눈썹 한번 까딱하지도 않고, 미동 없이 앉아 나를 정면으로 응시해 오는 눈이 꼭 총알처럼 나를 관통하는 듯해서 부담스러웠다.
“저기.”
“쉿.”
체스휘는 무언가에 집중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에게 말도 붙이지 못하게 했다. 나한테 못 박힌 그의 눈빛에 언뜻 이질적인 광채가 맺힌 듯했다. 나도 그의 분위기에 압도당해서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혹시 지금 뭔가를 하고 있는 건가?’
체스휘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게 뭔지는 쉽게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한번 확인 삼아 시스템 창을 띄워 보았다.
<체스휘(???세)>
- 제41세계 출신(루녹스 예비 양육자 육성 기관 소속)
- 제18세계의 주인
- 레드포드 저택 2호실 미뉴엘의 양육자
- 성격: 다정함, 신중함, 희생적, 사려 깊음, 온화함
- 별명: 순정남
- 현재 상태: 불쾌함, 흥미
- 호감도: 99/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