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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274)화 (274/300)

지금 눈앞에 있는 소년은 외모와 성격이 모두 다이안과 완전히 달랐다.

이 소년을 보는 순간, 원래 다이안과의 과거라고 생각했던 기억 위에 새로운 얼굴이 덧칠해졌다. 아니…. 아니다. 엄밀히 따지면 오히려 반대였다. 본래의 기억을 가리듯이 그 위에 두껍게 덧칠되어 있던 다이안의 모습이 지워지고, 대신에 지금까지 감춰져 있던 진짜 소년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지금까지 이하린은 과거의 자신이 오직 다이안만을 육성 대상으로 선택해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여태껏 두 눈을 가리고 있던 뿌연 안개가 순식간에 걷혀 나갔다.

더군다나 지금 눈앞에 있는 소년은 낯선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

“왜 밖에 나와 계세요? 준비도 혼자 다 마치시고. 오늘은 눈이 일찍 떠지셨나 봐요?”

‘린 도체스터’가 아닌 ‘루비 아이네’라는 게임 캐릭터의 모습을 한 이하린이 그녀의 소년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그러나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와 달리 소년은 조금 서늘한 듯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일찍 일어난 게 아니라 네가 늦은 거야.”

“네? 제가 늦었다고요? 아니에요, 평소처럼 일어나서 온 건데….”

“시계를 봐.”

이하린은 소년이 오랜만에 또 트집을 잡으려는 줄 알고 골이 난 얼굴을 하면서 그가 작게 턱짓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복도의 층계참 앞에 놓인 괘종시계를 확인하니, 정말 시곗바늘이 평소보다 늦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하린은 낭패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겉으로는 소년을 향해 짐짓 불쌍한 척 울상을 지어 보였다.

“어떡해. 방에 있는 시계가 망가졌나 봐요. 어쩐지, 그래서 복도에 나와 계신 거였구나….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모처럼 소년과의 관계가 전보다 친밀… 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가까워졌는데, 이 일로 다시 그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할까 봐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소년은 별다른 까칠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이하린을 잠깐 쳐다보다가 돌아섰다.

“됐어. 지각한 만큼 오늘 저녁에는 네 방으로 늦게 돌아가도록 해.”

이하린은 그 말을 듣고 일순간 멈칫했다. 그러다가 곧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소년의 뒤를 따라갔다.

“이제는 저랑 같이 있는 거 별로 안 싫으신가 봐요.”

“습관이야? 지각에 대한 대가를 치르라는 건데, 왜 또 멋대로 이상한 해석을 하고 있지?”

소년의 옆에 따라붙으며 일부러 떠보듯이 말하자, 여지없이 정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소년이 그녀를 싫어했다면, 지각에 대한 벌이건 뭐건 간에 자신의 옆에 오래 남아 있게 할 리 없었다. 이제 이하린은 그 사실을 알았다.

그녀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이하린의 게임 캐릭터인 루비 아이네는 원래 저택의 이런저런 잡무를 보던 수습 메이드였지만, 얼마 전부터 그녀의 소년인 ■■■의 전담 메이드가 되었다. 까탈스럽고 냉담하기로 소문난 도련님이 누군가를 직접 지정했다는 사실에 저택에 있는 모두가 놀랐다. 이하린의 뿌듯함은 더욱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실 이 소년은 이하린의 유일한 매칭 상대라는 게 믿기지 않게도, 처음부터 그녀에게 차갑다 못해 매정한 태도를 유지했었다. 반면 이하린은 처음 봤을 때부터 이 소년이 좋았다. 어쩌면 게임 시스템이 오직 그녀만을 위해 만들어 준 단 한 명뿐인 소년이라는 부분에 마음이 끌린 것인지도 몰랐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소년을 볼 때면 어째서인지 어릴 때 사고로 죽은 여동생이 가끔 떠올라서 아주 조금 마음의 위안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이 소년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 게임에서 그가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도록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마저 들었다.

그러나 이하린의 두근거리는 마음은 너무도 빠르게 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녀의 소년은 처음부터 그에게 친밀감을 품고 다가오는 이하린을 경계했다. 더군다나 그는 이하린처럼 오지랖이 넓고 가벼운 성격을 가진 사람을 싫어한다고 아예 직설적으로 못을 박기까지 했다.

당연히 이하린은 소년의 노골적인 냉담함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후에 다른 플레이어들의 게임 후기를 뒤져 본 결과, 간혹 드물게 육성 대상과 상성이 좋지 않은 경우도 있긴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평상시에 게임의 하드 모드 플레이를 즐기는 사람들은 육성 대상과의 친밀도를 높이기 어려운 편이 오히려 성취욕을 더욱 고취시켜 준다며, 이 또한 게임을 즐기는 묘미로 여겼다. 하지만 게임의 난이가 높아지는 걸 원치 않는 사람은 육성 대상을 다시 배정받기 위해 다소 번거로운 작업을 해야만 했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와 육상 대상의 1:1 매칭을 기본으로 했기에, 다른 육성 대상을 배정받으려면 기존에 설정되었던 플레이어의 캐릭터 기록부터 말소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전 기록이 완전히 지워지고 플레이어의 캐릭터가 새로 생성된 뒤에야 상성에 맞는 소년 또한 재생성되어 매칭되었다.

하지만 이하린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 자동 생성된 루비 아이네의 캐릭터도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도 단지 조금의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소년을 간단히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어릴 때 파양 당한 기억이 떠올라 소년을 버리는 데 강한 거부감이 든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이하린은 그 후로 소년의 마음에 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다. 소년은 무려 1년의 시간 동안이나 싸늘한 태도를 고수해 이하린을 여러 번 좌절시켰다.

‘이상하다. 게임 세상에서만 만날 수 있는 단 하나뿐인 인연이라면서? 그런데 왜 이렇게 쌀쌀맞지? 내가 마음에 안 드나? 난 이 애가 좋은데….’

그녀를 무시하고 멀리하는 소년을 볼 때마다 속상함에 마음이 썼다.

하지만 끈질기게 치댄 보람이 있었던 것일까? 언젠가부터 소년은 가끔씩 이하린과 시선을 맞추고, 그녀의 말에 아주 조금은 귀를 기울여 주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를 해괴한 생물체 보듯이 쳐다보긴 했지만, 적어도 처음처럼 거리를 두는 모습은 아니었다.

이하린의 바람이 빚어낸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소년이 그녀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고 조금씩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지난번에 이하린이 소년을 모로스에게서 구하고 대신 다친 날을 기점으로, 그녀는 수습 딱지를 떼고 소년의 지정을 받아 그의 전담 메이드가 될 수 있었다.

‘그날은 정말 위험하긴 했지…. 아이들을 지키는 경호원 같은 게 저택에 있으면 좋을 텐데.’

이하린은 그날의 아찔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게임사에 한 번 건의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는 레드포드 저택에 아이들의 보호를 따로 맡은 양육자가 없었다. 플레이어 중에 그와 비슷한 직업을 배정받은 경우도 보지 못했다. 그래도 어쩌면 비공개 플레이를 즐기는 유저 중에는 그런 직업을 간택 받은 경우가 있을지도 몰랐으니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보다 다친 곳은 좀 어때?”

“이제 진짜 멀쩡해요. 어제 붕대도 다 풀었어요.”

“그래?”

“걱정하셨구나? 그렇죠? 저 걱정하신 거죠?”

“의기양양한 표정 짓지 마. 그냥 우연히 생각난 김에 물어본 것뿐이니까.”

“에에이.”

이하린은 소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히죽거렸다. 이제는 소년이 자신을 간단히 내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들어서, 전보다 거리낌 없이 굴 수 있었다. 소년은 그런 이하린을 보고 미간을 슬쩍 좁혔지만, 역시나 예전처럼 그녀를 다른 곳으로 쫓아내려 하지는 않았다.

“이미 말했지만, 혹시 다음에도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절대 위험하게 앞으로 나서지 마. 네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어.”

“그건 좀 어려워요. 도련님이 꼭 제 동생 같아서 저절로 몸이 움직인단 말이에요.”

그 순간, 이하린의 옆에서 걷던 소년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이하린은 고개를 든 소년과 눈을 마주했다.

“동생…?”

갑자기 개인사를 꺼낸 탓인지, 소년의 얼굴은 아까보다 굳어 있었다. 이하린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제가 어릴 때 헤어진 동생이 있는데, ■■■ 도련님을 보면 가끔 그 아이가 생각나요.”

원래 이런 얘기를 남한테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어쩐지 지금은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소년과 요즘 마음이 통하는 느낌이 들어서인지도 몰랐다.

게다가 이런 속내를 밝히면, 그동안 이하린이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접근한 게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온 사실을 소년이 알아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그동안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던 마음을 게임 캐릭터 앞에서 처음으로 극히 일부나마 꺼내 보였다.

“내가 동생 같다고?”

“아, 외모는 안 닮았어요. 그냥 왠지 느낌이 좀 비슷하다고 해야 할지….”

“…….”

하지만 실수한 걸까?

소년의 반응은 이하린이 기대한 것과 달랐다.

어째서인지 그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몹시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를 보는 눈빛 역시 깜짝 놀랄 만큼 싸늘했다.

“난 너 같은 누나 둔 적 없어”

소년은 당황한 이하린에게 한기 어린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은 뒤, 매몰차게 옷자락을 흩날리며 자리를 떠났다.

이하린은 멀어지는 소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혹시 또 어린애 취급을 당한 것 같아서 저렇게 화가 난 건가? 얼마 전부터 소년은 유독 그 문제에 예민하게 굴었으니 그럴 가능성이 컸다. 하여간에 까탈스러운 녀석이었다. 하긴, 원래 저 나이 때 애들은 어른처럼 대우받고 싶어 하는 법이니….

이하린은 혀를 차며 소년의 뒤를 쫓아갔다.

“같이 가요!”

소년은 여전히 화가 난 듯한 냉연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꼭 기다려 주기라도 하듯이 슬쩍 걸음을 늦추고 그녀를 뒤돌아보았다.

창문에서 스민 햇빛에 소년의 검은 머리카락이 사금을 뿌린 것처럼 반짝거렸다. 그 모습이 참 예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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