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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261)화 (261/300)

“1년 전의 저택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신도 알지? 이미 겪었던 일이니까.”

“알지. 거기에 가서 당신이 뭘 했는지.”

체스휘는 내 말에 입매를 비스듬히 비틀고, 조금은 조소하듯이 차갑게 웃었다.

“방금 말한 대로, 당신이 만난 게 과거의 나였으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기분이 더러운데도 이번에는 건드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고 온 거지.”

‘이번에는’이라고? 왠지 체스휘의 말이 중간에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사소한 건 굳이 따지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당신이 그랬지? 나한테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런 말이야말로 거짓말이야. 예전에도 안 믿긴 했는데, 지금은 더더군다나 신뢰성이 없어. 사실은 날 속인 적도 많고, 나한테 숨긴 것도 많잖아.”

“내가 뭘 속이고 숨겼는데?”

체스휘는 이런 상황이 되어서도 태연하고 침착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내 말에 조용히 반문했다. 나는 울컥하는 마음을 더 참지 못하고, 앞에 있는 남자의 멱살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내 진짜 이름, 뭔지 알고 있지?”

서로의 숨이 느껴질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졌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느끼는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감은 이보다 훨씬 멀었다.

“과거의 미카엘이 알던 걸, 지금의 당신이 모를 리가 없잖아.”

얼어붙은 냉연한 눈동자가 내 얼굴을 한참이나 말없이 주시했다. 지금까지 내게 숨기고 있던 게 들통나서 할 말을 잃은 건 아닌 것 같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저 한없이 차갑고 또 고요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체스휘가 여전히 시린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그래, 이하린. 당신은 미카엘 카드리고의 심보가 고약하다고 했지만, 적어도 예전의 나는 당신한테만큼은 제법 상냥한 사람이었어.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고, 알고 있는 걸 혼자 떠안을 정도로는 말이야.”

과거의 미카엘이 아닌 현재의 체스휘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내 이름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과거의 미카엘은 내가 아무리 물어도 자신이 아는 걸 내게 전부 알려 주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비밀이 많은 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남자도 마찬가지였지만, 왠지 이번에는 좀 다른 것 같았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이번에는 그냥 나쁜 짓을 좀 해 볼까 싶으니까….”

체스휘는 내 질문에 더 이상 침묵하거나 말을 돌리지 않고, 뭔가를 얘기해 줄 것 같은 느낌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궁금한 게 많다니, 내가 먼저 하나만 확인할까?”

이른 오전의 새하얀 햇살이 체스휘의 입가에 걸린 파르스름한 시린 미소 위로 내리비쳤다.

“이번이 게임에 들어온 이하린이 처음으로 맞이한 44회차, 맞나?”

역시 그는 내가 게임에 빙의해 린 도체스터가 된 걸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은 이미 과거의 미카엘을 만나 나도 알고 있던 것이지만, 이렇게 44회차니 하는 구체적인 내용까지 그의 입으로 듣게 되자 적잖이 동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체스휘의 말에 바로 반응하지 못했으나, 그는 내 얼굴을 보고 대답을 유추한 것 같았다.

“그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군.”

가까이에서 마주하고 있던 체스휘의 두 눈에 섬광 같은 날카로운 이채가 한순간 스쳐 지나갔다. 그의 입술에서 여트막한 실소가 새어 나와 내 얼굴을 간질였다.

“그럼 내가 알려 줄게.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진실이란 게 얼마나 얄팍한지.”

차갑던 체스휘의 목소리가 조금이지만 한결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그 안에는 정확히 형언하기 어려운, 나로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내재해 있었다. 어째서인지 일순간 본능적인 거부감이 고개를 들어 나를 조금 망설여지게 했다.

여태껏 어떻게든 체스휘를 동요하게 만들고 또 그의 입을 열게 만들고 싶어 안달했던 주제에, 왜인지 지금은 뒤이을 말을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입술을 벌렸다. 하지만 내가 체스휘를 막는 것보다, 그가 말을 잇는 것이 더 빨랐다.

“당신은 게임에 들어와서 지금 44회차를 처음 진행하고 있는 게 아니야.”

체스휘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내가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던 것에 비하면 지나치리만큼 평온하고 태연했다. 어떤 감정도 그 안에 깃들지 않은 것처럼, 언뜻 굉장히 건조하고 무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인가? 그의 말은 내 귀에 굉장히 이상하게 들렸다. 분명히 내가 알고 있는 쉬운 단어의 조합인데도, 내용이 생소하고 낯설어서 의미를 바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 들은 말을 머릿속으로 곱씹으며 몰이해한 눈으로 체스휘를 쳐다보자, 그가 다시금 메마른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하린은 빌어먹을 게임 속에 들어와서 이미 그 44회차를 수십 번, 수백 번 정도 반복했지.”

“뭐?”

“당신이 내 앞에서 죽은 것도 그 정도쯤 되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을 내가 찾아낸 횟수도 비슷하다고 하면 이해가 되나?”

체스휘가 한 말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완전히 인지하는 것보다, 몸에 한기가 밀려드는 게 먼저였다. 나는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고 내 앞에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눈을 깜빡이는 건 고사하고, 내가 잠깐 숨을 멈춘 것마저 깨닫지 못했다. 체스휘는 굳은 듯이 움직이지 않고 있는 나를 여전히 차가운 두 눈에 담아내고 있었다. 소리 없이 팔을 움직인 그가 내 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듯이 툭 건드렸다.

“만약 이번에도 이 몸이 한계에 달해 완전히 죽게 되면 당신의 영혼은 또다시 공허 속에 빨려 들어가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을 헤매게 될 거야. 그러다가 다시 어느 육신에 정착하게 된 뒤에는, 그전까지 이 저택에서 있었던 일 같은 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겠지.”

지금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체스휘의 속삭임이 내 안까지 스며들어 와 검은 독을 퍼트리는 것 같았다. 미처 인식하지 못한 새, 체스휘의 옷깃을 움켜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그래도 체스휘는 뒤로 물러나지 않아서, 우리의 거리는 변함없이 가까웠다. 아니, 오히려 체스휘는 얼굴을 앞으로 기울여, 내게 좀 더 바싹 다가들었다.

“그래, 내가 뭘 숨기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일말의 실소조차 씻은 듯이 지워 낸 남자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찼다. 더없이 냉혹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직시하며 그가 뱉어 낸 잔인한 속삭임이 연거푸 내 안을 파고들었다.

“내가 당신을 찾아서 얼마나 오랫동안 이 빌어먹을 저택에 갇혀, 그 안을 돌고 또 돌면서 헤맸는지 같은 거?”

무심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갑자기 쏟아져 내리는 소나기처럼 쉬지 않고 밀어닥치는 말을 전부 온전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이번에도 수십 년인지, 수백 년인지, 그 이상인지 모를 시간 동안 기다려서 겨우 이 몸 안에 들어온 당신을 만나게 된 거?”

어쩌면 내가 아직 체스휘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제야 비로소 어렴풋이 깨달았다.

“아니면 당신이 이번에 만나고 온 1년 전의 내가, 사실 나한테는 이미 햇수조차 셀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오래된 과거라는 거? 그런 게 궁금했어?”

체스휘의 입에서 흘러나온 냉소가 섞인 나지막한 웃음이 내 머리를 굳게 만들고, 심장까지 한기를 퍼트려 얼게 했다.

“당신이 우습냐고? 아니, 우스운 건 나지.”

내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 체스휘의 두 눈은, 몹시도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을 그 안에 품은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금방이라도 더욱 거세게 부풀어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당신이야말로 내가 우스웠던 거지. 그 긴 시간 동안 옆에 같이 있었는데도, 당신은 한 번도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선택한 적 없어. 매번 나만 두고 죽고, 죽고, 또 죽고.”

지그시 다물린 체스휘의 잇새로 억눌린 음성이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리고 나는, 그때마다 혼자 기약 없는 시간을 보내면서 또다시 어디에 있는지 모를 당신을 찾아다니고.”

씹어뱉듯이 읊조린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간단히 정의 내릴 수 없는 압도적이고도 강렬한 감정이 질척하게 묻어나 나를 질식시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체스휘에게서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는 것들을 무방비하게 뒤집어쓰다가, 가까스로 굳은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정말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체스휘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찌를 듯이 주시하며 내뱉은 서늘한 반문을 들은 순간, 거기에 목구멍이 꽉 틀어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더 이상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입 안이 바짝 메마르다 못해 목이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창문에서 스미는 햇살이 이토록 눈부신데, 어째서인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음물에 담그기라도 한 것처럼 뼈가 시린 느낌이 들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내 말이 거짓말이고, 내가 또 당신을 속이는 걸 수도 있겠지.”

체스휘는 굶주린 짐승처럼 그의 안에서 위험하게 들썩이고 있는 감정을 내 앞에서 폭발시키지 않았다. 내게 품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이는 강렬한 분노도 지금 바로 내게 쏟아 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내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이 담담하게 반응하며, 입술 끝을 가볍게 당겨 엷은 미소를 지었다. 언뜻, 내가 알고 있는 체스휘가 그동안 내 앞에서 자주 보여 줬던 것 같은 부드럽고 다정한 느낌의 미소가 시야에 번졌다.

“그럼 한번 확인해 볼까.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인지.”

하지만 뒤이어 내 귓가에 떨어진 음성은 냉혹했고, 잇따른 그의 행동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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