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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271)화 (271/300)

달빛을 받아 맞은편 벽에 길게 그려진 체스휘의 그림자가 나를 집어삼키듯이 내 그림자 위로 완전히 겹쳐졌다. 실내에 고인 서늘한 공기가 솜털이 일어난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다. 간지럽게 움직이던 체스휘의 손은 다시 미끄러져, 감각이 예민하게 곤두선 팔뚝을 타고 물이 흐르듯이 느릿하게 기어 내려갔다.

나는 아까보다 달빛의 농도가 짙어진 것 같은 화랑 속에서 굳은 채 숨만 작게 들이마셨다.

사실 이 기이한 긴장감의 원인은 체스휘를 향한 두려움이나 거북함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 내가 느끼는 경계심이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고 있었고, 그건 지금 내 뒤에 서 있는 남자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린 씨, 내가 재미있는 거 하나 알려 줄까요?”

엷은 웃음기를 담은 속삭임이 재차 내 고막을 파고들었다.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어느새 나는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체스휘만 시야에 가득 들어차서, 그가 나를 돌려세운 건지, 아니면 그가 내 앞으로 자리를 옮긴 건지 한순간 분간할 수 없었다.

정면으로 마주한 체스휘의 얼굴에는 그의 목소리에 담긴 것과 비슷한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무의식중에 또 거리를 벌리려 뒷걸음질 쳤으나, 그에게 두 손이 붙잡혀서 오히려 가까이 끌어당겨졌다. 체스휘가 가까이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연인 간의 밀어를 주고받듯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지금까지 이하린은 어떤 상황, 어떤 모습으로 만나도 날 좋아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지나치게 자신만만해서 오만하게 느껴질 정도의 말이었다. 하지만 과시하는 듯한 느낌은 없었고, 실재하는 진실을 읊듯이 한편으로는 단조롭기까지 한 억양이었다.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지만, 결국은 늦든 빠르든 한 번도 예외 없이 당신과 나는 연인이 되었었지.”

다가온 체스휘의 손이 차갑게 식은 내 얼굴을 조금은 장난스럽게 훑으며 희미한 온기를 덧씌웠다.

“몇 번은 당신을 데려와서 여기에서 꽤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적도 있었고.”

체스휘의 말을 듣는 동안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려 왔다. 나는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체스휘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지 눈치챘으면서 고집스럽게 모르는 척했다.

“당신이… 작정하고 꼬드겼으니까 그랬겠죠. 아니면 내가….”

“그러니까.”

체스휘가 가볍게 긍정하며 낮게 소리를 내 웃었다. 내 얼굴선을 따라 움직여 머리카락 사이에서 느릿하게 노닐던 손가락이 이내 보라색 실타래를 한 움큼 쥐고 들어 올렸다.

“작정하고 꼬드기면 꼭 넘어오더라고. 내가 이하린 취향인가 봐.”

내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으며 눈을 가늘게 휘어 웃어 보이는 체스휘의 얼굴이 달빛에 매혹적으로 빛났다.

“이번에도 그래. 진짜 내가 꼴도 보기 싫었으면 당신 성격에 아예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해 버렸을걸.”

귓가에 연이어 속삭여지는 목소리가 꼭 내 급소를 찌르기라도 한 것처럼 말문이 막혔다.

“지금처럼 이렇게 복잡한 눈으로 날 보고, 어중간하게 옆에 있는 게 아니라 철저히 무시했을 거야.”

“…….”

“물론 나한테 화가 났겠지. 나 때문에 마음도 상했을 테고.”

체스휘가 나를 어르고 달래듯이 사탕발림의 말을 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는 언제 나를 자극했냐는 듯이 내 마음을 다 안다는 것처럼 부드러운 어조로 덧붙였다. 하지만 뒤이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지금까지 중에 나를 가장 크게 우롱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밉지 않지?”

강한 확신이 깃든 눈동자가 정면에서 나를 담아냈다.

“그래도 내가 좋잖아. 그래서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

들으면 들을수록, 아연한 기분이 들 정도로 오만한 내용의 말이었다. 만약 지금 내 앞에 있는 게 다른 사람이었다면 헛웃음을 터트리며 지금 무슨 가당찮은 소리를 하는 거냐고 한 소리 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상대가 체스휘라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소리 없이 다가온 짐승에게 불시에 뒷덜미를 물리기라도 한 것처럼 얼어붙어, 아무런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체스휘의 말은 놀랍도록 정확했다.

언제부터 체스휘가 내 안에서 이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이 번잡했으나, 내가 평소에 가장 신경 쓰던 다이안만큼이나 지금은 체스휘 때문에 속이 시끄러웠다. 체스휘가 내게 한 짓들에 가장 큰 분노를 표출할 때조차 그를 진심으로 미워하고 싫어한 적은 없었다. 내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마저도 나는 결국 그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해 혼자 노력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았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를 때의 목소리, 나를 만지는 손길과 나를 향한 애정 어린 눈빛, 끌어안았을 때의 체온, 그 모든 게 나를 현혹하고 마음을 끌리게 했다.

처음에는 그저 게임 속의 캐릭터로서 가볍게 그를 대했지만, 감정이 점점 움직이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역시 실존하지 않는 데이터 속의 인물이었고, 나는 결국 언젠가 이곳에서 벗어나 내 현실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 이런 가상 세계의 인물에게 진심을 품는 건 헛된 일이었다. 현실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경솔히 손을 댔다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쏟게 된 상대는 다이안 하나로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애초에 내 마음이 그렇게 견고했다면, 처음부터 이런 가상의 세계에 발을 들여 거기에 몰두했을 리가 없었다.

가짜 세계이든 뭐든 간에, 이곳의 모든 것은 진짜처럼 너무나 생생했다. 이번 회차에서 처음 만난 체스휘 역시 실재하는 것처럼 생동감이 넘쳐서…. 가끔은 이 모든 게 진짜 오류에 불과해, 나중에 리셋 버튼 하나로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손발이 차갑게 식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 내 앞에 있는 남자를 더 자세히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반대로 그에 대해 어느 것도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잠깐의 즐거움이나 마음의 위안만을 위해 그를 옆에 두는 게 아니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의 앞에서는 늘 중심을 잃고, 주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조금씩 휩쓸리며 동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하린은 이제 아마 내가 조금 불쌍해지기까지 했을 텐데. 내 말이 틀리나?”

이 또한 체스휘가 맞았다.

체스휘에게 들은 말을 부정하기 어려워질수록 나는 그를 외면하기가 힘들어졌다. 악마의 화원에 들어가 보았던 것들이 단순한 환영이 아니라는 걸 어쩔 수 없이 나도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었다. 그럴수록 체스휘가 처음으로 감정을 못 이긴 모습을 보이며 내게 쏟아냈던 말들이 전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 채 내 안 깊숙한 곳을 파고들었다.

그러니 결국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두려움 비슷한 감정은, 내 앞에 있는 남자가 아니라 나를 향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가 내 안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 무서웠다.

“린 씨, 내 손을 뿌리치는 게 어려우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잖아요.”

체스휘가 계속 내 귓가에 속살거렸다.

“굳이 어렵게 거부할 필요 뭐가 있어?”

그냥 이 상황에 순응하라고… 혼란스러움에 갈등하며 그를 밀어내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이대로 있으라고, 체스휘가 내게 다정히 속삭였다.

그 말이 어찌나 달콤한지, 한순간 내 안의 기본 축이 뒤흔들리는 듯한 위기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더 말하지 마요.”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꽉 막힌 목으로 가라앉은 목소리를 겨우 내뱉었다.

“지금… 듣고 싶지 않으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마.”

체스휘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비스듬히 기울였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동자 속에 달빛이 어려 보석처럼 반짝였다. 사람을 매혹시킬 정도로 아름답지만, 온기가 없고 기이하게 공허한 눈이었다.

“린 씨.”

이번에도 내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눈을 하며 체스휘가 웃었다. 서늘한 큰 손이 내 얼굴을 감쌌다. 얼굴이 고정된 채로 살짝 더 위로 들리면서, 마주한 시선을 더욱이 피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하지만 나를 붙든 손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체스휘의 입술이 작게 달싹인 다음 순간, 저절로 그렇게 되어 버렸다.

“사랑해.”

체스휘가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속삭인 말은 아주 단순하고 짧았다. 하지만 내게는 무엇보다도 충격적이었다. 나는 살면서 이만큼이나 감미롭고 무서운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작살에라도 꿰인 것처럼 눈을 부릅뜬 채 숨을 멈춘 나를 향해 체스휘가 고개를 기울였다. 달빛을 머금은 금갈색 머리카락이 시야에 흩어졌다. 녹아서 사라질 것처럼 부드러운 입술이 겹쳐진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제는 더 가까워질 수 없을 정도로 지척에서 시선을 얽은 채 체스휘가 다시 한번 속삭였다.

“사랑해, 이하린.”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사랑 고백이 맞닿은 입술에서 달콤한 숨결과 함께 흘러들어와 내 안을 적시며 휩쓸었다.

“모든 세계를 통틀어서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분명 나일 거야.”

나는 체스휘를 막지 못하고, 그가 나를 마음대로 헤집어대는 것을 속절없이 내버려 두고 말았다.

“당신이 나를 몇 번이나 두고 떠나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가 먼저 당신을 놓은 적은 없었어.”

체스휘는 지나치게 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너무나 손쉽게 내 약한 부분을 비집고 들어왔다.

“분명 앞으로도 그럴 테지. 당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언제 다시 내 앞에 나타나든, 영원의 시간이라도 기다려 당신을 찾아내서 몇 번이든 또 사랑할 거야.”

그동안 체스휘가 내게 하는 말들에는 대부분 어떤 의도가 있었다. 분명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하지만 또한 이것이 내가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했던 남자의 가장 솔직하고도 순수한 진심이라는 것을 이제 나는 알았다.

“그러니까 내 옆에 있어요. 이번에는 날 떠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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