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순간, 체스휘의 손이 다시금 나한테 뻗어졌다. 아차 할 새도 없이 체스휘에 의해 몸이 번쩍 들렸다.
지금까지도 체스휘가 은근히 제멋대로라거나, 특히 미카엘의 경우는 가끔 행동이 강압적이라고 느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건 진짜 거친 축에도 속하지 못했다. 지금 침대 위에 있는 내 팔을 움켜잡아 확 끌어당긴 손길도, 나를 짐 덩이처럼 들어 올려 어깨에 짊어진 뒤 움직이지 못하게 허리를 옥죄는 팔의 움직임도 하나같이 거칠기 짝이 없었다.
아까 처음 눈을 뜬 직후에만 해도, 체스휘는 지금처럼 내게 화가 난 상태이면서도 나를 향한 나름대로의 배려심은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제대로 심사가 뒤틀렸는지, 지금의 그에게서는 그런 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딜 가는 거예요? 당장 내려놔! 당장 내려놓으라니까…!”
체스휘의 돌발적인 행동에 나는 마구 버둥거리며 그의 몸에 주먹질과 발길질을 했다. 그러나 체스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짊어진 채 방에서 빠져나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갔다.
내가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데도 우리를 살펴보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텅 빈 복도에는 스산한 공기만 들어차, 오직 내 목소리만 메아리치며 울릴 뿐이었다. 아예 저택 전체에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는 것처럼, 체스휘와 내가 계단을 내려가 건물을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눈에 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기야, 이곳의 고용인들이 당장 내 눈앞에 나타나 얼쩡거려 봤자, 어차피 그들은 체스휘의 명령만 듣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그 사람들이 있어도 내게 도움이 될 리는 만무했다.
“그래도 이번 몸은 제법 잘 골랐어.”
체스휘는 가뜩이나 인적이 없는 저택 안에서도 안개가 자욱하게 낀 으슥한 곳에 다다라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번에도 조심성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나를 바닥에 거의 떨어뜨리는 듯한 매정한 손길이었다. 나는 바닥에 나동그라져 윽, 하고 작게 신음했다.
“한 번 죽는다고 완전히 끝나는 게 아니라, 여러 번 다시 사용하는 게 가능하니까.”
체스휘는 원래 나를 어디론가 데려갈 때 늘 깨지기 쉬운 유리 조각을 들듯이 조심스럽게 안아서 옮기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라도 너무 달라서, 바닥에 부딪힌 엉덩이가 아니라 가슴 언저리가 뜨끔거리는 것 같았다. 나를 서늘히 내려다보며 체스휘가 내뱉은 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오늘 한 번 정도 더 죽어도, 아무 상관없겠지.”
바닥에 쓰러진 채 고개를 들자, 뿌연 안개 속에서 다가오는 검은 형체들이 보였다.
“걱정 마요, 린 씨. 죽으면 다시 멀쩡하게 고쳐 줄게.”
체스휘는 마지막까지 냉혹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천천히 뒷걸음쳐 내게서 멀어졌다. 나는 그의 모습이 거대한 식물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형언하기 어려운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왜 너만 살았니?”
“나는 더 이상 네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그러니까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하린아.”
금방 이하린일 때의 기억이 밀려들었다. 악마의 화원에 올 때마다 늘 보던 과거의 단면이었다. 순식간에 몸에서 힘이 쭉 빠지며 의식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거듭 울리는 목소리에, 기력이 빨려 나가는 느낌이 들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가 이 악마의 화원에 들어온 건 지금이 네 번째였다. 처음 두 번은 체스휘가 와서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고, 세 번째에는 미카엘이 구해 줬었다. 하지만 이번에 나를 이곳에 데려온 건 다름 아닌 체스휘였고, 그는 조금 전에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러니 분명 나를 여기서 꺼내 주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일 것이다.
어느새 잎사귀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들릴 정도로 거대한 꽃들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검은 그림자들이 사방에서 나에게 덮쳐들었다. 어디선가 소리 없이 뱀처럼 미끄러져 기어 온 넝쿨들이 발목을 타고 기어올라 내 몸까지 휘감았다. 그러고는 먹잇감을 삼키듯이 나를 앞다투어 끌어당겼다.
그들은 나를 화원 깊은 곳으로 데려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몸이 바닥을 끌며 지이익 뒤로 미끄러졌다. 위기감에 뭐라도 붙잡으려고 팔을 뻗었지만, 손에 잡히는 건 흙과 잔디뿐이었다. 결국은 손톱으로 바닥만 긁으며 다시 안개 속으로 끌려갔다.
이대로 악마의 화원에 갇혀 정기를 모두 빼앗기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일전에 이것들과 똑같은 괴물 꽃이 된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은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내가 그런 광경을 목격하거나 그런 경험을 직접 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자세한 건 알지 못했다. 다만 그동안 이 안에 들어왔던 사람들이 멀쩡히 밖으로 나오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만 알았다.
하지만 그들의 최후가 어찌 되었든 간에, 이 안에 들어온 사람은 십중팔구 미치고 말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야 특수한 경우라 이곳에서 보는 옛 기억에 대한 반가움과 그리움의 감정이 있다고 쳐도, 보통은 자신을 향한 누군가의 악의 섞인 기억을 마주하는 일에 태연할 수 없을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지난번에 엠버의 몸으로 이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는, 나를 버리고 떠나려 하는 미카엘에게 돌을 집어 던져 그를 가지 못하게 막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가 아무리 목이 터져라 불러도 체스휘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이미 확신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의 오기가 생기기도 했다. 체스휘가 나한테 정확히 무엇을 바라는지는 몰라도, 그가 나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는 자신의 말이 맞는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체스휘의 말대로 린 도체스터의 육신은 특이했다. 그래서 일정 횟수에 다다를 때까지는 몇 번이고 죽어도 다시 복구해 되살아날 수 있는 모양이니, 설령 그가 남긴 매몰찬 말대로 정말 여기에서 죽는다고 해도 절망하거나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 오히려 나야말로, 이를 악물고 버텨 체스휘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기도 했다.
꽃들이 소름 끼치게 사부작거리며 내 몸에 달라붙었다. 점점 더 머리가 흐려지고, 그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기억도 많아졌다. 이제는 이하린일 때의 기억뿐만이 아니라, 린 도체스터와 엠버 그린로스로 있는 동안에 누군가의 악의를 받았던 기억들까지 연달아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된 건, 조금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체스휘의 냉담한 얼굴은 악마의 화원이 보여 주는 기억에 속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유페미아예요.”
‘어…?’
그런데 어째서일까? 어느 순간, 갑자기 내가 알지 못하는 낯선 기억이 수면 아래에서 떠올랐다.
“편하게 미아라고 불러 주세요. 오늘부터 도련님들의 가정교사로 일하게 되었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가 낯선 반면, 눈앞에 떠오른 광경은 내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햇빛이 내리비치는 다이안의 방. 이 상황은 아무래도 메이드장 제인에게 안내받아, 다이안과 첫인사를 나눈 장면인 듯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스스로를 린 도체스터가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소개했다. 분명 지금까지 내가 이 게임을 하면서 캐릭터 명을 바꾼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도.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다이안의 방에 함께 있던 제인이 모로스로 변해 나를 공격했다. 아무래도 모로스의 살의 때문에 이 장면도 악마의 화원이 보여 주는 기억에 포함된 것 같았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우산으로 제인을 후려친 뒤, 뾰족한 우산 꼭지로 그녀의 급소를 관통해 죽였다.
그렇게 빠르게 몸을 움직이는 동안, 시야에 낯선 갈색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것 역시 해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방금 내 입에서 나온 이름이 린 도체스터가 아니었던 것도 그렇고, 시야에 비친 내 머리카락이 보라색이 아니라 갈색인 것도 도무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기억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미아라는 이름을 가진 가정 교사에 이어, 삿된 기운이 감도는 레드포드 저택을 정화하러 파견된 성직자, 저택 안의 모로스와 악령들을 처치해 달라는 의뢰를 받아 온 악마 사냥꾼, 콘라드의 파업 때문에 임시로 그 자리를 꿰찬 치료사….
그 밖에도 셀 수도 없이 많은 다양한 직업과 이름을 가진 낯선 사람들이 되어, 내가 모로스를 상대하고 저택에서 생활하는 듯한 광경들이 연이어 나왔다. 한번은 악마 사냥꾼으로 있을 때 메이드 멜로디아와 싸우는 듯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창가에 비친 내 얼굴을 언뜻 보니 부스스한 검은 머리칼에 음울한 회색 눈을 가진, 어떻게 뜯어봐도 확실히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었다.
도대체 지금 내가 본 것들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내가 엠버의 몸에 들어갔던 것처럼, 전에도 지하실의 문을 이용하다가 다른 사람의 몸을 잠깐 빌린 적이 있었던 건가? 그런데 그동안 왜 이런 기억이 감쪽같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 있던 거지?
기이하게도, 지금 떠오른 기억 중에는 이곳처럼 양육자가 없는 레드포드 저택을 배경으로 한 것도 존재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것과 비슷한 점도 있었다.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마리네즈나 멜로디아처럼 나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들과는 여전히 서먹한 관계를 유지했고, 사라로사처럼 사이가 좋았던 사람과는 언제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혼란에 빠져 있던 내 앞에 마침내 체스휘가 나타났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진짜 체스휘가 내 앞에 나타난 게 아니라 체스휘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