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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283)화 (283/300)

나도 체스휘의 낯선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그동안 자기 입으로 직접 나한테 과거 얘기를 해 주고, 또 악마의 화원에 일부러 나를 데려가서 잊어버린 시간의 잔재를 보여 주려고 하기까지 했으면서, 정작 체스휘는 진짜 이런 순간이 올 건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동요했다.

“그러니까… 먼저 그 ‘전부’의 범위가 어디에서 어디까지인지부터 확인해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체스휘는 금방 본래의 침착함을 되찾았다. 조금 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마른세수를 하듯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잠깐 생각을 정리하는가 싶던 체스휘가 입을 열었다. 손가락 사이로 날아와 나한테 꽂히는 눈빛이 강렬했다.

“이하린이 저택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린 도체스터 이전까지의 기억을 말하는 거 맞아요?”

“…….”

“그래, 그런 의미로 한 말이 맞나 보네.”

이번에도 그는 내가 대답하기 전에 내 얼굴을 보고 혼자 답을 내린 듯했다. 그러고 나서 체스휘는 또 뭔가를 혼자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잠시 후, 그가 나를 보며 혼잣말 같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상한데. 그동안 줄곧 기억해 주기를 바랐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까 조금….”

나를 관통할 듯이 응시하고 있는 체스휘의 눈은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 그보다 갑자기 그런 걸 왜 기억하는 거지? 혹시 이번 몸이 특수해서 그 영향을 받은 건가?”

문득 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게임 시스템에서 이런 보상이 나온 거지?’

물론 그 실체를 따지자면 진짜 게임 시스템이라고 할 수도 없긴 했다.

이번에 과거의 기억을 한꺼번에 되찾게 되면서 어느 정도 유추하는 게 가능해진 부분이 있었다.

애초에 나는 수상쩍은 게임사의 기술로 정체 모를 수상한 연동 장치를 이용해 이 18세계에 영혼 상태로 이동해 왔다. 그래서인가? 이후에 몇 번이나 새로운 육신을 찾아 죽음을 맞고도, 내 영혼은 여전히 이 시스템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것은 내 영혼이 지금도 45세계에 귀속되어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나를 버그로 취급해 번번이 죽이려 했던 시스템이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일부러 나한테 기억을 되돌려 주었다.

도대체 뭘 원하고 이런 일을 한 걸까? 나를 더 확실한 위험에 빠트리려는 목적인가? 아니면, 그저 반대로 나를 도와주기라도 하려고 내가 잃어버린 진실을 되찾게 해 준 건가?

어느 쪽이든, 시스템이 지금까지 안 하던 짓을 했다는 부분에서 이상한 건 마찬가지였다.

콰앙, 쾅!

문밖에서 들려오는 모로스들의 요란한 소음이 방 안에 내려앉은 정적을 깨트렸다. 나는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문을 쳐다보며 먼저 입술을 뗐다.

“일단 여기서 나가죠.”

“지금?”

“빨리 움직이는 게 나아요. 계속 이러고 있을 수도 없잖아.”

“나랑 같이 있기 싫어서 나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뜻밖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날카로운 말이 체스휘에게서 튀어나왔다. 나는 조금 놀라서 멈칫한 뒤, 쿵쿵 시끄러운 소리가 울리는 문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 체스휘를 보았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그동안 내가 이런 식으로 체스휘와 함께 있는 자리를 피한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지금의 그는 좀 지나치게 예민했다. 게다가 지금은 진짜 그와 함께 있는 상황을 회피할 생각으로 말을 꺼낸 것도 아니었다.

왠지 이건 체스휘와 미카엘, 그 누구답지도 않은 말이었다. 본인도 무심코 보인 반응이었던 듯이, 금방 입을 굳게 다물고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니, 맞아요. 나가긴 해야지. 계속 이러고 있을 순 없으니까.”

하지만 그는 내 시선을 일부러 외면하듯이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래서 아까 했던 얘기 말인데. 지금 한번 죽어도 저런 게 앞으로 계속 나올 거라고? 결국 그 육신이 완전히 죽기 전까지는 소용없다는 뜻인가.”

“맞아요.”

“그래. 린 씨가 내키지 않는 것 같으니 시험해 보는 건 건너뛰고, 일단 그런 거로 할게요.”

“저기, 그리고 나 지금 그런 의도로 말했던 거 아닌데요.”

“알겠어요. 이제 문 열 거니까 준비하고 있어요.”

내가 다른 말을 더 잇기도 전에 체스휘는 나를 지나쳐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진짜 바로 문을 열고 앞에 있는 모로스들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탕, 타앙!

키야아아악…!

지금 저 모로스들을 죽여도 어차피 저택에 있는 나머지 사람들이 다음 순서가 될 뿐이었으므로, 체스휘는 일부러 모로스의 다리를 맞춰 움직임에만 제한을 주었다.

나는 찜찜한 오해를 산 듯한 이 상황이 조금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우선은 체스휘가 모로스들을 상대하는 동안 방에서 뛰어나가 내 침실로 향했다.

낮에 분명 테이블 위에 있던 총을 챙겼었는데, 악마의 화원에 다녀온 후 뒷주머니에 있던 물건이 사라졌다. 이전에도 굳이 세라가 나한테 줬던 소지품들을 다시 가져가지 않고 돌려줬었던 걸 보면, 이번에도 총을 아예 없앤 건 아닐 듯했다. 그럼 그냥 체스휘가 어디론가 잠깐 치워 놓은 걸 테니까….

역시, 침실을 좀 뒤지자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는 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챙겨 들고 다시 서둘러 복도로 나왔다.

키아악!

다른 곳에서 발생한 모로스가 나를 쫓아왔는지, 체스휘가 있는 곳의 반대쪽 복도에서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방 근처에까지 왔는지 거리가 꽤 가까웠다. 나는 바로 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몸을 돌려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하지만 총은 불발했다. 잠깐 당황한 사이에 내 뒤에서 날아온 총알이 모로스의 이마에 적중했다. 눈살을 찌푸리는 나를 향해 체스휘가 무심히 알려 주었다.

“그거 총알 없는데.”

아니, 그런 건 진작 말해…!

어쩐지 강박적일 정도로 방에 있는 위험한 물건들을 죄다 치워 놓던 사람이 웬일로 이 총은 순순히 돌려줬나 했다.

“나도 총알 줘요!”

“거기에 맞는 크기는 없어요.”

“빼 놨던 거라도 있을 거 아니에요?”

“그건 진작 다 처분했지.”

손에 쥔 총을 복도 바닥에 내팽개쳐 버리려다가 참았다. 한순간 머리에 열이 확 오르려고 해서 천천히 심호흡했다.

그러는 동안 모로스가 또 한 마리 나타나서 체스휘가 처리했다.

“죽이지 않아도 조금씩 늘어나네. 이유가 뭘까?”

발등과 허벅지에 총을 맞고 느리게 바닥을 기어 오는 모로스를 보며 체스휘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이하린이 이질적인 존재라서 이러는 것 같다고 전부터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그래도 원래 여긴 모로스 같은 게 발을 들이지 못하던 곳인데, 이 정도로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하다니 확실히 좀 이상해.”

체스휘의 의문대로, 원래 이 시간이 멈춘 시간 선의 레드포드 저택은 나를 죽이려 하는 시스템으로부터 안전했었다. 시간이 멈춰 죽음으로부터 거리가 먼 사람들만 존재한다는 특성 때문인지, 이곳에서만큼은 모로스가 생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로스만이 아니라 악령도 들어오지 못하던 걸 보면, 어쩌면 시스템 자체가 이 공간에는 쉽게 침투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직접 지하실의 문에 손을 댔던 이번 린 도체스터로서의 생을 제외하고는, 이전에는 악령도 이곳에 감히 나타났던 적이 없었다.

나는 아마도 이곳이 체스휘의 장악력이 가장 강한 특수한 장소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짐작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제는 지금까지의 법칙이 깨졌다.

이대로라면 사라로사나 세라처럼, 내가 잘 아는 사람까지 이곳에서 모로스로 변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어쩐지 굉장히 싫은 느낌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의 몸을 빌려 여러 분열된 레드포드 저택에서 살았지만, 특히 이 시간이 멈춘 레드포드 저택은 내가 상당히 오랜 날들을 보냈던 장소였다.

지금처럼 체스휘가 나를 여기에 데려와 가둔 적도 있었고, 내가 자의로 그와 함께 왔던 적도 있었다. 체스휘의 말처럼 연인 이상의 관계로, 앞으로 죽을 때까지 함께 있자고 미래를 약속하고 여기에 와서 지냈던 기억도 났다.

물론 그 약속은 항상 반만 지켜졌다. 생을 마칠 때까지 체스휘와 함께였던 건 맞지만, 매번 내가 형체 없는 그리움을 좇아 그를 두고 먼저 죽어서 새로운 기회를 얻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내 과거의 행복, 슬픔, 기쁨, 괴로움… 그 온갖 감정들과 함께했던 기억들이 남겨져 있었다.

비록 그 끝을 좋게 맞이한 적은 없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이곳은 내가 지쳤을 때 잠깐이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던 쉼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곳이 이런 식으로 망가지는 건 바라지 않았다.

나는 꾸역꾸역 나를 향해 기어 오는 모로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체스휘에게 말했다.

“그냥 아까 말했던 방법을 써 보죠.”

“아까 말했던 방법?”

“그냥 지금 내가 한번 죽을 테니까, 체스휘 씨가 지금 나온 모로스들을 완전히 정리한 뒤에 나를 데리고 분열된 다른 저택으로 가요.”

생각해 보면 시스템을 완전히 속이는 건 어렵겠지만, 적어도 체스휘가 이 린 도체스터의 몸을 다시 살려 내기 전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생길 터였다.

“그다음에 내 몸을 다시 복구하고.”

“다른 곳으로 가도 어차피 상황은 마찬가지일 텐데? 린 씨가 아까 그렇게 말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일단 여기만 아니면 되니까.”

체스휘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이 미간을 좁혔다. 나는 그에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또 굳이 자세히 말하기 겸연쩍기도 했다. 그래서 그냥 얼버무리듯이 덧붙였다.

“아니, 그냥 여기는… 좀 더 평온한 분위기인 게 어울리잖아.”

“…….”

“일단 내가 떠나면 최소한 이 저택에는 저런 게 더 안 생길 테니까요. 그리고 생각해 보니까 체스휘 씨 말처럼 한 번쯤 시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

체스휘가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나는 그의 시선을 약간 어색하게 마주하며 괜찮다고 말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러니까 쏴요.”

앞서 말했듯이 체스휘가 위험한 물건을 죄다 치워서 지금 이 복도에는 장식용 무기 하나 없었다. 그렇다고 계단을 구르거나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는 것도 불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러니 체스휘가 들고 있는 총으로 그냥 총알을 한 방 맞고 죽는 게 깔끔했다.

그런데 체스휘는 내 말을 듣고도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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