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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267)화 (267/300)

나는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고 마주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들은 말이 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내 두 귀로 들은 소리이고, 무슨 내용인지 인지하는 것까지도 어렵지 않았는데, 기이하게도 조각난 단어들이 머릿속에 똑바로 입력되지 않고 헛도는 느낌이었다.

“그중에 한번은 왠지 느낌이 좀 묘했었는데, 린 씨여서 그랬나 봐요. 어쩐지 지하실 앞에서 다시 눈을 떴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네요. 원래 육체를 강탈한 영혼들은 다시 공허 속으로 끌려 들어갈까 봐 문에서 최대한 멀어지고 싶어 하는데, 그때만 예외여서 이상했거든.”

체스휘의 말이 이어질수록 나야말로 가슴이 점점 갑갑해져서 이상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어느새 숨을 작게 쉬고 있어서 그런 거였다.

바로 앞에 거울이 있는 게 아니라 내 얼굴을 직접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마 지금 내 표정은 뻣뻣하게 굳어서 상당히 이상하지 않을까?

그 증거로, 줄곧 내 얼굴에 시선을 두고 있던 체스휘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당치도 않게 꼭 나를 위로라도 하듯이 입꼬리를 당겨 가느스름하게 웃어 보였다.

“왜 그런 얼굴을 해요? 어차피 다 예전 일인걸. 앞으로 한동안은 그럴 일 없어요.”

“앞으로 한동안은…?”

“응, 한동안은.”

체스휘는 작게 흘러나온 내 반문에 또 태연히 긍정했다. 그러면서 그가 어깨 앞으로 늘어진 내 머리카락을 나른한 손길로 쥐어 거기에 입을 맞추었다.

“지금은 이렇게, 린 씨가 내 눈앞에 있잖아.”

그 순간 시선이 얽힌 눈동자에 심장이 꽉 움켜잡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그의 눈은 나를 향해 미소를 짓듯이 가볍게 접혀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그 안쪽 깊은 곳에 서린 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 말은….”

모래나 흙이 낀 것처럼 버석거리는 목에서, 꼭 자다가 일어나서 잠긴 것처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숨죽여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체스휘 씨가 여러 번 스스로… 죽었었다는 거예요?”

게다가 방금 들은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그는 앞으로도 내가 없으면 얼마든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망각도 없이 지루한 날들을 오래 반복하다 보면 가끔 그런 충동이 들 때가 있어요.”

체스휘가 ‘그게 무슨 말이냐, 네가 내 말을 잘못 받아들인 거다.’라고 부정해 주기를 바라고 물었으나, 허튼 기대였다.

눈앞에 있는 얼굴을 경직된 시선으로 응시했다. 나는 이게 무슨 재미없는 농담이냐고, 그런 소리는 빈말로도 하지 말라고 체스휘에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체스휘는 지금 자신이 그리 중요하지도, 또 놀랍지도 않은 말을 한 것처럼 굴고 있었지만, 나한테는 그리 대수롭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체스휘가 내게 장난삼아 실없는 소리를 하는 거라면 좋을 텐데, 마주한 얼굴에서는 그런 낌새가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나는 체스휘가 나를 놀리거나 골탕 먹일 속셈으로 없는 말을 지어내거나 과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 순간, 심장에 무거운 돌덩이가 하나 쿵 떨어져서 얹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가까이에서 내 눈을 들여다보던 체스휘도 동요하는 나를 알아차린 듯했다.

“이런 말을 생각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이네. 어차피 죽어도 진짜 죽는 게 아니니까, 그럴 필요 없는데.”

체스휘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나를 향한 미움이나 원망 같은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나한테는 왠지 그의 말이 꼭 협박처럼 느껴졌다. 꼭 ‘네가 없으면 내가 어떻게 망가질지 모르는데, 그래도 나를 떠날 거냐’고 내게 묻는 것 같았다.

“당신이야말로 내가 우스웠던 거지. 그 긴 시간 동안 옆에 같이 있었는데도, 당신은 한 번도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선택한 적 없어. 매번 나만 두고 죽고, 죽고, 또 죽고.”

“그리고 나는, 그때마다 혼자 기약 없는 시간을 보내면서 또다시 어디에 있는지 모를 당신을 찾아다니고.”

지금까지는 그다지 실감 나지 않았던 체스휘의 말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한순간 등골이 오싹거렸다. 그의 말이 품고 있는 무게감에 가슴이 짓눌리는 것처럼 답답해지면서 조금씩 숨이 막혀 왔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예전부터 체스휘에게 희미하게 느끼고 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까… 당신은 어떻게 죽지 않고 그렇게 오래 사는 거예요?”

차라리 지금 내 앞에 있는 남자가 체스휘가 아니라 미카엘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런 의문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오래 기다렸다면서. 수십, 수백 번이나 다른 사람이 된 나를 만나고 또 만났다면서…. 그게 진짜라면 어떻게 당신은 계속 이 몸으로, 죽지도 않고….”

내가 이번에 1년 전의 레드포드 저택으로 가서 알게 된 바로는, 미카엘 카드리고와 린 도체스터는 비슷한 인종이었다. 추정하자면 그들은 원래 레드포드 저택에 머물던 선택받은 아이들이었고, 그러다가 부적합 판정을 받아 폐기되어 무덤이란 곳에 버려졌다.

그 후 스텔라에서 그들을 데려가 다른 용도로 육성시켰다. 그 과정에서 미카엘 카드리고와 린 도체스터는 44세계의 기술로 인해 죽어도 죽지 않는 존재가 된 것 같았다. 물론 소장과 혁명 단체의 일부 사람들이 함께 실행했던 연구의 궁극적인 목표처럼 영생에 도달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여벌의 목숨 정도는 생겼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당장 나만 해도 망가진 육신을 복구해서 다시 되살린 횟수가 꽤 된다고 대주교 릭 도체스터에게 들은 기억이 있었다. 체스휘도 나한테 비슷한 말을 했었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남자의 육신은 미카엘이 아닌 체스휘의 것이었고, 내가 알기로 그는 평범한 일반인이었다. 그러니 상식대로라면, 체스휘가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죽지도 늙지도 않고 이렇게 살아 있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것도 굉장히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라, 이제 와서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네요.”

체스휘는 까마득하게 오래된 일을 떠올리듯이 잠깐 먼 곳을 보는 것 같은 눈을 하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레드포드 저택 안에서 미카엘 카드리고와 체스휘 로반슈타인이 합쳐지면서 이제까지 없던 이례적인 존재가 되어서?”

다음 순간 체스휘가 냉소 비슷한 미소를 입술 끝에 머금으며 내 눈을 꿰뚫을 듯이 응시했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내가 이 빈 세계의 주인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해야 할지.”

이번에도 나는 그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고, 그 역시 내 반응을 기다리지 않으며 한결 낮게 잦아든 목소리로 나를 향해 속삭였다.

“그러니까 린 씨가 레드포드에 있는 동안은 어차피 나한테서 벗어날 수 없어요.”

달콤하고도 섬뜩한 속삭임 뒤에, 체스휘가 손을 들어 하얗게 얼어붙었을 것이 분명한 내 얼굴을 어루만지듯이 쓰다듬었다.

“그리고 나는 린 씨가 이 상황을 받아들이든, 그렇지 못하든, 아무 상관없어.”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그 안에 담긴 내용은 퍽 냉정했다.

“사실 나는 급할 게 하나도 없지. 있는 거라곤 시간뿐인데.”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체스휘가 아까 나한테 한 말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는 미카엘과 달리 내게 과격한 방법을 사용해 이곳에 묶어 두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순순히 나를 놓아주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어떤 의미로 체스휘는 미카엘보다 잔인하고 영악했다.

“결국은 린 씨가 포기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일찌감치 현실을 받아들여.”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처럼 어둡고 차가운 눈이 나를 그 안에 가둬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면… 혹시 또 모르지. 내가 린 도체스터인 당신을 먼저 버리고, 다음 차례를 좀 더 빨리 앞당겨 버릴지도.”

그 순간, 악마의 화원에서 보았던, 증오와 원망이 얼룩진 얼굴로 내게 손을 뻗는 체스휘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꽉 막힌 가슴에서 밭은 숨을 토해 내며 이번에야말로 체스휘를 세게 밀쳐냈다. 체스휘가 아까보다 나를 느슨히 잡고 있었기 때문인지, 어렵지 않게 처음보다 거리가 벌어졌다. 몸을 일으키자 덜컹, 하고 등이 테이블에 부딪혔다. 하지만 바닥에 발을 딛고도 바로 체스휘와 완전히 떨어지지는 못했다. 체스휘의 팔이 꼭 먹잇감을 옥죄는 덫처럼 내 허리를 강하게 조여 왔다. 하지만 그는 내 눈을 응시하며 서서히 팔에서 힘을 풀어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미처 감추지 못한 채, 체스휘에게서 뒤돌아 방을 뛰쳐나갔다.

신진대사가 멈춘 몸인데도 등 뒤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복도에 서 있던 사라로사가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나온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또 말없이 내 뒤로 따라붙었다.

내 방으로 돌아와서 문을 완전히 닫아걸고 나서야 마음에 조금이나마 안정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소름 돋는 끔찍한 소리를 한 것치고, 체스휘는 나를 잡으러 바로 쫓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시간이 많다는 그의 말대로, 내가 이 상황을 받아들일 때까지 그냥 풀어 놓으려는 생각인지도 몰랐다.

바짝 마른 목으로 침을 한번 삼킨 뒤 호흡을 고르다가, 문득 테이블 위에 있는 것에 시선이 닿았다.

작은 주머니와 총이었다. 지하실의 문을 이용하기 직전에 세라가 내게 가져가라며 준 것들이었다. 하지만 영혼만 문을 통과하면서 두고 간 물건들이었는데, 누군가 그걸 방으로 가져다 놓은 모양이었다. 굳은 눈으로 등 뒤의 문을 쳐다보다가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서 주머니 안을 확인해 보았다. 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했는데, 막상 열어 보니 별것 아니었다. 전에 내가 다이안에게 맡아 놨던 악마의 화원의 씨앗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원래대로 다시 주머니 안에 넣어 둔 뒤,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러고 나서 전부터 확인하려고 했던 또 다른 것을 입 안으로 읊조렸다.

‘시스템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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