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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276)화 (276/300)

하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았다.

‘서, 설마 지금까지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심심찮게 나타났었다는 광탈 루트인 건가?’

저택의 아이들이 성인이 되기 전에 밖으로 나가는 경우는 하나밖에 없었다. 게임 게시판에서 종종 봐 왔던 다른 플레이어들의 글을 생각하자 갑자기 입 안이 마르면서 몸에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저택을 떠나다니… 왜요?”

이하린은 스멀거리면서 올라오기 시작하는 불길함을 억누르고 소년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동요를 나타내듯이 테이블 위에 화병을 내려놓는 손길에는 퍽 조심성이 없었다. 기울어진 화병에서 꽃이 떨어지고, 출렁거리며 넘친 성수가 테이블보를 적셨다. 하지만 이하린은 그것조차 모르는 것처럼 소년에게만 눈길을 고정하고 있었다. 옆을 지나가던 소년이 걸음을 멈추고 이하린 대신 떨어진 꽃을 주워 다시 화병 안에 꽂았다.

“부적합 판정이 나올 예정이니까.”

“아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소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하린이 분개해서 소리쳤다.

부적합 판정이 나오다니, 우리 애가 뭐가 부족해서!

이 <괴물 저택의 도련님들>의 기본 설정상, 플레이어의 육성 대상이 되는 소년들은 모두 레드포드 저택에 입양된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저택 어디를 뒤져 봐도 정작 소년을 입양한 양부모는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게임의 스토리를 진행하는 데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인지, 게임 포탈 어디에서도 소년의 보호자와 관련한 정보는 찾아볼 수 없었다.

누군가는 플레이어들을 매번 경악하게 만들 정도의 게임 퀄리티를 자랑하는 바니타스 사에서 그런 부분을 생각해 두지 않았을 리가 없다며, 시간이 지나 스토리가 좀 더 전개되면 풀리는 중요한 비밀인 게 아니냐고 추리했다.

아무튼, 소년들은 외부와 단절된 채 괴물이 나오는 저택 안에서 보호자 없이 성년이 될 때까지 무사히 살아남아야만 했다.

고용인들은 물론이고 소년들 역시 레드포드 저택의 다른 상황에 대해 플레이어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고용인들의 경우에는 그냥 단기 계약직으로 저택에 들어와 아는 게 없는 것 같았고, 소년들의 경우에는 집안의 사정을 알고 있긴 하지만 남들에게 밝힐 생각은 없는 듯했다. 호기심 많은 플레이어들이 아이들을 온갖 방법으로 회유해 봤으나, 그들 중 어느 한 명도 비밀을 알게 된 경우는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은 소년의 부모에 대해 그저 그러려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지만, 이하린은 무책임한 설정에 불쾌감을 느꼈다.

지금도 소년의 말에 그녀는 화가 나서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이렇게 레드포드 저택의 아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강제로 이곳을 떠나게 될 때, 그 이유는 딱 하나뿐이었다. 소년들의 자질을 평가하는 심사단이 ‘더 이상 이 아이를 지원할 가치가 없다’고 최종 판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저택에 코빼기 하나 비치지 않고, 또 자식에게 편지 한 번 준 적도 없는 양부모인 주제에 심사단과는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아이의 처우를 결정할 권한을 다른 사람에게 완전히 일임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렇게 최종 판정을 받는 순간, 소년들은 파양 당해 저택을 떠나야 했다.

당연히 이는 이하린이 가진 과거의 악몽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일이었다.

지금도 소년의 말을 듣는 순간 어릴 때의 기억이 떠오르며 눈가에 열이 몰렸다. 왜 자신이 애정을 갖고 지켜봐 온 소년까지 그런 신세가 되어야 하는 건지 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니에요? 그래,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부적합 판정 같은 게 나올 리가 없잖아요? 이렇게 훌륭하게 잘 큰 애가 또 어디에 있다고!”

그러나 소년은 씩씩거리는 이하린과 달리, 정작 억울한 일을 당한 장본인임에도 여전히 무미건조할 정도로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왜 그렇게 심각해? 그럴 일 아니야.”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의자에 기대앉는 소년의 모습은 잘 키운 귀족 도련님처럼 우아하고 단정했다. 이하린은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툰 소년이 또 마음을 억누르는 줄 알고 속이 상했다.

“그럴 일이 아니긴요? 이게 어떻게….”

“내가 그렇게 해 달라고 했어.”

“네?”

“평가하는 사람한테 내가 먼저 그렇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에 이하린은 조금 전보다 더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스, 스스로 부적격 판정을 받겠다고 했다고요…? 왜요?”

“그게 나을 거라고 판단했으니까. 어차피 여기에 있어 봤자….”

소년은 이하린이 놀라서 묻는 말에 대답하다가, 어째서인지 말을 더 잇지 않고 중간에 입을 다물었다.

“이해가 안 돼요. 계속 여기에서 사는 걸 원하는 거 아니었어요?”

이하린은 소년의 충격적인 행동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소년은 지금까지 줄곧 얌전한 편이었고, 웬만해서는 이런 돌발적인 행동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큰일을 혼자 저지르다니?

“예전에는. 지금은 아니야.”

“저택을 떠나면 어떻게 하려고요?”

당황해서 아연실색한 이하린과 시종일관 침착한 소년의 태도는 퍽 대조적이었다. 이하린은 예고 없이 닥친 상황에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게임에 이런 엔딩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게 자신의 일이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육성 대상이 이런 식으로 저택을 떠난 후 어떻게 되는지, 아직 자세히 밝혀진 바가 없지 않던가?

지금까지 플레이어들이 이런 결말을 맞은 경우, 육성 대상이 저택에서 사라진 시점에 엔딩을 본 것으로 치부하여 바로 게임이 종료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저택을 떠난 소년이 어떻게 지내는지, 어디서 무얼 하고 사는지, 직접 확인한 플레이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이유로 이런 파양 엔딩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찝찌름한 배드 엔딩으로 통하고 있었다.

“글쎄. 지금까지처럼 지내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되겠지.”

“도련님은 걱정 안 되세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생각하면 안 무서워요?”

하지만 어째서일까? 지금까지 저택을 떠나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다른 플레이어들의 소년들과 달리, 이하린의 소년은 스스로 그것을 원한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는 두려움이나 절망감이라고는 조금도 깃들지 않은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이하린은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이와 비슷한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그녀는 처음에 실감이 나지 않았고, 나중에는 막막해졌다. 이제 와서 그때의 심정을 자세히 되짚어 볼 마음은 없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에 공허가 들어찬 것처럼 여전히 속이 허전해졌다.

“안 무서워.”

하지만 소년은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말했다.

“어떻게 그래요…? 옆에 아무도 없이 앞으로 혼자 어떻게 지내려고….”

“어차피 난 여기에서도 늘 혼자였어.”

그 순간 이하린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물론 소년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당연히 그런 말을 할 만했다. 부모조차 없이 고용인들과 덜렁 남겨져 괴물이 나오는 저택에 몇 년 동안이나 거의 갇혀 살다시피 해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작 소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자, 어쩐지 심장이 툭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이하린이 소년을 만나 위안을 받은 것처럼, 자신 역시 소년의 삶에 잠깐이나마 그런 존재가 되어 주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역시 그런 건 혼자만의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이하린을 소년은 잠깐 가만히 응시했다.

“물론 네가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말이야.”

그리고 이내 소년의 입에서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말이 나지막하게 내뱉어졌다.

이하린은 혹시 자신이 지금 환청을 들었나 귀를 의심하며, 멍한 얼굴로 소년을 쳐다보았다.

“넌 덜렁거리고 가끔 성가셨지만, 같이 있어도 그렇게 싫지는 않았어.”

소년은 오늘 이하린을 놀라게 하려고 작정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오늘 그의 입에서 나온 거의 모든 말이 그녀를 충격에 빠뜨렸지만, 지금 들은 내용은 이하린에게 새로운 종류의 놀라움을 선물했다.

“내가 이 저택을 떠난다고 가정했을 때 아쉬운 건 너 하나밖에 없었지. 그래서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거야.”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덜커덕거리면서 뛰기 시작했다.

소년은 지금까지 보아 온 대로 수려한 얼굴에 무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이하린이 살면서 들어 본 그 어떤 말보다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내용이었다.

“이 저택에 계속 남아 있는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걸 얻어 행복해질 리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러니 이대로 끝이 뻔할 걸 알면서 시간을 허비하느니, 차라리 다른 길을 한번 가 보자고 생각한 거야.”

“…….”

“널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스스로 무언가를 직접 선택하고, 또 결정하고 싶어졌어.”

이 소년은 어떻게 하면 그녀의 마음을 들었다 놓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내가 이곳을 떠난다고 해서 네가 속상해할 필요는 없어. 난 쫓겨나는 게 아니라 내 발로 저택을 나가는 거고, 난 지금 자유로워.”

이 게임 속 세상에 들어와 소년을 만나는 동안 내내 즐겁고 행복했지만, 오늘은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날이었다.

처음에 이하린은 소년의 말을 들으며 그저 멍했지만, 서서히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왠지 마음이 뭉클하고 코끝이 찡해져서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애써 삼켰다.

뭐야…. 이러면 배드 엔딩이 아니잖아?

육성 대상인 아이가 저택을 떠나는 건 좋은 결말이 아니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지금 이하린은 그녀와 소년이 불행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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