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282)화 (282/300)

13. 현실

…타앙!

어디선가 익숙한 총성이 들렸다. 그 소리가 전환점이라도 된 듯이, 아득하던 의식이 퍼뜩 현실로 불러들여졌다.

갑자기 긴 시간의 흔적이 머릿속에 한꺼번에 욱여넣어진 탓일까? 정신이 돌아온 다음에도 몸의 감각을 되찾는 속도는 한없이 느리기만 했다.

※레드포드 저택에서의 전체 플레이 기록 열람 완료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게 쪼개져 흩어져 있던 기억들이 모여, 마침내 본래의 뚜렷한 모양을 되찾았다. 과부하가 온 뇌가 터져 나갈 것처럼 뜨겁게 달궈지다가, 이내 서서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가장 처음 시야에 들어온 것은 달빛이 스민 어두운 저택 내부의 풍경이었다. 퀘스트 보상을 받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화랑은 아니었고, 저택의 빈방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분명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있지 않는데도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덩달아 시야에 비치는 광경도 조금씩 달라졌다.

누군가의 심장박동이 맞닿은 몸에서 몸으로 전해졌다. 귓가에는 희미한 숨소리가 번졌다. 그런 것들도 계속 나를 따라오는 걸 보면, 아무래도 나는 지금 누군가와 함께 이동하는 중인 것 같았다. 그럼 지금 내가 얼굴을 기대고 있는 건 아마 그 사람의 어깨일 터였다.

“일어났네.”

내가 깨어난 걸 알았는지, 체스휘가 내뱉은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흘러 들어왔다. 나는 막 들이마시던 숨을 멈췄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지금 막 안으로 들어왔는데, 마침 딱 좋을 때네요.”

쾅쾅!

멀지 않은 곳에서 꼭 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것 같은 큰 소리가 울렸다. 그 사이사이를 체스휘의 차분한 목소리가 메웠다.

“조금 전에는 갑자기 쓰러져서 놀랐어요. 어쩐지 아까부터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더니…. 그러게 화랑은 그냥 내일 가 보고, 내가 일찍 재우려고 했을 때 바로 잤으면 좋았잖아.”

유감스러운 감정을 담은 음성이 귓가에 속삭여졌다.

나는 체스휘의 어깨에 머리를 올리고, 아예 그에게 몸 전체를 맡긴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도 체스휘는 나를 안고 방의 구석으로 걸어가 찬장 같은 곳을 뒤적거렸다. 그 탓에 남은 한 손으로만 나를 받쳐 들어야 해서 몸이 더 바짝 맞닿았다. 등 뒤에서 작게 들리는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또다시 문밖에서 난 굉음에 묻혀 어둠 속으로 바스러졌다. 나는 눈만 부릅뜬 상태로 체스휘의 어깨 너머에 망연한 시선을 두었다.

감정이 격렬하게 소용돌이쳐서 심장이 폭발할 것 같았다. 차마 함부로 입을 열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동안 새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 한순간에 전부 제자리로 돌아온 여파가 컸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한 시간도, 지금까지 내가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던 것도, 그리고 내가 과거에 무슨 짓을 했고, 또 이 남자가 누구인지….

이제는 모든 것이 지나치게 명확해서, 고개를 들어 체스휘와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린 씨? 일어난 거 아니에요?”

그래서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자, 그는 그런 내가 이상하게 여겨진 모양이다.

“왜 계속 아무 반응도 없지…. 혹시 움직이기 힘들어요?”

이내 찬장에서 원하는 것을 찾아낸 듯한 체스휘가 다시 두 손으로 나를 붙들었다. 다음 순간, 맞붙어 있던 몸이 떼어지면서 찬장 옆에 있던 테이블에 엉덩이가 닿았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테이블 위에 걸터앉게 되어, 체스휘와 얼굴을 마주하는 자세가 되었다. 내가 바짝 굳어서 고개를 숙이고 있자, 체스휘가 눈높이를 맞추려는 듯이 테이블을 손으로 짚고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가까이에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도 무심코 시선을 들어 그와 눈을 마주하고 말았다. 방은 어두웠지만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은 지나칠 정도로 시야에 훤히 들어왔다.

눈이 마주친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동요가 나를 휩쓸었다. 마음속에 커다란 파동이 퍼져 나가서 마주한 사람에게도 그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체스휘가 나를 보고 눈매를 살짝 찌푸렸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네. 그래도 꼭 해야 할 말이 있는데.”

그는 잠깐 고민하는 듯했지만, 곧 표정을 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에, 나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풀던 내 안의 감정이 파사삭 잘게 쪼개지는 것을 느꼈다.

“린 씨, 지금 한번 죽는 게 어때요?”

“…뭐라고?”

갑자기 격하게 일렁이던 가슴이 찬물을 뿌린 듯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이 미친 남자가 지금… 나한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기억을 되찾고 나서 앞에 있는 남자를 보니, 한순간 과거의 잔상들이 겹쳐지면서 예전에 내가 그에게 품었던 온갖 감정들도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굉장히 먹먹한 마음이 들었는데, 지금 들은 한마디가 거기에 초를 쳤다. 그런데 체스휘는 혼자만 태연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점점 표정 관리를 하기가 어려워졌다.

아, 그래…. 잠깐 감정이 앞서서 깜빡 잊었지만, 이 남자는 지금 누가 뭐래도 좀 맛이 간 상태였다.

“상황이 좀 이상하게 돌아가서요.”

쾅, 콰앙!

키아악…!

그때, 시끄러운 소리가 문을 뚫고 들어왔다. 아까부터 복도에서 나던 소음이 한결 거세졌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 들어 보니 저건 모로스의 소리였다. 아무래도 우리가 여기에 있는 걸 알고 문에 몸을 부딪치며 저 난리를 피우는 듯했다. 왠지 좀비 아포칼립스물을 연상시키는 상황이었다.

“린 씨가 쓰러진 직후에 한 놈이 나타나서 없앴더니, 금방 또 다음 놈이 생기더라고요.”

체스휘가 나한테 설명하면서 아까 내 옆에 올려 둔 총을 다시 집어 들어 그 안에 총알을 장전했다. 아무래도 방금 찬장에서 찾아 꺼낸 게 총알인 모양이었다.

“모로스를 몇 죽이는 건 일도 아니지만, 저걸 전부 처리하고 나면 더 귀찮은 게 나올 것 같아서.”

체스휘는 거기까지만 얘기하고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모로스가 한두 마리 정도 소소하게 발생할 것이다. 그다음에는 점점 더 많은 숫자의 모로스가 나타나 공격해 올 테고, 그렇게 점점 수를 불려 가다가 나중에 모로스가 될 사람이 전부 사라지면 그때는 악령이 등장할 테지.

“원래 이 멈춘 시간 선에서까지 저런 놈들이 나온 적은 없었는데 이해가 안 되네요.”

시스템은 내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때조차, 나보다 더 빨리 내 존재를 알아차려 나를 없애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군다나 시스템이 버그로 인식했던 ‘이하린’의 기억이 온전히 돌아왔으니, 내가 죽기 전까지 쉽게 물러나려 할 리가 없었다.

“어쨌든, 지금까지 그런 것처럼 일단 린 씨가 한번 죽고 나면 멈추지 않을까 싶은데. 눈속임이긴 하지만, 어차피 지금 몸은 이번에 죽어도 완전히 끝나는 게 아니니까 한번 시도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이 남자는 지금까지 내가 수없이 죽는 모습을 보고, 그 자신도 어쩌면 나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죽음을 입에 담는 그의 모습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태연하고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안 멈춰요.”

그리고 이런 일에 무뎌진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죽어도 안 멈출 거야.”

나를 죽이려 하는 시스템은 그런 눈속임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린 도체스터의 육신이 완전히 죽기 전까지는 물러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체스휘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는 나를 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이상하네. 제법 확신하는 말투인데, 그런 걸 어떻게 알지?”

곧 그의 입술에 가느다란 미소가 그려졌다.

“혹시 예전 일이 뭔가 구체적으로 기억나기라도 했나?”

“…….”

“그러고 보니 방금 눈을 떴을 때 날 보는 얼굴이 평소와 조금 달랐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체스휘는 애초에 나한테 대답을 바라지는 않았던 듯, 이내 혼자서 결론을 도출했다.

“음, 하지만 역시 그럴 리가 없지. 악마의 화원에서 뭔가 본 게 있나 보네요. 단편적인 정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 혹시 생각나는 게 있으면 말해 봐요.”

그는 나한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손을 움직여, 잠깐 멈췄던 총알 장전을 마저 마무리 지었다.

그런 체스휘의 앞에서 나는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칠 줄 모르는 문밖의 소음에 체스휘가 비스듬히 몸을 돌렸다. 나는 반쯤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나, 사실 다 기억났어.”

“뭐가요?”

“전부 기억났다고요.”

“그러니까 뭐가….”

무심히 반문하던 체스휘가 불현듯 움직임을 멈췄다. 다음 순간, 다시금 내 얼굴에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다. 문밖은 이다지도 시끄러운데, 방 안에는 공허한 침묵이 차올랐다.

“미안해.”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결국 한마디를 더 내뱉었다.

납득하지 못할 짓을 하던 이 남자가 이제야 완전히 이해되기 시작했다. 사실 오래전의 과거에 처음 만났을 때는 이 남자도 이렇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는 매번 다른 모습을 한 나와 만나고, 또 그만큼 내가 죽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점점 각박하게 변해 갔다.

왠지 지금 그의 얼굴을 보기가 좀 그래서 계속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런데 앞에서는 계속 아무 반응도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까지 체스휘가 조용한 게 이상해서 결국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까와 같은 모습으로 조금의 미동도 없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마주했다. 꼭 그가 서 있는 자리만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 같았다.

“…전부 기억났다고?”

시선이 마주친 순간, 방금 내가 한 말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처럼 체스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문득 숨을 얕게 들이마시며 한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왠지 거의 무의식중에 취한 행동인 것 같았는데, 마치 믿을 수 없는 것을 보기라도 한 듯이 굳어진 그의 눈은 놀랍게도 옅은 당혹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 잠깐만. 내가 이런 게 처음이라서.”

동요하는 표정을 조금이라도 감추려는 듯이 그는 손을 들어 입매를 가리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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