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모른다고 했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어. 네가 기다리던 녀석은 아마 무덤에 버려졌을 거야. 우리를 만든 연구소에서 사용하는 은어인데, 쓰레기장처럼 온갖 쓸모없는 것들을 버리는 곳을 그렇게 말해. 애초에 우린 하나의 목표를 위해 태어나 이 18세계에 오게 된 건데, 부적응자로 판명되었으니 진작 처분되었겠지. 이제는 내가 그렇게 될 테고.”
소년은 이 레드포드 저택이 기묘한 문을 통해 수없이 연결된 여러 세계 중, 하나의 고립된 공간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 저택의 주인은 사실상 없으며, 이곳에 오는 아이들도 단순한 자선 활동으로 입양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소년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점차 그 수와 크기를 더해 가는 빈 세계들에 산 제물로 보내져 세상을 구할 중책을 짊어진 선택받은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레드포드 저택이 있는 18세계는 아이들이 빈 세계의 독기를 견딜 수 있는지 시험하는 동시에, 적응 훈련 과정을 거치는 장소라고 덧붙였다.
“어째서인지 모르겠는데, 왠지 넌 여기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느낌이 조금 다른 것 같아. 괜히 심술이 나서 못된 말을 하기도 했지만, 너처럼 이렇게 한결같이 걱정해 주고 좋아해 주는 사람이 나한테 있다면 분명 저택을 나가서도 잊을 수 없을 거야. 그러니 가능성은 적지만, 만약 네가 찾는 녀석이 아직 살아 있다면 반드시 널 다시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겠지.”
처음 저택에 왔을 때보다 어딘가 허무한 분위기를 품게 된 소년이 단출한 짐가방을 한 손에 들고 방을 나서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러니까 네가 그 녀석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고 싶은 말은 단지 그것뿐이야.”
이하린은 창문 앞에서 소년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차를 타고 저택의 정문을 벗어나는 소년에게서 이하린이 먼저 떠나보낸 다른 소년의 모습이 겹쳐졌다.
창문에 대고 있던 손을 서서히 그러쥐자, 유리창 위에서 손톱이 긁히며 까드득 듣기 싫은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시스템 오류로 게임에 갇힌 지 벌써 2년. 그동안 이하린은 저택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서서히, 왠지 이것이 단순한 게임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저택에서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는 동안 무언가를 생각할 시간은 넘치도록 많았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오늘 소년이 남긴 말까지 듣게 되자, 예전에 게임 게시판에서 봤던 글이 다시금 떠오르면서 머릿속에 확신이 생겼다.
원래 게임 플레이 중 유저들이 부상을 당했을 때 흘리는 피는 붉은색으로 보였다. 하지만 시스템 오류로 다른 기능들이 모조리 사라진 지난 2년 동안, 이하린의 캐릭터인 루비 아이네가 다쳤을 때 흘린 피는 검은색이었다. 이는 플레이어들의 게임 캐릭터 역시, 죽은 육신에 새로운 영혼을 받아들인 괴물 모로스와 비슷한 존재임을 뜻하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정말 이것이 가상 현실에 기반한 게임이 아니라면….
2년 동안 갇혀 있던 이 레드포드 저택에서 벗어날 방법이 분명 있을 것이다. 또한, 이미 게임 속의 정보가 완전히 삭제된 것이 아닌가 우려했던 이하린의 소년 역시 저택 밖의 어딘가에 존재하리라.
그것은 이하린에게 있어서 다분히 희망적인 일이었다.
이하린은 정문으로 사라진 마차를 끝까지 지켜보다가, 해 지는 저택의 풍경에서 눈을 떼고 돌아섰다.
그리고 막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을 때, 누군가가 그녀를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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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아악!
“헉, 허억….”
이하린은 모로스를 피해 도망쳤다. 이미 그녀의 몸은 군데군데 다쳐 상처투성이였다.
저택은 온통 그녀를 쫓는 모로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소름 끼치는 생각이었지만, 지금 이 저택에 살아 있는 사람은 그녀 혼자뿐인 것 같았다.
어째서인지 두 번째 소년이 떠난 직후, 고용인들의 태도가 급변했다. 그들은 이하린을 죽이는 것만이 목적인 것처럼 그녀에게 살의를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그녀를 도울 사람은 저택 어디에도 없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공격을 피해 모로스에게서 도망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그녀를 해치려 하는 모로스의 숫자는 너무 많았고, 이하린은 혼자였다.
처음 게임이란 명목으로 이 레드포드 저택에 발을 들인 이후, 모로스가 이 정도로 활개를 치고 설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것들이 갑자기 그녀를 노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이하린은 모로스에게 포위되었다. 그녀는 어쩌면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일 것이라고 직감했다.
지금 여기서 이대로 목숨을 잃으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답은 곧 알 수 있을 터였다.
마침내 모로스에게 치명상을 입은 이하린이 쓰러졌다.
마지막 숨을 내뱉은 그녀의 몸이 이내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바닥에 검게 고인 피 웅덩이에서 붉은색이 아닌 검은 시체꽃이 피어났다.
그렇게 이하린은 레드포드 저택에서 첫 번째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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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또 별관에서 유령을 봤다는 얘기 들었어?”
“들었어. 어우, 완전 소름 끼쳐.”
“왜, 반년 전에 저택의 고용인들이 모로스에게 전부 몰살당해서 물갈이된 사건 있지? 그때 죽은 고용인의 원혼이 남은 게 아니냐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더라. 지금 유령이 나오는 이 별관이 그때는 본관이었잖아.”
“지금 그런 말 하지 마! 최소한 이거 다 두고 여기서 나간 다음에 얘기해.”
고용인들이 속닥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별관의 복도를 지나갔다.
지금 그들이 있는 별관은 원래 본관으로 사용되던 건물이었다. 그러나 반년 전부터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아예 걸음조차 하지 않는 폐관이 되어 있었다.
모로스들에게 고용인 전부가 살해당한 끔찍한 사건 이후, 레드포드 저택의 방침은 많이 바뀌었다.
일단 한번 저택에 들어온 고용인들은 특별한 일이 있지 않고서야 외출이 불가능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주말마다 정기적으로 외출할 수 있는 날이 생겼다. 당연히 매번 고용인들이 출입할 때마다 그들의 눈과 귀를 막아, 저택이 완전히 고립된 하나의 세계라는 비밀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따라서 고용인들에게 저택에 대한 특이한 사항도 어느 정도는 미리 알려 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레드포드 저택에 들어오는 선택받은 아이가 머물 방도 사건이 일어난 곳에서 떨어진 옆 건물로 옮겨졌다.
그리고 또, 꼭 그 사건 때문이라고는 볼 수 없는 다른 변화들도 연달아 생겨났다.
먼저 저택에 들어오는 아이가 원래는 한 번에 한 명이었던 반면, 이제는 다섯 명 정도로 늘어났다. 그동안 선택받은 아이들을 생산해 내는 배양실의 기술이 발전해 이제는 많은 수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공급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경쟁을 통해 아이들의 성장과 발전을 촉진한다는 목적이 더해지기도 했다. 일단은 시범적으로 아이들의 수를 늘렸지만, 상황을 봐서 점차 인원을 줄이든가 더 늘리는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했다.
다만, 아이들의 수가 늘어난 만큼 그들의 관리는 당연히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아이들의 옆에는 그들을 각각 전담하는 ‘양육자’라는 직종의 고용인이 생겨났다. 그들은 아이들을 모로스로부터 보호하고 일 대 일로 생활 전반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다.
이 밖에도 앞으로 저택에 새로 도입될 예정인 방침이 몇 가지 더 있다고 들었는데, 아직 자세한 내용까지는 다른 고용인들에게 공유되고 있지 않았다.
“우리 도련님 어디 있어요?”
“으악…!”
별관 복도를 걷던 고용인들은 갑자기 귓가에 속삭여지는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모조리 떨어뜨렸다.
“응? 우리 애 어디 있어요?”
“유, 유령이다!”
어디선가 나타난 피투성이의 메이드복을 입은 여인이 다시 한번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소문이 무성한 별관의 유령이었다.
고용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유령이 된 이하린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왜 아무도 대답을 안 해 줘? 그리고… 나는 누구지?”
죽은 이하린은 자아를 잃고, 레드포드 저택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도, 또 다른 육신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방랑하는 영혼이 되었다.
다른 사람의 육신을 차지하면 최소한 모로스로서 보통의 사람처럼 살 수 있을 것이나, 이곳에는 상성이 맞는 육신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의 이하린은 잊어버린 삶에 대한 미련이 깊어서, 이 레드포드 저택을 떠날 수 없는 상태였다.
이후로도 한동안 그녀는 저택의 별관을 떠돌았다.
한번은 호기심에 별관에 왔다가 이하린과 마주친 아이가 깜짝 놀라 달아났다. 이하린은 망각한 기억이라도 되짚듯이 그 모습을 한참이나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 이후, 그녀의 피투성이 메이드복은 흉측한 핏자국이 보이지 않는 새까만 색으로 변했다.
우웅.
무언가가 그녀를 부른 것은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방랑하는 영혼이 된 이하린은 형체와 소리가 없는 부름에 이끌려 별관을 나섰다. 그녀가 향한 곳은 새로운 본관이 된 건물의 지하실이었다.
그곳에는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모를 검은 문이 있었다.
이하린은 본능적으로 이것만이 그녀를 이 답답한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눈앞에 있는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곧 찬란한 보라색 빛이 이하린의 영혼을 탐욕스럽게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