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놀다 오게 해 주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조금 질투가 나서.”
얼른 고개를 숙여서 내 몸을 확인했다. 과연 그럴 줄 알았다고 해야 할지, 눈에 보이는 손의 모양과 가슴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의 색깔, 그리고 입고 있는 옷까지 엠버의 것과는 달랐다.
체스휘가 방금 나를 부른 이름대로, 지금의 나는 영락없는 린 도체스터의 몸을 하고 있었다.
“체, 체스휘 씨?”
“이젠 그 이름도 내 앞에서 막 부르네.”
마지막으로 확인하듯이 무심코 체스휘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옅은 호선을 띠고 있던 입매를 움직여 그 위에 좀 더 선명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척하려고 한동안 애쓰더니, 잠깐 다른 곳에 다녀왔다고 벌써 다 잊었나 봐요.”
놀라서 어안이 벙벙한 나와 달리, 체스휘는 참으로 태연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좀처럼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마지막으로 눈을 감기 전까지만 해도 과거의 체스휘, 미카엘과 함께 손님 방에 있었는데?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온 거야? 아, 혹시 이거 꿈인가? 혹시 지금 내가 아직도 잠을 자고 있는 거 아닌가?
갑자기 이게 진짜 현실이 맞는지 의심스러워서 충동적으로 손을 들어 내 뺨을 한 대 때렸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얼얼한 통증이 급습했다.
“아, 쓰읏.”
“지금 뭘 하는 거예요?”
내가 하는 짓을 본 체스휘가 눈매를 찡그리며 내 손을 뺨에서 떨어뜨렸다.
“왜 난데없이 자해를 하지? 설마 아직도 자면서 꿈이라도 꾸는 걸까 봐?”
그가 마뜩잖은 듯이 찌푸린 얼굴을 한 채 방금 내가 때린 뺨을 달래듯이 살살 문질렀지만, 나는 이미 다른 생각으로 정신이 쏠려 있었다.
아픈데? 때린 데가 아파. 그럼 설마 이게 꿈이 아니라 진짜라고…?
가슴에 들어찬 경악스럽고도 놀라운 마음이 내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나는 어버버, 입술만 달싹거리며 내 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멀거니 시야에 담았다.
당연히 나는 이 상황이 몹시도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아무런 예고도, 또 마음의 준비도 없이, 1년 전의 레드포드 저택을 떠나 다시 원래의 체스휘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틈틈이 지하실의 문을 이용해 장소를 옮기려고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근래에는 그냥 지금 진행되는 일이 마무리된 뒤에 그곳을 떠나려고 마음을 바꿨었다.
그런데 한동안 지하실에 가까이 가지도 않은 내가, 왜 다시 원래의 린 도체스터의 몸으로 돌아오게 된 걸까?
“내, 내가 왜 여기에 있어요?”
“왜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오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내 물음에 체스휘가 입술을 비딱하게 기울이며 바보 같은 질문을 한다는 듯이 대꾸했다. 나는 다시 말문이 막혀서 허, 하고 기막힌 심정을 담은 숨만 내뱉었다.
‘그럼 혹시….’
체스휘가 날 찾아서 다시 이곳에 데려온 건가? 그는 나보다 훨씬 자유롭게 레드포드 저택의 문을 이용해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도 1년 전의 저택으로 가게 된 이후로 한동안은 체스휘가 나를 잡으러 오는 게 아닌지 경계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렇게 뜬금없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이유로는 그것밖에 짚이는 게 없잖아!’
그러고 보니 가물가물하게, 어젯밤에 누군가 나를 안고 어두운 복도를 걸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참 단잠을 자다가 몸이 작게 흔들리는 느낌에 어렴풋이 눈을 떴을 때, 체스휘의 얼굴을 봤던 것도 퍼뜩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맞아. 그러고 보니 짧게나마 대화도 나눴었어.’
“체스휘 씨…?”
“깼어요? 더 자요.”
“지금 어디 가요…?”
잠결에 비몽사몽으로 내가 묻자, 달빛이 어스름하게 비친 체스휘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었다.
“집에요.”
“집?”
“응. 우리 집.”
잠이 안 깬 상태로도 ‘도대체 이게 뭔 이상한 소리지?’ 하고 의아했던 기억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하지만 내가 깊은 의문을 품기도 전에 체스휘가 다시 한번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한테 작게 속삭였다.
“졸리면 더 자고 있어요. 다시 눈을 뜨면 도착해 있을 테니까.”
체스휘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긴장을 풀리게 하면서 잠을 부르는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다시 마음을 놓고 스르륵 잠들어 버렸다.
‘…잠이 왔냐, 그 상황에!’
나는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고 다시 내 뺨을 한 대 치고 싶어졌다.
“아니,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말도 없이 마음대로 사람을….”
“린 씨.”
그런데 돌연, 체스휘가 경황없이 그에게 따지는 어투로 내뱉은 내 말을 중간에 자르면서 어젯밤에 들은 것과 같은 고요한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눈치를 못 챈 건지, 그냥 그런 척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거의 동시에 그의 손이 침대에 누운 상태로 반쯤 일으켜져 있던 내 몸을 뒤로 밀쳤다.
“나 지금 좀 화났어요.”
그리 센 힘은 아니었지만, 어정쩡하게 팔꿈치를 대고 지탱 중이던 몸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다시 등 뒤로 푹신한 침대가 닿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체스휘의 몸도 나를 따라 앞으로 기울어졌다. 그의 손에 짓눌린 내 몸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렇게 가까이에서 체스휘와 다시 한번 눈을 맞댄 뒤에야, 나는 방금까지 지극히 평온해 보인다고 생각했던 그의 얼굴이 내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나를 향한 체스휘의 눈은 심장이 오싹거릴 정도로 차가웠고, 그 안에 조용히 도사리고 있는 감정은 다소 흉포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달래 줘, 빨리.”
지금은 억제된 느낌이었지만, 왠지 폭발하기 직전의 고요함처럼 그의 음영 진 눈이 위험한 분위기를 풍긴다고 하면, 그것도 내가 착각하는 걸까?
곧바로 숨결이 뒤섞일 만큼 체스휘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서, 나는 그의 상태를 눈으로 더 살필 수 없었다. 바로 다음 순간 입술과 입술이 부딪히고, 거침없는 입맞춤이 뒤따랐다. 조금 전에 나를 다정하게 어루만지던 손길도 거짓이었던 것처럼, 내 입술을 따끔하게 깨물어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오는 일련의 움직임이 제법 거칠고 격렬했다.
확실히 이런 부분은 과거의 체스휘와는 느낌이 달랐다. 비교하긴 좀 그렇지만, 이런 저돌적인 면은 오히려 미카엘과 비슷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체스휘를 떼어 내려고 그의 머리를 잡았다가 한순간 멈칫했다. 어느새 주저하는 마음이 내 안에 싹터 있었다. 그래서 조금 갈등하다가, 그냥 나한테 엉겨 붙은 남자를 밀어내지 않고 받아 줬다.
정말 믿기지 않게도…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경악이나 당혹감만이 아니었다. 정말 우습고 황당한 일이지만, 나는 이 남자가 조금 반가운 것 같기도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어서 내 발로 이곳을 떠나 놓고는, 상당히 모순적인 마음이었다. 처음 이곳을 떠났을 때는 만약 체스휘가 지금처럼 이렇게 나를 찾으러 오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면서, 진짜 그런 상황이 오면 무섭고 섬뜩할 것 같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랜만에 다시 내가 아는 체스휘를 마주하고 나니, 생각보다도 복잡한 감정이 가슴을 채워서 나를 동요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아무래도 나는 그동안 이 남자가 내심 보고 싶었던 건가 보다. 물론 1년 전의 레드포드 저택에서도 체스휘와 미카엘을 따로따로 자주 만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완전체(?)와는 좀 다르긴 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집 나가면 고생한다더니, 그동안 개복치 같은 엠버의 몸으로 여기저기서 뒹구느라 여간 고달팠던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곳에는 원래의 나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각하지 못했을 뿐, 아마도 나는 약간 외로웠던 것 같았다.
그런 이유로 이렇게 불시에 나한테 익숙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원래의 체스휘를 만나게 되자, 이전까지 그에게 화가 났던 마음도 얼마간 누그러지고, 또 그리움 비슷한 감정을 자극받아서 살짝 마음이 약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하여 내가 저항하지 않고 얌전히 있자, 마주한 남자에게서 느껴지던 찌를 듯한 날카로운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지는 듯했다.
그런데… 왜 시간이 충분히 지났는데도 그만둘 낌새가 전혀 안 보이는 거지? 오히려 내가 호응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에 자극이라도 받은 것처럼 점점 더 고삐가 풀려 가는 것 같은 느낌인데? 가만, 손은 또 어디로 움직이는 거야? 그러고 보니, 미처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어느덧 우리의 자세도 처음보다 훨씬 위험해져 있었다.
“잠깐, 잠깐만…!”
결국 나는 위기감을 느껴, 있는 힘껏 고개를 비틀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이게 뭐 하는 거예요?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여러 가지로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숨을 헐떡이면서, 그새를 못 참고 다시 나한테 바짝 접근하는 체스휘의 얼굴을 손으로 막았다. 하지만 하던 걸 멈출 생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것처럼, 오히려 이번에는 체스휘가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앞에 있는 내 손가락을 깨물고 핥기 시작해서 다른 의미로 더욱 난감해지고 말았다.
“아, 시간이 문제인가? 그럼 밤이면 내가 뭘 하든 상관없고?”
이 사람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당연히 그건 아니지…!
“아무튼, 적당히 좀… 하라고요! 아니, 그만 핥아!”
“응, 적당히 할게.”
물론 체스휘와 내 ‘적당히’의 기준은 아주 많이 달랐다.
내가 그 후로 체스휘에게 얼마나 괴롭힘당했는지는 일일이 설명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