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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269)화 (269/300)

어차피 지하실의 문으로는 영혼만 이동할 수 있었으니, 체스휘가 사용하는 다른 통로가 있다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그래서 나는 패기 있게 내 앞에 있는 녹슨 철문을 열고 악마의 화원 안으로 들어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다시 이 안에 들어오고 싶어서 마음이 달았었지만, 지금은 안개 낀 화원 안의 잔디를 밟자마자 가장 먼저 꺼림칙한 기분부터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나 혼자서는 이곳의 문을 넘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 안은 패기와 만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체스휘는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내가 악마의 화원에 들어간 걸 알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가 생각한 것처럼, 이 안에 다른 문이 있다면 더더욱 신경을 쓰겠지. 혹시 내가 헛다리를 짚은 거라고 해도… 어쨌든 내가 여기서 어디가 잘못되면 체스휘가 데리고 나가 고쳐 줄 테니 패기를 부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역시나 악마의 화원 안으로 들어오자 또 이하린의 기억을 기반으로 한 환청이 들려왔다.

이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느끼던 그리움의 감정은 잠깐이었다. 체스휘가 없어서 그런지 거대한 식물들이 처음부터 우글우글 몰려들었다. 나는 그것들을 헤치고, 그 사이로 꾸역꾸역 밀고 나갔다. 하지만 오래 걷지도 못해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다가 급기야 줄이 끊어진 목각 인형처럼 어느 순간 몸에서 힘이 탁 풀렸다. 정전된 방에 있을 때처럼 눈앞이 어둡게 깜빡였다.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어느새 나는 바닥에 쓰러져 검은 그림자 속에 파묻혀 있었다.

나를 향한 누군가의 악의가 담긴 기억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덮쳐들기 시작했다.

“이 건방진 계집애! 매일 서고에만 처박혀 있는 하찮은 고용인 주제에!”

기억 속에서 누군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아무래도 다투고 있던 중인지, 눈앞에 나타난 여자가 대뜸 손을 들어 나를 때리려 했다. 그런데 여자가 내 얼굴을 후려치기 직전에, 어떤 남자가 다가와 그녀의 팔을 붙잡아 막았다.

“로, 로반슈타인 경? 여긴 여성용 세면실인데, 어떻게 허락도 없이 무례하게…!”

“실라 양이야말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요. 문밖에까지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다 들리던데. 평소에 온갖 고상한 척을 다 하던 실라 양의 목소리라고는 믿을 수가 없어서, 난 또 모로스라도 나타난 줄 알았잖아.”

비웃듯이 조롱 섞인 목소리에 여자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면서 도망치듯이 뒤돌아 달려갔다.

“괜찮아요, 세를리즈 양?”

그런 그녀를 뒤로한 채 남자가 내게 물었다. 나를 때리려 한 여자와 함께 저택의 손님으로 와서 머물고 있는 그는 다름 아닌 체스휘였다. 이때의 나는 카밀라 세를리즈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세면실의 문 쪽으로 달려가는 여자를 쳐다보면서 나는 살짝 어색 목소리로 체스휘에게 인사했다.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그런데… 왜 자꾸 저한테 잘해 주세요?”

“왠지 당신이 내가 찾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관심을 표하며 친절하게 구는 남자가 이상해서 충동적으로 꺼낸 물음에, 생각보다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 순간 묘한 기분이 들어서 체스휘에게 다시 물었다.

“만약 아니면요?”

“아니면?”

듣기 좋은 작은 웃음소리가 나지막하게 귓가에 울렸다.

“글쎄,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는데. 내 직감은 꽤 잘 맞는 편이거든.”

나를 때리려 했던 여자가 체스휘의 등 뒤에서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고 완전히 사라지면서 그 장면은 끝났다.

기억은 점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몇 번인가 또 체스휘와 함께 있는 장면이 이어졌다. 하지만 체스휘가 내게 악의를 가졌던 건 지난번에 보았던 마지막 기억이 유일한지, 체스휘와 단둘이 만나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체스휘와 내 관계는 간접적으로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 모든 기억에서 체스휘는 어김없이 나한테 먼저 다가왔다.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대체로 내가 아는 체스휘 같았지만, 가끔은 아닐 때도 있었다. 어떨 때의 그는 차갑고도 메말라 보이는 눈을 한 채 멀리서 나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리고….

“괜찮으세요, 도련님?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요.”

“또 너구나, 루비.”

소년의 청아한 음성이 내 이름을 불렀다. 이번에는 체스휘와의 기억이 아니었다. 내 앞에는 체스휘보다 어린 소년이 있었다.

이곳에서의 내 이름은 루비. 이때는 다이안과 별로 친하지 않았는지, 다음 순간 내가 놀란 목소리로 소년에게 말했다.

“어? 제 이름을 기억하시네요.”

“왜 끼어들었어? 다쳤잖아.”

“괜찮아요. 이 정도는 별로 아프지도 않은걸요.”

내 시선을 따라 화면이 움직이듯이 시야에 비친 광경들도 바뀌었다. 방금 넘어지기라도 했었는지, 옷을 터는 여자의 손과 흙이 묻어 더러워진 소매, 찢어진 상태로 피가 번진 스타킹 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때 내가 입고 있는 옷은 다름 아닌 메이드복이었다. 이번에는 직업이 저택의 메이드인 건가? 익숙한 복장에 괜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지금 이곳에는 다이안과 나, 둘뿐이었다. 지금까지의 기억처럼 다른 제삼자가 가까이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나한테 악의를 가지고 있는 거지? 계속 시선이 앞에 있는 소년에게 고정되어 있어 주변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웅성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긴 하는 걸 보면 그래도 시야 바깥에 다른 사람이 있긴 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 중에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거니 싶었다.

“너 정말 멍청하구나.”

그런데 바로 그때, 표정이 거의 없는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보던 소년의 입에서 서늘하고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은 방금 일부러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거야. 네가 어떻게 할지 궁금해서. 그런데 넌 진짜 생각 이상의 바보였네. 정말 모로스의 앞에 맨몸으로 뛰어들다니. 난 너처럼 쓸데없이 오지랖만 넓은 사람이 싫어.”

이때 만난 다이안의 성격은 내가 알던 것 중에 가장 냉소적이었나 보다…. 아무래도 내가 그를 돕다가 다친 모양인데, 고맙다는 말은커녕 쌀쌀맞은 비난조의 말만 돌아왔다.

“저 때문에 기분 상하셨으면 죄송해요. 그래도 전 도련님이 좋아요.”

물론 나는 이 정도로 기가 죽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소년을 대했다.

“게다가 도련님이 다치는 것보다는 제가 다치는 게 낫죠. 원래 도련님 같은 어린애들은 어른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거랍니다.”

“웃기지 마. 나보다 고작 네 살밖에 안 많은 주제에.”

한결 더 냉담하고 날카로운 반응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어린애 취급받는 게 싫어서 그런 것 같았다.

소년은 시린 눈으로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느릿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따라와. 지금은 의사가 자리를 비워서 널 치료해 줄 사람도 없을 테니까.”

갑자기 눈앞의 영상이 치지직거리며 흐려졌다. 지금까지 악마의 화원에서 보여 주는 기억이 이런 식으로 중간에 끊어지려 하는 건 처음이라 이상했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날 번거롭게 만들지 마. 네가 양육자도 아닌데 이렇게 다쳐 가면서 날 지키려 애쓸 필요는 없어.”

혹시… 소년의 안에서 나를 향한 악의가 사라지고 있나? 그러고 보니 지금은 소년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덜 차갑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 말고도 조금 전부터 이상한 점은 한 가지 더 있었다.

왜 아까부터 다이안의 얼굴이 제대로 안 보이지? 꼭 블러 처리가 된 것처럼 소년의 얼굴 부분이 흐릿하고 뿌옇게 보였다.

소년이 내 앞에서 먼저 뒤돌아섰다. 흐릿하던 초점이 마침내 제대로 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소년의 뒷모습이 처음으로 시야에 또렷하게 비쳤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는 다이안과 같은 은발이 아니었다. 소년이 빨리 따라오지 않고 뭐 하냐는 듯이 나를 뒤돌아보는 순간,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나를 무의식의 세계에서 끄집어냈다.

“린 씨는 정말 자학하는 취미가 있나 봐.”

나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번쩍 눈을 떴다.

“보통 사람들은 한번 들어가는 것도 싫어하는 곳인데, 벌써 그 안에서 린 씨를 꺼내 오는 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네요.”

내가 깨어난 걸 알았는지, 나지막한 목소리가 잇따라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누군가가 나를 안고 손으로 몸을 토닥이고 있었는데, 보나 마나 체스휘였다.

시야가 온통 까맸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체스휘에게 닿아 있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직도 악마의 화원에 뿌리내린 꽃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줄 알았다. 게다가 한발 더 나아가, 설마 내가 악마의 화원에 있는 꽃들의 동료가 된 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그래서 한순간 소름이 돋았으나, 알고 보니 체스휘가 내 몸을 이불로 꽁꽁 싸매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밤이 되어서 이렇게 주변이 어두운 거였다.

내가 또 기절했었나? 아니면 죽었었나? 아무튼, 내 예상대로 체스휘가 나를 악마의 화원에서 꺼내 온 듯했다. 그냥 침대에 눕혀 두면 되지, 왜 이렇게 나를 자기 몸 위에 올려놓고 아이 어르듯이 토닥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불편하게 몸을 바르작거리는데도 체스휘는 아랑곳하지 않고 욕심껏 나를 끌어안은 팔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혹시 또 내가 정신을 차리면 자신을 거부할 걸 알아서 이렇게 이불로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둘둘 말아 놓은 게 아닌가 싶었다. 체스휘의 뻔뻔함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내 의심은 타당했다. 나는 치켜 올라간 눈으로 체스휘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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