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화원에서 보여 주는 환영은 누군가 내게 악의를 품고 있는 상황의 기억이라서, 내가 이번에 그곳에서 본 것들도 각각의 내용은 단편적이라 할 만했다. 물론 그 기억들이 나한테 입힌 충격의 크기는 몹시 컸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섣불리 뭔가를 단정 짓기에는 아직 일렀다.
그렇게 생각에 잠긴 채 복도를 걷다가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그때까지도 조용히 내 뒤를 따라오고 있던 사라로사를 뒤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세라는 멀쩡해요?”
내 물음에 사라로사는 잠깐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일단 궁금해서 묻기는 했지만, 이번에도 사라로사가 대답해 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그녀는 비교적 쉽게 입을 열었다.
“네, 제가 알기로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 또한 뜻밖이었다. 다른 시간대의 레드포드 저택으로 나를 직접 찾으러 오기까지 했던 체스휘이니, 당연히 내가 세라의 도움을 받았던 것도 알고 있으리라 여겨졌다. 지금 사라로사의 반응만 봐도, 내 질문에 뭔가 짚이는 게 있는 것이 분명했고 말이다.
더군다나 이번에 체스휘는 나한테 굉장히 화가 나지 않았던가? 그러니 지난번에 나와 부딪혔던 다른 고용인을 저택에서 흔적도 없이 제거해 버렸던 것처럼, 세라도 그사이에 눈앞에서 치워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그동안 세라에게는 변고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사라로사의 말을 듣고 멈췄던 걸음을 다시 뗐다. 사라로사도 또 말없이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방에서부터 뒤따라오던 고양이들은 도중에 다른 일에 흥미가 동했는지,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이틀 전 밤에, 이곳을 떠나려고 하셨어요?”
그런데 잠시 후, 줄곧 조용하던 뒤쪽에서 사라로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의 사라로사가 메이드로서의 업무가 아닌 이런 사적인 일 때문에 나한테 먼저 말을 건넨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다시 멈춰 서서 그녀를 뒤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주인님의 반응을 보니 왠지 그런 것 같아서요.”
사라로사는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차분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혹시 저택의 주인이 미쳐서, 매번 다른 여자를 데려와 이미 죽은 여주인의 대역으로 삼는다는 소문 때문에요? 그 소문을 믿으세요?”
원래 내가 아는 사라로사가 나한테 이것저것 수다를 떠는 건 익숙했지만, 이 사라로사가 이렇게 말을 길게 하는 건 처음 봤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착실하게 선을 지키던 것과 달리, 그녀가 무심한 어조로 내뱉은 말의 내용은 상당히 노골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바로 반응을 내보이지 못했다.
“어느 쪽이든, 이번에는 벌써 떠나려고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사라로사는 내가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이, 혼자 말을 이었다.
“물론 누가 붙잡아도 언젠가는 가시겠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이곳에 오래 계시기를 바라고 있어요.”
다시 눈을 뜨자마자 의외라고 느낀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는데, 거기에 사라로사도 한몫 보탰다.
“갑자기 뭐예요?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왜 그런 말을 하는 건데요?”
그동안 고용인으로서만 나를 대할 뿐, 뭔 일이 아니면 내가 옆에 있든 말든 상관없는 것처럼 서먹하게 굴던 사라로사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자 위화감이 들었다. 조금은 황망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더군다나 내가 악마의 화원에서 그런 이상한 걸 보자마자 사라로사까지 한 발 거들어 이런 말을 한다고? 혹시 체스휘가 나를 회유할 작정으로 그녀에게 뭔가 언질을 준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라로사는 내 불신과 의혹을 정면에서 마주하면서도, 여전히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왠지 눈빛이 좀 달라져서요. 최소한 이틀 전까지처럼 아무것도 모르시는 건 아닌 것 같아서.”
“…….”
뒤이은 사라로사의 목소리도 그 내용에 비해 지나치게 차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른 고용인들은 모르는 것 같지만요. 저는 여주인님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예전의 그 사람인 걸 알아요.”
사라로사가 내가 체스휘의 옆을 떠나려 한 게 ‘이틀 전 밤’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 후 악마의 화원에 들어갔다가 나온 지 하루가 지난 게 분명했다. 만약 어제 사라로사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면, 황당한 소리 하지 말라고 일침을 놨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나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앞에 있는 사라로사의 얼굴을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어차피 이곳을 나가셔도, 나중에 다른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실 거잖아요.”
체스휘에게 처음 이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렇고, 악마의 화원에서 그의 말과 정말 연관이 있는 환영을 봤을 때는 동요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제삼자나 다름없는 사라로사의 입으로도 이런 얘기를 들으니, 오히려 마음이 한결 침착해지는 기분이었다.
“이것도 잊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공허에 먹혔던 세계의 시간 선이 분리되면서 이 레드포드 저택도 무수히 많이 쪼개졌지요. 그중에서도 여기는 시간이 멈춘 저택이니까, 사실 여주인님이 다시 돌아오실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하지만 솔직히… 매번 기다림에 비해 머무시는 시간이 너무 짧은 것 같아요. 다른 고용인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저는 여주인님이 계실 때가 더 좋거든요.”
사라로사의 귀여운 얼굴에는 여전히 나를 향한 반가움이나 친밀감 같은 감정은 어려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라로사가 지금 나한테 빈말을 지어내는 것 같지도 않았으니, 희한한 일이었다.
나는 가만히 사라로사를 마주 보다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어, 어쩌면 시답잖다고 할지 모를 것을 그녀에게 지나가듯이 물었다.
“사라로사, 예전의 나하고는 사이가 좋았어요?”
“그런 편이었죠.”
“그런데 이번에 만났을 때는 왜 이렇게 서먹하게 굴었어요?”
“이제는 여기에 오래 계시지 않을 걸 아는걸요.”
“…….”
“어차피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떠나실 걸 아니까 저도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싶지 않아요.”
이번에도 내가 들은 말에 어떤 반응도 가볍게 내보일 수 없었다. 사라로사도 여전히 내게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듯이 입을 다물고 처음과 같은 고요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기만 했다. 이곳이 수많은 레드포드 저택 중에서도 시간이 멈춘 공간이라고 하더니,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라로사는 여전히 젊고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는데도 정말 어딘가 낡고 마모되어 보였다.
나는 사라로사와 그렇게 얼마간 시선을 맞대다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몸을 돌렸다. 다시 아까와 같은 조용한 발걸음이 이어졌다.
지금 나는 목적 없이 그냥 걷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사라로사에게 내가 찾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고 따로 묻지는 않았다. 이상한 일이지만, 굳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긴 나 혼자 들어갈게요.”
그리고 내 생각이 맞았다. 잠시 후, 사라로사를 문 앞에 두고 내가 들어선 방 안에 체스휘가 있었다.
헝클어진 금갈색 머리카락이 창문에서 쏟아지는 햇빛에 반짝반짝 빛났다. 그의 눈동자는 아래로 내리깔린 눈꺼풀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느슨히 엎드린 남자의 몸은 내 방문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미동이 없었다. 나는 흔들리는 반투명한 하얀 커튼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가 다시 시야에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체스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에게 다가갔다.
조금은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체스휘는 내가 이렇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모르고 잠이 든 것 같았다. 그동안 밤에도 그가 자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퍽 놀라운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혹시 그제 있었던 일 때문에 내 얼굴을 보는 게 껄끄러워서 자는 척을 하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평소에 보던 체스휘의 뻔뻔함이나, 그제 나를 향했던 그의 강렬한 감정을 생각해 보면 그가 굳이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굳은 얼굴을 한 채 숨소리를 죽이고, 내 앞에 있는 남자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사실 나도 내가 왜 지금 그를 보러 온 건지, 이유를 몰랐다. 차라리 체스휘가 나를 내버려 두고 있을 때 다시 이곳을 탈출하려고 시도하는 게 현명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체스휘가 내게 화가 났던 것처럼, 나 역시 그에게 분노한 상태였다. 체스휘는 나를 악마의 화원에 데려가 그곳에 내동댕이치고는, 정말 혼자 버리고 사라졌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는 정말 어제 그곳에서 한번 죽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의식을 잃었다가 눈을 뜬 이후로, 마음속의 첨예한 분노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 버렸다. 지금 이렇게 체스휘를 눈에 담은 이후로는, 더군다나 가슴 밑바닥에 깔려 있던 희미한 분노의 잔해마저 바스러져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문득, 악마의 화원에서 봤던 장면이 다시 한번 눈앞에 어른어른 떠올랐다.
체스휘가 나를 증오하고 원망하며 나한테 손을 뻗는 기억이 특히 뇌리에 박힌 것처럼 선명했다. 꼭 그가 예전에 나를 죽이기라도 한 것 같은 장면이었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완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만큼 작은 파편 하나만 보고 단순히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때 그런 장면을 보았으면 본능적으로 공포나 두려움을 느낄 만한데도, 지금 내가 체스휘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반짝이는 속눈썹을 아래로 드리운 채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남자를 계속 굳은 얼굴로 내려다보다가 손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