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260)화 (260/300)

나는 열이 오른 얼굴로 거친 숨을 씩씩거리며 체스휘를 노려봤다. 그는 한참이나 나를 도마 위의 생선처럼 앞에 두고 양껏 괴롭히더니, 이제야 조금 만족한 것 같았다. 겨우 숨을 돌릴 틈이 생기자마자 나는 얼른 침대 가장자리에 달라붙어 체스휘와 거리를 벌렸다.

“…가까이 오지 마! 다시 손대면 걷어차 버릴 거예요! 나 농담하는 거 아니야!”

혹여나 체스휘가 다시 나를 건드릴세라, 경계심이 잔뜩 어린 목소리로 엄포를 놓으며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서둘러 추슬렀다. 체스휘는 그런 나를 꼭 헛수고하는 사람 보듯이 미미하게 웃는 얼굴로 쳐다봤지만, 그래도 방해하지는 않았다.

“억울하네. 꼭 내가 못 할 짓이라도 한 것처럼 그래.”

“맞잖아! 내가 그만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그런 것치고는 많이 좋아하던데요.”

“뭐? 내가 언제!”

“이 정도면 내가 벌이 아니라 상을 줬다고 해도 되겠던데….”

“그 입, 드믈르그.”

내가 이를 악물고 눈을 사납게 치켜뜨는데도 체스휘는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이 피식 웃기만 했다. 체스휘는 입만 열면 내 성질을 돋웠다. 분하지만 체스휘의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어서, 더욱 부아가 치밀어 아까보다 얼굴에 더 열이 몰렸다.

반가움? 그리움? 개뿔이다. 가뜩이나 갑자기 눈앞에 찐 체스휘가 나타나서 정신이 혼미한데, 이렇게 사람을 쉴 새 없이 달달 볶아대기까지 하니 도무지 이성적으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오랜만에 얼굴을 보자마자 대뜸 이런 상황이 연출되는 거지? 생각보다 체스휘의 반응이 덜 무서워서 안심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여전히 그를 곱게 볼 수가 없었다.

나는 계속 체스휘를 경계하면서 그를 힐끔거렸다. 단정치 못한 모습을 하고 있는 건 체스휘도 마찬가지였다. 내 손에 마구 헤집어진 머리카락도 아직 헝클어진 그대로였고, 아까 나도 모르게 그의 옷을 이리저리 잡아당겨서 단추도 몇 개 뜯겨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 상태로 체스휘는 나처럼 옷매무새를 가다듬을 생각도 하지 않고, 꼭 혼자 쳇바퀴를 돌리고 노는 햄스터를 구경하기라도 하듯이 나른히 반쯤 내리뜬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옷부터 제대로 입고 다시 얘기해요. 잠깐, 내가 분명히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어요!”

그러다가 체스휘가 다시 내 쪽으로 손을 뻗기에 가시를 곤두세운 고슴도치처럼 으름장을 놓았다. 물론 체스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침대 위에 놓인 내 발목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여기, 많이 빨개졌네. 아까 내가 너무 심하게 물었나 봐.”

체스휘의 말처럼 그의 손이 닿은 내 발목 부근에는 잇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나도 지금 체스휘의 시선을 따라 그것을 뒤늦게 확인하고는 한결 더 기가 막혔다. 아니, 무슨 육식 동물도 아니고, 어쩐지 아까 생각보다 아프다 했더니 이렇게 잇자국이 뚜렷하게 남을 정도로 사람을 물어뜯었던 거였어? 게다가 체스휘의 표정이나 목소리에서는 반성하는 낌새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체스휘에게 당장 손을 치우라고 으르렁거리려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것에 멈칫했다. 체스휘의 옷차림이 단정하지 못했던 탓에, 처음에는 옷깃에 가려져 있던 목덜미가 시야에 드러나 보였다. 그런데 그곳에는 내 발목에 난 것과 비슷한 잇자국이 새겨진 상태였다.

처음에는 ‘아니, 이 사람이 내가 없는 사이에 누구랑 저런 걸 만들었지?’ 하는 생각에 화가 치솟을 뻔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저건 내가 만든 자국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방금 만든 건 아니었고, 내가 예전에 체스휘의 거짓말에 화가 나서 깨문 흔적이었다. 하지만 내가 체감하기로는 그날부터 시간이 벌써 한참이나 지난 상태였다. 그러니 이 정도면 이미 자국이 흐려지다가 거의 다 사라졌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체스휘의 목덜미에 남은 자국은 아직도 얼마 전에 갓 새겨진 것처럼 선명했다. 그런 걸 보면, 내가 1년 전의 레드포드 저택으로 가서 상당히 많은 날을 보낸 것과 달리, 이곳에서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체스휘가 나한테 밤 나들이를 다녀왔다고 말했었지?’

그럼 혹시 여기에서는 고작 한나절 정도의 시간만 지난 건가? 예전에 내가 지하실의 문을 이용했을 때도 두 장소의 시간 흐름이 달랐던 적이 있었으니, 아예 생소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미간을 좁힌 채 체스휘의 목덜미를 보다가, 문득 내 발목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아직도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 전보다 살갗을 훑는 움직임이 한결 더 집요해진 것 같았다. 나는 퍼뜩 위기감을 느끼고 흠칫 몸을 떨었다.

“잠깐만, 설마 뭘 또 하려는 건 아니겠죠?”

방심한 사이에 체스휘에게 이리저리 끌려간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경계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몸을 슬쩍 뒤로 물렸으나, 족쇄처럼 발목을 옥죈 손은 풀어지지 않아서 은근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체스휘에게 반격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냥, 못 걷게 만들까 생각 중이었어.”

그리고 뒤이어 사뭇 평온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은 순간, 섬찟한 느낌이 내 등줄기를 스쳐 지나갔다.

이, 이 사람이 지금 태연한 얼굴로 뭐라는 거야?

만약 체스휘와 나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의 장르가 단순한 로맨스라면, 이 말은 조금 전까지 우리가 했던 낯부끄러운 짓의 연장선을 예고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내 발목을 움켜쥔 집요한 손길이나 아래로 내리깔린 싸늘한 눈이 심상치 않았다. 착각인지, 발목을 단단히 옭아맨 손아귀에도 지그시 강한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한순간 느낌이 왔다. 이건 스릴러다…!

“허,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런 소리를 들어야 돼?”

나는 황당함과 분노를 느끼며 다리를 들어 내 앞에 있는 남자를 냅다 걷어찼다.

지금의 나는 갈대처럼 연약하고 가녀린 엠버가 아니라, 힘세고 건강한 린 도체스터였다. 그래서 내 발차기에는 제법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체스휘는 열 받게도,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내 발을 움켜잡아서 공격을 간단히 막아 냈다. 그러고는 그대로 손에 쥔 걸 잡아당겼다. 내 몸이 이불과 함께 체스휘의 앞으로 지이익 미끄러져 끌려갔다. 내가 아까 기껏 거리를 벌렸던 게 무색하게도, 멀어졌던 체스휘와 내 몸이 다시 훌쩍 가까워졌다.

“머릿속에 있는 쓸데없는 걸 지워도 소용없고, 잠깐만 방심하면 한눈이나 팔고.”

체스휘가 내 고막까지 시려지는 것 같은 냉담한 목소리로 읊조리듯이 말했다.

“잘해 줘도 도망갈 생각만 하니까 속상하고 서운해서, 그냥 이제 다른 방법을 쓰는 게 나을까 싶고 그러네.”

나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뭐, 잘해 줘? 댁은 남의 머릿속을 함부로 주무르고 거짓말로 속이는 걸 잘해 줬다고 합니까?

“아니, 진짜 양심이 사망하셨어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요. 진짜 속상하고 서운할 사람이 누구인데?”

어차피 피차 서로의 거짓말을 다 알고 있는 느낌이라, 나도 세라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척하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체스휘의 뻔뻔스러움에 슬슬 아까와 다른 의미로 열이 올라서,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이 서서히 달궈지기 시작했다.

내 격양된 목소리를 들은 체스휘가 싸늘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다가, 소리 없이 입매를 당겨 나를 비웃는 듯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내가 진짜 마음먹고 나쁜 짓을 하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린 씨가 알기는 해?”

고요한 음성이 내 귀를 스쳐 지나간 순간, 어쩐지 살짝 팔뚝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들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체스휘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체스휘가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혹은 단순히 그냥 나를 겁줄 생각으로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다시 만난 체스휘의 반응이 생각보다 무섭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건 취소하기로 했다. 그래도 나를 한참이나 침대 위에서 마음대로 괴롭히면서 어느 정도 화가 풀린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걸로는 모자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화가 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이 남자를 만나서 나조차도 깜짝 놀랄 정도로 반가웠던 마음이 어느새 분노로 치환되어 내 안에서 활활 타올랐다.

“그러는 체스휘 씨야말로 뭘 믿고 자꾸 나한테 이런 식으로 굴어요? 내가 우스워?”

잘못한 건 분명 내가 아니라 체스휘였다. 물론 내가 말없이 사라져서 체스휘도 화가 났을 수 있지만, 먼저 날 속인 건 그였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 진짜 기분 나빠하고 상대방에게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따져야 할 사람은 체스휘가 아니라 나였다.

“아니지, 이렇게 심보 고약한 말을 하는 건 체스휘가 아니라 미카엘 쪽이겠지.”

그런데 도리어 체스휘가 이렇게 적반하장으로 나오니, 내 입에서도 고운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아까 눈을 뜨자마자 진짜 체스휘를 보고 왠지 마음이 약해졌던 게 떠올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런 사람, 뭐가 예쁘다고 아까 그렇게 반가워했던 거지? 왠지 내가 바보같이 느껴져서 속이 더 상했다. 나한테 다가오는 그를 그렇게 순순히 받아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의 손을 바로 뿌리치고 당장 이 자리를 다시 벗어났어야 했다는 후회가 뒤늦게 밀려들었다.

“나, 과거의 당신을 봤어요. 체스휘하고 미카엘, 둘 다 만났어.”

그래서 나도 차갑게 가라앉은 기분으로 체스휘를 보며 말하자, 그도 나 못지않게 서늘히 식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