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린은 게임 속에서 소년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다이안과의 추억이라 생각했던 기억 중에 많은 것이 실제로는 이 소년과 함께한 일들이었다.
소년은 어린 나이에도 감정 표현이 적고 조숙한 편이었다. 그 나이의 다른 아이들이 작은 일에도 울고 웃느라 바쁜 것과 달리, 소년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일이 드물었고 대부분은 표정이 없는 건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하린에게만큼은 작게나마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늘어갔다.
소년을 만나기 전에 이하린의 일상은 틀에 박힌 듯이 규칙적이고 따분했다. 사실 소년을 만난 후에도 게임에 접속하는 시간이 생긴 것을 제외하면 예전과 별다른 것도 없는 일상이었지만, 그 하나만으로도 왠지 많은 것이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이하린은 낮에는 기계적으로 회사에 다니고, 저녁 휴식 시간과 휴일을 거의 다 게임 속 세계에 할애했다.
이하린은 눈치가 빠른 편이라, 소년이 그녀에게 남다른 호의를 품은 것도 알아차렸다. 사실 그 사실을 자각하는 게 늦었던 이유는 이하린이 그녀의 소년을 거의 동생처럼, 또 자신을 보호자처럼만 여겼기 때문이다. 이하린은 그동안 소년을 어리게만 생각했지만, 따지고 보면 소년도 그런 쪽에 풋풋한 관심을 가질 만한 나이가 되긴 했다.
생각해 보면 이하린의 게임 캐릭터인 루비 아이네는 제법 괜찮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소년에게 거리상으로나 나이상으로나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을 만한 주변인이었다.
성장해 가는 아이들이 어릴 때 학교 선생님이나 이웃집 누나에게 애정을 느끼듯이, 어쩌면 소년도 바로 옆에서 자신을 돌봐 주는 이하린에게 애착의 감정을 가진 것인지도 몰랐다.
이하린은 감개무량함에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을 싫어하던 소년이 이제는 이렇게 그녀에게 긍정적인 마음을 품고 있다니 이보다 감동적일 수는 없었다.
물론 이하린의 눈에는 그런 소년이 여전히 마냥 귀엽기만 했고, 어린 소년의 순정을 진지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건 따로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던 중에 나름대로 평온하던 현실에서는 제법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속보- 러시아행 여객기 실종>
<백오십여 명 태운 람파스008 여객기 교신 두절, 한국인 탑승자 확인 중>
<사건은 미궁 속에…. 여객기 실종 사건 단서 없이 깜깜>
<신 버뮤다 삼각지대? 실종된 여객기의 최종 확인 위치에 대한 진실 공방>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같은 여객기 실종 미스테리 12>
<여객기 사고 목격자 등장, 람파스008은 하늘 위의 문과 충돌했다>
어느 날 여객기 한 대가 비행 중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나 폭발 사고라면 흔적이 남아야 마땅한데, 최종 교신 위치 근처에서 빛이 관측되거나 폭발음이 울린 적도 없었고, 부서진 기체의 부품이 어딘가에서 발견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여객기가 실종된 위치가 하늘에 생겨난 문 근처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세상은 시끄러워졌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문은 처음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이상 현상을 둘러싼 사람들의 열기도 서서히 식어 갔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문을 관찰하거나 조사하는 사람들의 수는 적지 않았다.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문 근처에서 항공 인증샷을 찍어 공유하는 게 아직 유행이기도 했고, 현대 미술에 조예가 깊은 화가 중에는 하늘 문에 큰 영감을 받아 일 년 내내 문을 그려 댄 작품만 전시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이번에 여객기 실종 사건을 목격했다고 주장한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전부터 ‘Daily 문’이라는 제목으로 하늘의 문과 달을 같은 프레임에 담은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게 취미였다. 그런데 이번에 그가 찍었다는 사진에는 정말 원래의 경로를 이탈해 문 옆을 비행하는 실종 여객기의 마지막 모습이 담겨 있었다.
한밤중의 밤하늘을 배경으로 찍힌 여객기는 사진상으로는 거의 작은 점처럼 보였지만, 요즘 기술로 사진을 확대하고 보정해 분석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연달아 찍힌 사진에서 여객기는 목격자의 주장대로 마치 문에 돌진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그렇다면 문에 충돌해 부서졌을 비행기의 파편이 왜 지금껏 하나도 발견되지 않은 것인지 의문이었다. 게다가 여객기가 만약 진짜 문에 충돌한 게 맞다 해도, 원인이 기기의 결함인지, 조종사의 문제인지, 혹은 또 다른 모종의 이유 때문인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사건은 그렇게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단 결론은 여객기와 문의 충돌 쪽으로 굳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사건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시작이었다는 것처럼, 이후로도 비슷한 사고가 줄지어 일어났다. 갑자기 경로를 이탈한 비행기가 또 실종되거나 기기 오작동을 일으켜 추락하는 끔찍한 사고가 연이었다. 그 모든 사고가 예외 없이 하늘에 있는 문 근처에서 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는 보도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특히 어느 스카이다이빙 동호회에서 발표한 영상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취미 생활을 즐기던 외국 동호회의 사람 중 한 명이 하늘에 떠 있는 검은 문으로 갑자기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지는 장면이 영상으로 촬영된 것이다.
- 헐? 지금 저 안으로 사람이 끌려 들어간 거야?ㄷㄷ
- 미친 진공청소기인 줄
- 뭐야뭐야뭐야뭐야야뭐야으아으아으앜
- ㅅㅂ 개소름;; 설마 저거 새로운 유형의 블랙홀 같은 건가???
- 보나 마나 주작 글로벌 관종에게 먹이 주지 마셈
- 분위기 왜 이렇게 심각해?ㅋㅋㅋ 영상 좀 만져 본 사람들은 합성인 거 다 아는데 멍청이들이 이런 거 뜰 때마다 낚이는 꼬락서니 존x 웃기네
└ 내 전공이 영상 쪽인데 저거 찐임 합성이면 낙하산 모양이 저렇게 될 수가 없음 모르면 괜히 아는 척하지 말고 아닥하자
- 애초에 스카이다이빙을 왜 저런 데서 해? 규정상 일반인은 문 근처에 못 가게 되어 있지 않나?
└ 지난번에 경로 이탈한 비행기들도 그렇고, 뭔가 자석같이 끌어당기는 거 아닌가 싶음
- 근데... 저거 잘 보면 사람 빨려 들어갈 때 문 열린 거 아니야? 영상에 보면 살짝 틈이 있는데
└ 틈이 어디 있어?
└ 저 가운데 부분, 사람이랑 낙하산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자세히 보면
└ 그냥 영상이 흔들려서 그렇게 보인 거 아냐?
└ 삼 년 동안 아무 일 없이 그대로였는데 저게 이렇게 갑자기 열린다고?
└ 문은 원래 열리라고 있는 겁니다
└ 거의 46억 년 동안 지구에 없던 게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 떡하니 나타났는데, 문이 좀 열린 게 대수?
└ 헐 우리도 이제 레이드물 찍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