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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265)화 (265/300)

분명 이렇게 테이블 위에 엎드려 선잠이 든 체스휘는 처음 보는데, 이상하게 지금 이런 그를 보니 뭔가가 떠오를 듯 말 듯했다. 기이하게도, 꼭 언젠가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악마의 화원에서 내 것 같지 않은 낯선 기억들을 봤던 것처럼, 한순간 착각처럼 또 생소한 장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지금 입은 것과 다른 옷을 걸치고, 한결 늦은 해 질 녘의 햇빛을 뒤집어쓴 체스휘가 테이블에 엎드려 잠든 것처럼 누워 있다가, 내가 다가가자 살며시 눈을 뜨고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장면이었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면서 무심코 움직인 손으로 체스휘의 눈가까지 가린 머리카락을 걷어 냈다. 반듯한 이마가 노출되면서 수려한 얼굴이 한결 환하게 드러났다. 나는 서늘히 뜬 눈을 가늘게 좁히고, 시야에 비친 얼굴을 뜯어보듯이 주시했다. 방금 한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영상과 좀 더 비슷한 머리 스타일이 되자, 왠지 연상되는 이미지가 한결 더 뚜렷해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기묘한 위화감만 들 뿐, 찰나에 스쳐 지나간 낯선 기억인지 환영인지 모를 광경이 반가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뭐지? 악마의 화원에 들어갔다가 나온 후유증으로 내가 또 헛걸 보는 건가? 아니면, 체스휘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내 기억을 조작하려고 들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내 의식이 없는 사이에 무슨 수작질을 해 놓은 건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의심에 그런 생각을 하자, 체스휘의 머리카락을 그러쥔 손에 뼈마디가 도드라질 정도로 세게 힘이 들어갔다.

그림자를 드리우며 줄곧 아래로 내리깔려 있던 금갈색 속눈썹이 천천히 위로 들어 올려진 건 바로 그때였다. 햇빛 아래에 드러난 요요한 보라색 눈이 나를 조용히 응시했다.

“…지금 뭐 해요?”

지금 막 깨어난 것치고는 잠기운이 하나도 묻어 있지 않은 눈동자였다. 살짝 잠긴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체스휘가 정말 자는 시늉을 하며 나를 속였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체스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눈매를 움찔 떨며 그의 머리카락을 쥐고 있던 손을 반사적으로 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체스휘는 곧바로 자신과 거리를 벌리는 나를 보다가, 이내 느릿한 손길로 헝클어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테이블에 엎드려 있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눈을 뜨자마자 앞머리를 쥐어뜯기는 건 내 예상에 없었는데.”

체스휘는 이 상황이 조금 어이없는 듯이 실소했다. 나도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으니, 체스휘가 황당함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체스휘의 얼굴은 여전히 서늘한 낯빛이었으나, 한때 폭발시켰던 감정들은 얼추 갈무리한 듯이 겉으로 내비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무표정한 차가운 얼굴로 자리에 기대앉아 어딘가 탐색하는 듯한 눈으로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다시 체스휘와 눈을 마주하면 나도 욱하는 마음에 그에게 거친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런 상황이 되니 예상과 달리 차분함을 유지하는 게 가능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체스휘의 얼굴을 보다가 그의 말에 싸늘히 반문했다.

“당신 얼굴을 보면 내가 어떻게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글쎄, 최소한 뺨 한쪽은 내줘야 할 줄 알았지.”

뺨을 얻어맞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그래도 자기가 한 잘못을 알긴 아나 보지?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내 침착함이 의외이기는 했다. 지금 이렇게 체스휘와 눈을 맞대자마자 그의 말대로 분노가 치밀어 주먹이 앞서 나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당장 뒤돌아서 자리를 떠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는 굉장히 이성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체스휘의 눈이 서서히 살짝 낮게 가라앉았다. 뒤이어 그의 시선이 아래로 미끄러지듯이 움직였다.

체스휘의 눈길이 닿은 곳은 손톱이 부러지고 살갗이 벗겨져서 붕대가 감긴 내 손가락이었다. 다음 순간, 체스휘가 나한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가락 끝에 미약한 온기가 닿자마자, 나는 반사적으로 체스휘의 손을 뿌리쳤다. 철썩! 하고 듣기만 해도 아플 것 같은 날카로운 파열음이 방 안을 채웠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었고, 생각보다 힘이 세게 들어가서 굉장히 큰 소리가 고막에 울렸다.

바로 그 순간 체스휘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그의 얼굴에서 우연히 목격한 찰나의 표정에 아, 하고 작게 탄식하고 말았다.

어째서인지 내가 실수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숨소리를 죽이며 얼얼한 손을 말아쥐었다. 악마의 화원에서 보았던 낯선 기억 속의 체스휘가 지금 마주한 그의 얼굴 위로 덧씌워졌다.

차라리 체스휘가 내 반응에 또 화를 내거나 빈정거렸으면 나도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 텐데, 저런 상처받은 듯한 표정에는 면역이 없어서 그런지 당혹감에 가슴이 술렁이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방금 그 찰나의 감정은 체스휘도 무심코 드러낸 것인 듯, 그는 금방 무감한 얼굴로 돌아가 내게서 순순히 손을 거두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충동적으로 움직여 그런 체스휘의 손을 먼저 덥석 붙잡았다.

그 순간 체스휘가 멈칫했고,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내 행동에 얼굴을 우거지상으로 구기고 말았다. 그런 나를 보며 체스휘가 표정 없는 건조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는데.”

너도 몰라? 나도 모르는데.

나는 여전히 어중간하게 체스휘의 손을 붙잡은 채, 환장할 것 같은 마음으로 이도 저도 못 하고 얼굴만 우그러뜨리고 있었다. 방금은 저절로 몸이 움직였던 거라, 나도 내 생각과 마음을 조리 있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체스휘에게 내키는 대로 화를 내자니, 자꾸 악마의 화원에서 본 기억 속의 원망 어린 얼굴이 떠올라서 마음이 약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일도 없었던 예전처럼 그를 편하고 친근하게 대하기에는, 이미 마음속에 거리감이 생겨나 있는 상태였다. 이번에 체스휘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었지만, 역시 심적인 거부감이 발목을 붙잡았다. 지금까지 나름대로 세상을 제법 단순하고 명쾌하게 살아왔던 나로서는, 이렇게까지 마음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적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도 지킬과 하이드의 두 얼굴이 있는 것처럼, 오만상으로 얼굴을 구기다가 애써 표정을 폈다가,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왠지 상태가 좀 이상하네.”

그렇게 오락가락하는 나를 한동안 가만히 지켜보던 체스휘가 입을 열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혹시 망가졌나? 아니야, 분명 제대로 고쳤는데.”

“…나 진짜 한번 죽었어?!”

체스휘는 말로 그렇다, 아니다, 답하지 않고 미묘하게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기분이 상해서 붙잡고 있던 그의 손을 내팽개쳤다.

역시 몹쓸 놈 아닌가? 악마의 화원에서 내가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는 기억하지 않지만, 진짜로 그 안에서 한번 죽을 때까지 날 안 구해 줬을 수도 있다고?

그나마 체스휘가 했던 말 중에 내가 바로 긍정할 수 있는 건, 어떤 원리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죽어도 복구가 가능한 린 도체스터의 몸이라 다행이라는 부분이었다. 그 덕분에 죽음에 어느 정도 무감각해진 탓인지, 한번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도 비교적 태연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체스휘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시도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이 정도로 죽는 것에 무감각해지는 것도 여러 가지로 위험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지금은 가뜩이나 속이 복잡해서 그런 생각까지 깊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나를 물끄러미 보던 체스휘가 다시 손을 움직여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나는 다시 속이 끓어오르려고 하던 상태라 반사적으로 또 그를 뿌리치려다가, 방금 체스휘가 지었던 표정을 상기하고 나도 모르게 한순간 멈칫했다.

그러는 사이에 몸이 그에게 끌려가서 앞으로 기울어졌다. 찰나의 순간 재빨리 다리에 힘을 주고 체스휘에게 붙잡히지 않은 팔을 움직여, 테이블을 손으로 짚고 버텼다. 하지만 체스휘가 내 발목을 구둣발로 툭 차서 몸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만행까지 벌이는 통에, 더는 힘을 줘서 버틸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앗, 하는 사이에 몸이 앞으로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넘어져서 바닥에 나동그라지기 전에 체스휘가 나를 붙잡았다. 허리에 단단히 휘감긴 팔이 나를 대번에 가까이 끌어당겼다.

나는 졸지에 체스휘의 다리 위에 앉혀져 익숙한 품에 갇힌 채 흠칫 몸을 굳혔다. 저절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싸늘한 목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이럴 분위기가 아니지 않았나?”

“어차피 이제 내가 뭘 해도 화낼 텐데, 그럴 바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야지.”

상상 이상의 뻔뻔함에 말문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체스휘는 태연한 목소리로 이런 어이없는 소리를 하더니, 정말 내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줘서 나를 더 바싹 끌어안으며 고개를 숙여 내 목덜미에 머리를 기대기까지 했다. 틈 하나 없을 정도로 몸이 밀착되면서 맞닿은 곳마다 온기가 스며들었다.

나는 굳게 다문 입술을 작게 꿈틀거렸다.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화가 나는데 화를 낼 수가 없고, 속이 답답한데 그걸 해소할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체스휘를 떼어 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마주 끌어안지도 못한 채, 그의 등 위에 어중간하게 멈춘 손으로 옷만 잡아 뜯을 듯이 세게 움켜잡았다. 속을 울컥이게 만드는 거부감에 그를 확 밀쳐 내고 싶기도 했고, 왠지 이대로 나한테 매달리는 남자를 보듬어 안아 주고 싶은 모순적인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내 이마에 새겨진 주름은 이제 너무 깊어져서 벌레도 끼어 죽일 수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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