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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263)화 (263/300)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서늘한 울림을 가진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시야가 깜깜한 가운데서도 가까이에 있는 남자의 얼굴만큼은 두 눈에 박힐 듯이 또렷이 비쳤다.

“이번에도 이런 식일 줄 알았다고. 이제는 지겨울 지경이야.”

이것 역시 이상한 기억이었다. 분명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내가 알고 있는 체스휘인데, 그는 나로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을 하고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말을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와 마주한 체스휘의 얼굴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묻어 있었다. 단순히 붉은 액체가 튄 듯한 모양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문지른 것처럼 뺨에서 턱까지 붉은 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 상태로 체스휘는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돌리고, 작게 벌린 입술 사이로 실소하듯이 얕은 숨결을 내뱉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내 쪽으로 돌려진 그의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알아? 당신 정말 최악이야.”

이 낯선 기억 속의 체스휘는 아까 악마의 화원을 떠나기 직전에 나한테 보여 준 것보다 훨씬 더 화가 난 것 같았다. 싸늘하다 못해 반대로 뜨겁게까지 한 눈빛이 나를 조각낼 듯이 응시했다.

“지독해도 이렇게 지독할 수가 없어. 당신은 특히 나한테만 늘 그렇게 잔인하지.”

저 눈에 담긴 감정은 도대체 뭘까?

타오를 듯이 강렬한 증오 같기도 했고,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원망 같기도 했다. 아니, 아니다. 굳이 어느 하나를 콕 집어 말할 것도 없이, 체스휘의 두 눈에는 그것들을 포함한 온갖 감정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체스휘는 그렇게 거칠게 요동치는 눈으로 나를 보다가 이내 얼굴을 한결 더 무참하게 구기며 시리게 웃었다.

“그래. 그렇게 죽고 싶다면 그 소원, 내가 들어주지.”

그리고 체스휘가 내게 손을 뻗었다.

“우읍…!”

갑자기 너무 많은 게 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토악질이 나왔다. 몸 안의 장기까지 모조리 뱉어 낼 듯이 헛구역질을 했다. 지금 내가 본 사람은 기억에 기반한 환영일 뿐, 실제로 형체가 있지 않다는 걸 아는데도 동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드넓은 바다 한가운데에 떨어져 심해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으로 허우적거렸다. 꼭 여러 기억이 뒤섞여 내 안에 강제로 구겨 넣어졌다가, 다시 내 몸속을 엉망으로 헤집은 뒤에 억지로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 같은 끔찍한 느낌이 들었다. 마른 땅바닥 위에서 혼자 몸이 뒤집힌 거북이처럼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분명 손발이 몸에 제대로 붙어 있는데, 내 몸이 도무지 내 것 같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런 부자유 속에서 오감만이 날카롭게 벼려진 것처럼 예민하게 곤두섰다. 그러던 어느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이 새하얗게 뒤덮이듯이 무서울 정도로 잠잠해졌다.

내가 정말 죽은 건지, 아니면 단순히 홍수처럼 쏟아지는 외부의 자극과 내부의 혼란을 견디지 못해 의식을 잃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혹은 악마의 화원에 들어왔다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다고 했듯이, 나도 이곳에 꽃의 모양으로 뿌리내린 삿된 혼 덩어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도 아니면 나는 아직 죽지 않고 미쳐 가는 상태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모든 감각이 고요하게 차단된 상태에서, 내 몸을 뒤덮었던 꽃잎과 이파리가 아닌 다른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조심스럽게 와 닿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나를 쓰다듬는 듯한 익숙한 느낌에 이끌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직 머릿속이 맑지 못해 생각은 느리게 흘러갔고, 오랫동안 빛이 차단되어 있던 시야는 또렷하지 못했다. 그 아득한 적막감 속에서 매몰차게 나를 버리고 갔던 남자의 얼굴이 가물가물하게 두 눈에 비쳤다.

마지막으로 눈을 감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나는 축축한 흙냄새가 물씬 올라오는 짙은 안개 속에 있었는데, 도대체 언제 다시 침실로 돌아온 건지 지금은 깨끗하고 보송한 하얀 이불을 덮고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나는 아까처럼 침대맡에 걸터앉아 내 얼굴을 천천히 어루만지는 남자의 모습을 초점이 흐린 눈으로 응시했다.

여전히 나를 향한 그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지만, 아까만큼의 분노와 비정함은 그 안에 담겨 있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비록 얼굴은 웃음기 없이 무표정하긴 해도, 지금의 그는 내게 상냥한 체스휘 쪽인 것 같았다.

그 증거로, 나를 악마의 화원에 데려가 내팽개칠 때와 달리 지금 나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은 부드럽기만 했다. 무슨 지킬과 하이드도 아니고, 내심 ‘지금 병 주고 약 주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애초에 입술을 벙긋거릴 정도의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기도 했다.

나는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나를 말 없이 응시하는 남자를 마찬가지로 얼마간 조용히 마주하다가 스르륵 눈꺼풀을 내렸다.

그 이후 내가 다시 의식을 되찾았을 때, 침실에는 나 혼자밖에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창밖에는 오후의 짙은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침대 위에서 혼자 눈을 뜬 뒤,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부터 아무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더니, 역시 방 어디에도 체스휘는 없는 것 같았다. 그가 언제 자리를 떠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잠든 이후로 몇 분, 혹은 몇 시간 정도의 아주 짧은 순간만 지나간 것 같기도 했고, 하루나 이틀, 혹은 며칠처럼 한참이나 오랜 시간이 지나간 것 같기도 했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었나 싶을 정도로, 나를 둘러싼 방 안의 분위기는 지극히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한순간 혹시 내가 잠들기 전에 겪었던 일들이 모두 꿈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악마의 화원에서 있었던 일도, 의식을 잃었다가 잠깐 눈을 떴을 때 체스휘를 본 것도 말이다. 만약 흙바닥을 뒹굴어 더러워진 내 옷이 그새 깨끗한 새것으로 갈아입혀지고, 바닥을 긁은 손톱이 엉망으로 부러져 있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면, 정말 이 모든 게 꿈이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치료를 해 준 듯이 다친 손가락마다 붕대가 감겨 있는 게 보였는데, 아직도 손끝이 알싸하게 쓰려왔다.

먀옹!

그때, 문밖에서 작은 동물이 우는 듯한 가느다란 소리가 들렸다. 손톱으로 벅벅 문을 긁는 것 같은 소리도 뒤따랐다. 그러다가 잠시 후, 문이 작게 열렸다. 나는 그 좁은 틈으로 하얗고 노란 작은 털 뭉치들이 들어오는 걸 지켜보았다.

다이안과 미뉴엘의 이름을 가진 고양이들이 나를 보고 야옹야옹 울면서 빠르게 다가와 침대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나는 또다시 조용히 닫힌 문을 쳐다보다가, 내게 다가와 치대기 시작한 고양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특히 하얀 털을 가진 고양이는 촉촉한 커다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면서 쓰다듬어 달라고 조르듯이 계속 내 손 아래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손을 움직여 고양이가 원하는 대로 해 주고 말았다. 하지만 여전히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잠깐 고양이의 집사 노릇을 하다가, 결국은 침대 위에서 일어나 문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뒤에서 고양이들의 불만 어린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그냥 내버려 두고 앞에 있는 문고리를 돌렸다.

“일어나셨네요, 린 님.”

밖을 슬쩍 내다보자마자 눈에 익은 메이드의 얼굴이 보였다. 사라로사는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다가 내가 문을 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혹시 시장하시면 간단히 요기하실 만한 걸 안으로 들일까요?”

“아니, 필요 없어요.”

조금 전에 고양이들이 방으로 들어올 수 있게 문을 열어 준 사람도 사라로사인 듯했다. 체스휘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표정한 사라로사의 얼굴을 보는 게 반가운 것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사라로사가 이렇게 방문 앞을 떡 하니 지키고 서 있는 모습이 탐탁지 않았다.

“혹시 체스휘가 나를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라고 했어요?”

“되도록 방에 계시라고는 하셨습니다.”

나를 방에 가두라는 명령까지는 없었다는 말이로군.

나는 사라로사를 지나쳐 복도로 나갔다. 사라로사는 그런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내 뒤를 따라왔다. 방에서 빠져나온 고양이들도 사라로사의 뒤를 이어 우리를 쫓아와서, 어쩌다 보니 나를 선두로 한 간소한 행렬이 만들어졌다. 나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햇빛이 내리비치는 복도를 걸어갔다.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체스휘가 나를 감금하지 않은 것은 좀 의외라고 할 만했다. 악마의 화원에 들어갈 때까지도 단단히 화가 난 듯하던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당장 나를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묶어 둬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그러다 문득, 또 악마의 화원에서 본 연쇄적인 기억들이 어렴풋이 떠올라 속이 좋지 않아졌다.

분명 내 것이 아니지만, 어째서인지 내 머릿속에서 불시에 튀어나온 그 낯선 기억들…. 악마의 화원이 내게 보여 준 그것들은 도대체 뭐였을까?

이전까지는 악마의 화원에 들어가도 이하린으로서의 과거만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던 이유는, 지금까지와 달리 정말 죽음 직전에 이른 상태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무의식에 묻혀 있던 잔해물이 수면 위로 불쑥 올라온 게 아닐까 싶었지만, 만약 그렇다면 내가 본 것들은 정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잊고 있던 기억들이 맞는다는 뜻이 된다.

그런 생각을 하자 또 속이 울렁거려서 헛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토악질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을 애써 가라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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