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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266)화 (266/300)

“내 발목을 분지르려던 계획은 그냥 포기했나 봐요?”

“일단 보류 중이에요. 미카엘 쪽은 방에 가두고 팔다리를 다 묶어 놓자고 하는데, 난 되도록 평화로운 방법을 사용하고 싶어서.”

내 물음에 체스휘는 또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 내용이 다소 거슬려서 손이 움찔거렸지만, 이번에는 거기에 대해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과격한 방법을 사용했던 건 전부 미카엘 쪽이라는 것처럼 들리네요.”

“뭐, 솔직히 꼭 그런 건 아니긴 하지만.”

게다가 이제 와서 평화로운 방법을 운운하기에는 좀 늦은 것 아닌가? 애초에 허락도 없이 사람을 이런 곳에 데려와서 마음대로 머리를 텅 비게 만든 다음에 감금하려고 한 것부터 문제가 아닌가 싶은데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역시 지금의 나는, 이틀 전까지 체스휘에게 품고 있던 것만큼의 분노는 거의 느끼고 있지 않았다.

‘난 이 남자가 조금 불쌍해진 건가?’

물론 내 안에는 아직도 불신의 감정이 깊게 뿌리내려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라면 확실히 내 취향을 지나치게 잘 알고 있던 이곳의 고용인들도, 예전에 체스휘가 나한테 드디어 만났다느니, 오랫동안 찾아다녔다느니 하는 이상한 소리를 했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게다가 이번에 악마의 화원에서 본 기묘한 기억들도 그의 말에 신빙성을 더해 주는 듯했다.

하지만 체스휘의 말이 어느 정도 신뢰성은 얻었을지언정, 내 마음까지 완전히 열리게 만든 건 아니었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해도 나는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의심 한 점 없이 품고 있던 기본 전제나 마찬가지인 부분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을 찾아서 얼마나 오랫동안 이 빌어먹을 저택에 갇혀, 그 안을 돌고 또 돌면서 헤맸는지 같은 거?”

“이번에도 수십 년인지, 수백 년인지, 그 이상인지 모를 시간 동안 기다려서 겨우 이 몸 안에 들어온 당신을 만나게 된 거?”

“아니면 당신이 이번에 만나고 온 1년 전의 내가, 사실 나한테는 이미 햇수조차 셀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오래된 과거라는 거? 그런 게 궁금했어?”

하지만… 체스휘의 그 말이 왜 자꾸만 떠오르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때, 미처 완전히 억누르지 못한 격렬한 감정을 쏟아 내며 나를 보던 체스휘의 얼굴이, 또 악마의 화원 안에서 보았던 환영 속의 원망 어린 체스휘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게 지금 내가 체스휘를 밀어내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마음 한편으로 느끼고 있는 또 다른 묘한 감정이 있는데…. 이건 지금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당신한테 내 진짜 이름이 이하린이라는 거, 그리고 내가 게임에 들어왔다는 것까지 말해 줬다고 했죠?”

나는 체스휘에게 굳은 몸을 기대지도 않고 그저 뻣뻣하게 안겨 있다가, 잠시 후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난 솔직히 당신이 한 말을 아직 전부 다 진짜라고 믿진 않아요. 당신 뜻대로 이번에 악마의 화원에 들어가서 본 건 있지만 그게 진짜 내 기억인지는 모르겠어.”

가라앉은 내 목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울렸다.

내가 여전히 자신의 말을 부정하듯이 말하는데도 체스휘는 나를 끌어안고만 있을 뿐,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또 내 말에 바로 반박하면서 감정적으로 반응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라면 의외였고,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내가 수십, 수백 번이나 죽었다가 전부 잊고 다시 새로운 몸으로 바뀌어서 돌아왔다고 했는데, 나한테는 처음부터 린 도체스터의 몸으로 게임을 시작한 기억밖에 없거든요.”

“당신은 린 도체스터가 아닐 때도 늘 그렇게 말했어.”

그러다가 이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던 체스휘에게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불과 하루 이틀 전에만 해도 내게 거칠게 감정을 폭발시켰던 모습이 모조리 꿈인 것처럼, 사뭇 건조하게까지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유페미아 로즈골드, 라시타 소이어, 카밀라 세를리즈, 글로리오사 오거스트….”

체스휘의 입에서 어떤 여자들의 이름이 느릿하게 이어졌다. 분명 낯설어야 할 이름이었지만, 내게는 기시감이 느껴지는 이름들이었다.

줄줄이 덧붙여지는 이름을 듣다가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몸을 움칫거렸다. 나와 가까이 맞닿아 있는 체스휘도 그것을 느꼈을 것이 분명했다. 내가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라도 하려는 듯이, 내 허리를 옥죄고 있는 그의 팔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그 캐릭터들로 게임을 하고 있다고 말했지.”

“…….”

“매번 그런 얘기를 나한테 해 준 건 아니었지만, 분명 당신 입에서 나왔던 말들이에요. 그렇지 않다면 내가 이런 걸 어떻게 다 알고 있겠어?”

체스휘가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마주했다. 가까이에서 시선이 얽혔다. 이번에도 자신은 내게 거짓 한 점 말하고 있지 않다는 양, 더없이 고요하고 잔잔한 눈동자가 시야에 비쳤다. 그렇게 내 눈을 정면에서 똑바로 응시하던 체스휘가 잠시 후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뜨며 지나가는 듯한 어투로 덧붙였다.

“뭐, 긴 시간 동안 공허를 떠돌던 영혼의 자아가 불안정한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긴 하지.”

이번에도 그의 말은 나한테 은근히 거슬리는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어떤 나쁜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닌 것 같았는데도 미간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그 말은 지금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어요.”

체스휘는 내 반응이 냉랭해지자 무심한 어투로 나를 달래듯이 말하며 내 등허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런데 린 씨. 정말 그 게임이란 것 때문에 여기에 오게 된 건 맞아요?”

하지만 다음 순간 귓가를 스쳐 지나간 체스휘의 말에 나는 또 한 번 멈칫하고 말았다. 체스휘는 여전히 어떤 악의도 없어 보이는 고요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입매를 미세하게 움직여 어스름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애초에 그 기억부터 잘못된 걸 수도 있잖아. 난 언젠가부터 그런 의구심이 들던데, 당신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어째서일까? 그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체스휘가 지금 지적한 것은, 분명 내가 게임 속에 직접 들어와 린 도체스터로서 맞이하고 있는 이 44회차가 진짜 44회차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만큼이나, 애초에 내가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대전제였다. 그런데 그런 부분을 타인에게 지적당하자 마치 내 본질, 혹은 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 같은 강한 거부감이 밀려들었다.

나는 반발심에 체스휘의 몸을 확 밀쳐 냈다. 그래 봤자 내 몸을 단단히 붙든 팔 때문에 여전히 체스휘의 다리 위에 올라앉은 채 기껏해야 상반신이 좀 더 멀어진 정도의 효과만 있을 뿐이었다.

“당신이….”

나는 울컥 치솟는 감정을 애써 삭이려고 노력하며 가라앉은 목소리를 입술 밖으로 내뱉었다.

“이런 식으로 구니까 내가 못 믿는 거잖아. 자꾸 떠보듯이 한마디씩 던져 보기나 하고….”

“알겠어. 이 얘기는 이제 그만할게요.”

하지만 체스휘가 너무 쉽게 내 말을 인정하고 대화를 끝맺어서 나도 하려던 말을 더 잇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체스휘가 보인 의외의 반응에 멈칫해 입을 다문 사이, 그가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솔직히 이제 그런 건 나한테 큰 의미가 있지 않으니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그러니까 싫으면 그건 더 파고들지 않을게요.”

체스휘가 그럼 만족하겠느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또 나를 현혹하려고 수작을 부리는 줄 알았는데, 체스휘가 너무 깔끔한 태도를 보이니 오히려 더 찜찜해졌다.

주로 미카엘 쪽이 감정적이고 과격한 언행을 보인 거지, 체스휘 쪽은 평화로운 방식으로 이번 일을 해결하고 싶다고 하더니, 설마 진짜인가?

어느 쪽이든, 나도 강한 사람에게는 강해지고 약한 사람에게는 약해지는 기질이 있다 보니 체스휘 쪽에서 먼저 이렇게 한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이자 별수 없이 한풀 누그러진 얼굴로 그를 마주하게 되었다.

“…지하실의 문으로 이동했을 때, 미카엘 카드리고의 총을 들고 있는 남자를 잠깐 봤는데. 혹시 다른 시간대의 당신이었어요?”

“내 총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렇겠지.”

말을 돌릴 겸, 때마침 문득 생각난 것을 묻자 체스휘가 무덤덤하게 대수롭지 않은 듯이 대답했다. 나도 그냥 생각난 김에 말을 꺼낸 것뿐이지만, 막상 그때의 일을 입에 올리고 나니 점점 더 구체적인 기억이 떠오르면서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택이 되게 낡았던데…. 다른 사람들도 아무도 없고, 악령들만 수두룩하게 있던데. 진짜 당신이었다고?”

“아, 그때.”

그런데 내가 설명하는 걸 반쯤 흘려듣는 듯하던 체스휘가 갑자기 뭔가 짚이는 게 있는 것처럼 반응했다. 나를 응시한 그의 눈에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그때 내 몸에 들어온 게 린 씨였다고요?”

나는 그저 미카엘의 총을 가진 남자를 봤다고만 했지, 그의 몸을 잠깐 빌렸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도 체스휘는 그때의 상황을 정확하게 말했다.

아무튼, 그건 정말 체스휘가 맞았던 모양이다. 그때 내가 본 남자의 손 같은 게 묘하게 눈에 익었던 데다, 나중에 미카엘 카드리고가 가지고 있던 총과 남자의 총이 똑같은 걸 알고 나서 혹시 그렇지 않을까 싶기는 했는데.

“한번 죽은 뒤라 다른 영혼이 들어오는 게 가능했나 보네요.”

“네?”

“그때가 몇 번째로 자살했던 시기였더라…. 기억은 안 나지만, 원래 그런 식으로 죽고 나서는 다른 영혼이 잠깐 들어왔다가 나가기도 하는데, 그중에 린 씨도 있었다니 공교로운 우연이네요.”

체스휘는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은 일을 떠올리듯이 태연한 얼굴로 나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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