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어디서 얘기가 새는 거지? 가뜩이나 여론 때문에 골치가 아픈데, 여기저기서 달라붙는 것들 때문에 아주 성가셔.”
“지난번에 기밀을 유출한 임원은 바로 축출해 내 조치를 취했습니다만, 이미 냄새를 맡은 언론사에서 관련한 얘기를 계속 퍼트리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두 번째 문 근처에서 계속 사고가 발생하고 있어서… 이대로라면 더는 진실을 감추기 어려워질 듯합니다.”
“쯧, 이번 문은 하필 저런 곳에 생겨서 말썽이군. 지난번처럼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나타나면 관리하기도 쉬울 텐데. 그보다 프로젝트 E는?”
“안정적입니다. 지난 5년의 데이터를 합산했을 때, 가장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이라는 데 임원들 모두가 의견을 모았습니다. 다만 프로젝트 E를 시작하면서 18세계의 분열이 가속화되고 있어, 결과 값을 송출하는 시간이 점차 늘고 있습니다. 그 부분만 제외하고는 순조롭습니다.”
“분열은 어느 정도까지 가속화될 것 같던가?”
“가변성이 높아 현재로서는 정도를 측정할 수 없습니다.”
“분열된 세계가 밖으로까지 확산되어 다른 세계를 침범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18세계의 분열은 내부에서만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안팎의 반응은 일전에 보고한 그대로인가?”
“18세계는 유일하게 관리자가 없는 독립 구역이라, 다른 세계에서도 비밀리에 인력을 투입시켜 독자적인 실험과 연구를 이어 가고 있습니다. 하위 세계는 상위 세계에 거스르지 못하는 게 암묵적인 상황이기도 하고요. 게다가 프로젝트 E를 진행하면서 18세계의 시공간이 분열되기 시작했지만, 반대로 저희 프로젝트를 통해 공허에 완전히 잠식된 빈 세계를 안정화시키는 데 처음으로 성공했으니 불만이 있더라도 쉽게 나서지 못할 겁니다. 오히려 내부에서는 9개국이, 외부에서는 3개의 차원이 프로젝트 E에 동참하고 싶다는 의사를 추가로 밝혔습니다. 어떻게, 접촉해 볼까요?”
“아니. 지금은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 지금 자네를 부른 것도 윗선에서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이네.”
“아, 그렇군요…. 확실히 최근 국내외의 여론이 심상치 않기는 하니까요.”
“각 단체의 시위도 점점 거세지고 있고, 언론에 무차별적으로 보도되는 내용을 다른 기사로 돌려막는 것도 슬슬 한계야. 그러니 하는 수 없지. 한동안은 번거로운 일이 생기지 않게 잠깐 철수하는 수밖에.”
“예, 그럼 각 서버마다 시스템 점검 공지를 올리고, 비동의 실험 참가자들의 접속을 오늘부로 일괄 종료시키겠습니다. 관련한 내용은 다시 보고서로 작성해 올리겠습니다.”
“그래, 수고하게.”
***
소년의 검은 머리카락이 늦은 오후의 노란 햇빛에 밝은 윤기를 머금었다.
마침내 레드포드 저택에서의 퇴출이 결정되어, 소년은 바로 내일 이곳을 떠날 예정이었다. 그래서 지금 그는 얼마 되지 않는 개인 소지품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소년은 손을 멈추고 창밖을 응시했다. 방에서 보는 이 시간의 풍경도 지금이 마지막이었다. 딱히 큰 감정의 동요가 생기는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묘한 기분이 들기는 했다.
이 저택에 선발되어 오는 아이들은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태어난 존재였다. 그중에서도 극소수의 아이만 이곳에서 무사히 성장하여 빈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끝내 부적격자로 판명된 나머지 아이들은 어른이 되기 전에 저택을 떠나야 했는데,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소년을 이곳으로 보낸 기관에서는 레드포드 저택 밖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게 지원해 준다고 했다. 하지만 소년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스스로 저택을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는, 이곳에 남아 있는다고 해서 그가 바라는 미래가 찾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사히 어른이 되어 최종 적합자가 되어 봤자, 남은 것은 시간이 멈춘 빈 세계의 공허 속에 들어가, 죽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살아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되어 무한한 시간을 방랑하는 것뿐이었다. 아이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그것이 대단한 공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세뇌당해 진심으로 최종 선발자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소년은 돌연변이라도 되는지, 그들이 꿈꾸는 것과 다른 미래를 소망했다.
그는 눈앞에 유일하게 남겨진 길이 아니라, 다른 방향의 길을 걸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작은 가능성에 사활을 걸고,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를 일을 한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런 결심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얼마 전에 갑자기 저택에 나타난 낯선 소년과 어떤 남자 때문이다.
“…….”
타오르는 석양을 닮은 소년의 눈동자에 싸늘한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다음 순간, 그의 시선이 닫힌 문 쪽으로 미끄러졌다.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그를 향해 티 없이 맑게 웃으며 즐거운 목소리로 재잘거릴 것 같았다. 하지만 한 차례 눈을 길게 감았다 뜬 뒤 시야에 비치는 것은 삭막한 방 안의 풍경뿐이었다.
이 저택에 남은 소년의 유일한 미련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와 그 온기와 미소를 다시 되찾을 것이다.
그런 다짐에 마지막 도장을 찍듯이, 소년이 정리하던 상자의 뚜껑이 탁 소리가 나게 닫혔다.
***
소년이 레드포드 저택을 떠나는 날은 금방 다가왔다.
하필이면 바니타스 게임사에서 긴급 공지로 올라온 시스템 점검 날과 일정이 겹쳐서 이하린은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하지만 소년의 마지막 날을 어떻게 시스템 점검 따위로 그냥 넘길 수 있겠는가? 어차피 예정 시간이 되면 알아서 접속이 종료될 테니, 그때까지는 로그아웃하지 않고 버틸 작정이었다.
이하린은 전문가가 아니라 잘은 몰랐지만, 가상 현실 게임의 연동 장치는 사람의 몸에 연결되어 뇌의 수신호를 직접 건드리는 방식이라 강제 종료 시 구역질이나 현기증 등의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하린에게 있어서는 당연히 그런 부작용에 대한 우려보다는, 소년과의 마지막 작별 인사가 훨씬 더 중요했다.
당일에 이하린은 문 앞까지 소년을 배웅 나와, 건강히 잘 지내라고 인사했다. 그러고 나서, 외부에서 마중을 나온 사람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처음으로 저택의 정문을 나서는 소년을 지켜보았다.
이제 소년이 탄 마차가 정문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면 게임은 끝날 것이다. 이 안에서 이하린과 소년이 지금까지 함께 보낸 시간 역시 데이터상의 기록으로만 남겨져, 더는 내일로 이어지지 못하겠지.
어쩌면 엔딩 창이 뜨기 전에 시스템 점검으로 인한 강제 로그아웃이 먼저 발생할지도 몰랐지만,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해서인지, 마지막으로 보는 저택에서의 해지는 풍경이 유독 적막하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소년을 떠나보낸 저택의 정문이 완전히 닫히고 난 뒤에도, 게임 종료를 알리는 시스템 창이 떠오르지 않았다. 게임사에서 시스템 점검을 공지한 시간도 몇 분 전에 이미 지나갔다.
처음에는 그저 시스템이 데이터를 처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나 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뒤에서 다른 고용인들이 왜 안으로 들어오지 않냐고 그녀를 부를 때까지도, 또 해가 완전히 지고 밤이 찾아올 때까지도 게임은 종료되지 않았다. 심지어 이하린은 혼자 의문으로 가득 찬 밤을 보낸 뒤, 저택에서 다음 날의 아침 해가 떠오르는 광경까지 보고 말았다.
오류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지, 게임의 로그아웃 창도 먹통이었다.
뭐지?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시스템 오류라면 게임상의 다른 기능도 멈춰야 할 것 같은데, 왜 계속 평범하게 시간이 지나고 있지?
그래도 플레이어의 생체 반응을 고려해, 연동기기와의 접속이 마흔여덟 시간을 넘으면 자동 종료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어서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여운에 잠긴 마음으로 그냥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하지만 이하린의 기묘한 날들은 이후에도 며칠이나 계속됐다. 그녀는 육성 대상인 소년 없이 저택에 혼자 남겨진 이 이상한 상황에 깊은 의혹을 느꼈다.
그래도 워낙에 소년과의 작별로 인한 상실감이 컸던 탓일까? 마음 한편으로는 은근한 기대감이 불쑥 고개를 들기도 했다.
만약 이대로 게임이 종료되지 않고 한동안 게임 속 세계의 시간이 흐른다면, 혹시 저택 밖으로 떠난 소년의 소식을 조금이나마 들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시스템 설정상, 저택을 떠난 소년의 미래 자체가 아예 게임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는 법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니 이하린이 레드포드 저택에서 맺은 고용 계약도 얼마 후에 완전히 만료될 예정이었다. 문득 궁금증이 한 가지 더 생겼다. 만약 이대로 게임 속에서의 시간이 계속 흘러, 이하린이 저택을 떠나야 할 때가 되면 어떻게 될까? 플레이어가 저택에 더 머물 수 없게 되고 나서도 게임의 스토리는 계속 이어질까?
어차피 시스템 창이 먹통이라 스스로 상황을 해결할 방법도 없었기에, 이하린은 일단 소년의 소식을 더 알아보기로 했다.
다른 고용인들은 저택을 떠난 소년에게 아직 관심을 두는 이하린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 소년에 대한 소식을 알아보려고 애쓰는 그녀의 모습을 더더욱 이해하지 못했다.
“자, 다들 주목!”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오늘부터 레드포드 저택에서 생활하실 ●● 도련님이시다. 모두 성심껏 모시도록.”
이하린의 육성 대상이 떠난 레드포드 저택에 다른 소년이 나타났다.
“안녕, 앞으로 잘 부탁해.”
이하린은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고 낯선 소년을 쳐다보았다.
나이는 게임을 막 시작할 때쯤의 육성 대상들이 모두 그렇듯이 열두세 살 정도로 보였다. 무표정한 앳된 얼굴이 이하린의 소년을 언뜻 떠올리게 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들은 외모와 이름 모두가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메이드장이 새로 온 소년을 방으로 안내하고 다른 고용인들이 흩어진 뒤에도 이하린은 자리에 굳은 듯이 그대로 서 있었다.
이런 상황은 지금까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이하린은 분명 계정 생성을 새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새로운 소년이 저택에 온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 오류가 생길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