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휘가 내게 속삭인 한마디, 한마디가 꼭 살아 숨쉬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 속을 파고들어 와 마른 가슴에 숨을 불어넣었다.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는데, 꼭 만취했을 때처럼 머리가 하얗게 비고 몸은 지면에서 떨어져 휘청이며 허공을 배회하는 것 같았다.
귀에 박힌 말들을 감당하기 벅찼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감히 상상해 본 적 없는 거대한 진심에 압사당할 것처럼 숨이 막혔다.
누군가 세게 움켜쥐어 조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달음박질쳤다. 실제로도 이상할 만큼 급격히 차오르는 숨을 겨우 가쁘게 내뱉으며 비틀거렸다. 앞에 있는 남자가 내 혼란과 주저함마저도 모조리 빼앗아 가려는 듯이, 나를 붙잡고 날숨 하나조차 달게 집어삼켰다.
영혼마저 송두리째 뽑아내는 듯한 집요한 입맞춤 때문인지, 맞닿은 사람에게서 흘러드는 지독한 감정 때문인지, 점점 눈앞이 아득해졌다.
아, 사는 동안 지금까지 누가 나를 이토록 갈망한 적이 있었던가?
오래전에 아주 잠깐 가족이 되었던 사람들조차 결국은 조금의 미련조차 남기지 않고 떠나갔고, 그 이후에 만난 사람들도 예외 없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그쳤을 뿐이었다.
세상에는 나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걸 알기에 나도 머물 곳 없는 마음을 굳이 낭비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이런 가상의 게임 같은 것에나 시간을 할애하며 감정을 쏟았던 것인지도 몰랐다.
특히 내가 없으면 살아가지 못하는 소년의 존재는 더없이 매혹적이었다. 죽은 여동생과 닮은 소년을 보며 마음의 위안을 얻기도 하였지만, 솔직히 이 아이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저급한 심리가 없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같은 의미로,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 또한 존재 자체가 나를 지독히도 현혹시켰다. 맞닿은 온기, 스치는 숨결, 그 사소한 것 하나하나조차 나를 사로잡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달콤한 것이 실재하지 않는 환상이라면, 차라리 평생 거짓 속에 사는 것이 낫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실 내 현실은 이 게임 속의 세상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만큼, 불어난 의문 또한 가슴을 적시며 넓게 번져 나갔다.
혹시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을까? 체스휘와 만난 게 정말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면…. 그와 내가 함께 보낸 시간이 정말 길다면, 전에도 이 남자는 이렇게 내게 사랑을 갈구하며 옆에 있어 달라고 매달렸을까? 그런데 나는 어떻게 그를 매정하게 뿌리치고 갈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던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의혹은 불현듯 떠오른 소년의 얼굴에 눌려 서서히 가라앉았다.
아, 그래. 어쩌면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할지도 몰랐다. 내가 다른 걸 다 제쳐 두고 체스휘만 보며 그의 옆에만 머무르지 못하는 이유는, 바깥이 아닌 이 세계 안에 있었다.
지금 이렇게 마음이 강하게 흔들리고 있다고 해도, 결국 이번에도 나는 체스휘가 원하는 것처럼 그에게 내 모든 것을 다 주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또 다른 레드포드 저택에는 아주 오랫동안 나만을 기다려 왔던 소년이 있었고, 나는 도저히 그를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도련님.”
바로 그때, 갑자기 귓가에 환청 비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밖을 보는 건 좋은데, 그렇게 계단 앞에 가까이 서 있지 마세요. 그러다 다치세요.”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 넌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게 만드는 게 특기야?”
어째서 지금 떠오른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예전에 게임상에서 다이안과 함께 지냈던 시절의 기억 중 하나였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이번에도 나와 함께 있는 소년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내 입으로 부른 소년의 이름도 그 부분만 일부러 지워지기라도 한 것처럼 희미하게 들렸다.
악마의 화원에서 본 일부 기억도 이랬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내가 아주 중요한 걸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에 시스템 창이 불쑥 떠오른 건 그다음 순간이었다.
시스템 로딩 중….
83%(Err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