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277)화 (277/300)

오히려 마음속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지금 소년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이하린은 그런 소년에게 유일하게 의미 있는 존재로 인정받은 셈이었다. 소년의 입으로 이런 말을 직접 들은 건 처음이라 그런지 감동적인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모두가 배드 엔딩이라고 기피하는 광탈 엔딩인데, 왜 이하린은 이런 결말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지.

어쩌면 그녀의 소년이 특별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모든 플레이어들이 불만스러워하는 이런 나쁜 결말조차, 소년의 특별함으로 웃으며 헤어질 수 있는 엔딩으로 만들어 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지금까지도 늘 그랬다. 평범한 걸 해도 소년과 함께라면 늘 특별한 하루가 되었다. 또 그 특별한 하루하루가 쌓여 오늘처럼 가슴 벅찬 날도 찾아오게 된 것일 터였다.

물론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게 소년이 결정한 일이라면 존중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소년은 지금 이렇게 망설임이나 후회 한 점 없는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으니까…. 이하린은 진심을 다해 그를 응원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이런 얘기를 꺼낸 이유는, 내가 떠나면 넌 어떻게 할 건지 묻고 싶어서야.”

“저요? 그야 당연히….”

잇따른 소년의 차분한 물음에 이하린은 말끝을 흐렸다.

소년이 떠나고 나면, 게임이 종료되고 새로운 계정을 생성해서 새 아이와 만날지, 아니면 이대로 지나간 인연을 추억하며 게임을 접을지 선택해야 하겠지.

물론 이런 말을 눈앞에 있는 소년에게 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이런 엔딩을 맞은 플레이어들의 선택은 반반이었다. 그리고 아직 그날이 오지는 않았지만, 분명 이하린의 선택은 후자일 것이다.

곧 다가올 이별의 날을 떠올리자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입 안이 씁쓸해졌다. 소년은 표정을 흐리는 이하린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도 나처럼 밖으로 나가는 게 어때?”

“저도 저택 밖으로요?”

이하린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소년의 권유는 지금까지 이하린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내용이었다. 왜냐하면 이 게임의 배경 자체가 레드포드 저택으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너도 저택이 너무 위험하다고 그랬었잖아.”

“그랬었죠…?”

“내가 더 어릴 때야 네 도움을 조금 받았다지만, 요즘은 오히려 내가 널 보호해 주는 일이 많은 것 같은데.”

“그것도 그렇긴 하죠…?”

“그런데 내가 없으면 너야말로 이제 혼자 어떻게 하려고 그러지?”

소년의 말에는 틀린 게 없었다.

게임을 시작하고 1, 2년 정도는 확실히 이하린이 괴물들로부터 죽을힘을 다해 소년을 지켜 줬었다. 그때마다 소년은 나서지 말라며 화를 냈지만, 어떻게 이하린이 위험 앞에서 그를 못 본 척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것도 소년이 성장기를 맞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마냥 조그맣고 어리던 소년은 그동안 쑥쑥 자라, 지금은 이하린보다 키도 크고 체격도 제법 듬직해졌다. 그래서 작년쯤부터는 괴물이 나타나도 오히려 소년이 이하린을 구해 주는 판국이었고, 괴물이 아니라 고용인들과의 문제가 생겼을 때도 소년이 나서서 해결해 주곤 했다.

물론 그래 봤자 이하린의 눈에는 아직도 소년이 마냥 처음의 그 어린아이로만 보여서, 이런 변화가 기특한 한편으로 아직도 영 적응이 안 되는 느낌이긴 했다.

소년의 고요한 주홍빛 눈동자가 속을 들여다보듯이 정면에서 조용히 이하린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차가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눈이었지만, 그 안에 자신을 향한 걱정과 다정함이 있는 것을 이하린은 알았다.

지금 이렇게 소년과 그가 떠나고 난 이후의 일을 이야기하니, 갑자기 복잡한 심경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방금 막 관련한 이야기를 들어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현실이 눈앞에 뚝 떨어진 느낌이었다.

게다가 소년뿐 아니라 그녀도 저택을 떠난다고?

그동안 이하린은 저택 밖으로 나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의 후기를 확인해도, 저택 밖으로 나간 경험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그런 것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다는 종류의 게시글도 한 번도 본 기억이 나지 않았으니 희한한 일이었다.

가상 현실 게임에서는 온갖 일이 가능했고, 그런 자유로움 속에서 온갖 기상천외한 일들을 벌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게임 게시판은 여러 가지 잡설이 올라오는 곳이니만큼, 게임의 배경인 레드포드 저택 밖으로 나가는 게 가능한지 궁금해하는 사람이라도 있을 법했다.

하지만 그런 내용이 검색으로도 걸린 적이 없다는 건 어딘가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왜 그동안 저택 밖으로 나가 볼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지?’

이하린은 무심코 시선을 저택의 정문이 있을 창밖으로 움직였다. 게임을 하는 지난 몇 년 동안이나 늘 같은 자리에 문이 있었는데, 매번 스치듯이 지나갔던 기억만 났다.

꼭 레드포드 저택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머리에 입력이라도 된 것처럼….

지금도 소년의 말을 듣고 이런 의문을 머릿속에 떠올린 순간, 기이한 거부감이 목 끝에 걸리는 듯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이런 생각 자체를 더 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전 여길 못 떠나요.”

그 말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새 거의 무의식중에 흘러나왔다.

“왜? 고용인 계약 기간이 아직 안 끝나서?”

소년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저택의 고용인들은 매년 연말마다 1년씩 계약 기간이 자동 연장되지 않던가? 마침 다음 달이 계약 만료일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하린은 대답을 바로 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이하린이 레드포드 저택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시스템 때문이었다. 게임상 그렇게 설정되어 있으니까….

그렇게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난처하게 망설이는 이하린을 향해 소년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아니면 혹시 너, 내가 저택을 떠나면 그걸로 볼장 다 봤다는 거야?”

“네?”

“이제 보니 내가 없어도 저택에 계속 남아 있을 생각인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지금까지 네가 나한테 했던 말들은 다 입에 발린 거짓말이었던 건가?”

“아, 아니,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왜 얘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튀지? 오늘따라 소년이 예고 없이 툭툭 꺼내서 사방으로 던지는 화제를 좀처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내가 행복해지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옆에서 지켜볼 거라고 먼저 약속한 건 너잖아. 가만히 있는 나한테 먼저 다가와서 사람을 실컷 들쑤신 것도 너고, 세상에서 내가 제일 소중하다면서 내가 없는 일상은 상상도 안 된다고 귀에 세뇌하다시피 말했던 것도 너야.”

소년은 싸늘한 눈으로 이하린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넌 내가 저택을 떠나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네. 여기에 남아 있으면 외부와 단절되어 지내야 하는 걸 알면서도 계약 기간을 더 연장할 생각이라니….”

다음 순간, 소년이 긴 속눈썹을 아래로 드리우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마치 배신감을 느끼는 것 같은 표정이 소년의 얼굴 위에 옅은 물감처럼 번졌다.

“언제는 나만 있으면 된다고 하더니, 내가 저택을 떠난 뒤에는 바로 뒤돌아서 입을 씻을 생각이었던 거잖아. 내가 동생 같다더니, 그것도 다 거짓말이었던 거지.”

“아,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전에 네가 몇 번이나 나만 아니었으면 이런 우중충한 저택에 더 있지도 않았을 거라고 한 말을 믿었는데…. 내가 바보같이 그냥 나 듣기 좋으라고 마음에도 없이 한 말을 순진하게 믿었어.”

“아니야, 진심이에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전부 마음에도 없이 그냥 한 말 아닌데?”

상처받은 것 같은 소년의 얼굴에 이하린은 당황해서 그의 말을 마구 부정했다.

마음을 담아 몇 번이나 진심이었다고 외치자, 잠시 후 소년이 다시 조용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전부 진심이라고?”

“네, 네!”

“계속 내 옆에 있고 싶다는 말도?”

“당연하죠!”

“그럼 잘됐네. 오늘 당장 메이드장에게 가서, 계약 연장은 더 안 할 거라고 말해.”

“어….”

“너 정도면 다른 곳에서도 일자리는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이런 데 말고, 좀 더 안전한 곳으로 가. 그동안 내가 모아 놨던 게 좀 있는데 너한테 줄게. 어디로 가든 그곳의 화폐로 바꾸면 액수가 꽤 될 거야. 그 정도면 너도 자리를 잡기 쉽겠지.”

소년은 이하린과의 이야기가 얼추 정리되었다고 생각하는지, 다시 차분한 얼굴로 돌아가 혼자서 정리하듯이 말을 이어 갔다.

“나도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 다시 만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잘 모르겠지만…. 그때는 너도 새로운 곳에 충분히 적응했을 테니 오히려 그때쯤 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지.”

이하린은 그녀를 두고 빠르게 휙휙 흘러가는 대화에 잠깐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뒤늦게 소년의 말이 어딘가 묘하다는 걸 깨달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이하린의 눈빛이 소년의 얼굴에서 멈췄다. 어찌 보면 뒷북을 친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지금 마음속에 있는 의문을 굳이 입 밖으로 소리 내 소년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 도련님, 지금…. 저택 밖으로 나가도 나하고 계속 만나고 싶다는 거예요?”

소년은 지금까지 뭘 들었냐는 듯이 얕은 한숨이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게 아니면 내가 왜 지금 너하고 이런 얘기를 하고 있을까?”

테이블을 짚은 이하린의 손이 움찔 떨렸다. 가슴에 벌 한 마리가 들어와서 날아다니는 것처럼 또 속이 어수선해졌다. 물론 이번에도 부정적인 감정 때문은 아니었다.

“그래, 넌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못 알아듣는 성격이었지.”

소년이 이하린을 똑바로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음엔 내가 먼저 너를 찾아갈게. 그러니까 기다려.”

정말 소년의 말대로 될 수 있을지, 사실 이하린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소년의 흔들림 없는 눈 때문인가? 비록 지금 당장은 장담할 수 있는 게 없더라도, 왠지 그의 말처럼 될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왠지 이대로 엔딩을 맞아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았다.

물론 그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이하린은 금방 알게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