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258)화 (258/300)

정수리에 내려꽂힌 충격이 너무 강렬해서, 그는 무심코 숨을 급히 들이켰다.

어스름한 달빛이 방 안에 서 있는 남자의 위로 녹듯이 흘러내렸다. 잠기운이 완전히 사라져 또렷해진 체스휘의 시야에 들어온 얼굴은 몹시도 낯익은 것이었다. 그래서 소름이 돋았다.

‘뭐지? 저 얼굴은…. 지금 내가 악몽을 꾸고 있나?’

어째서일까? 분명 자신은 지금 이곳에 있는데, 왜 거울을 보는 것처럼….

“그냥 잠들어 있는 게 나았을 텐데, 일어났군.”

경악으로 부릅떠진 눈에 다가오는 남자의 모습이 비쳤다. 분명 가슴은 경계심과 의혹으로 가득 차서 터질 것 같은데, 가위라도 눌린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새 바로 코앞까지 접근한 남자가 서늘한 눈으로 체스휘를 내려다보며 소리 없이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다행이네. 이번에 마주친 건 굳이 손댈 필요가 없는 체스휘 로반슈타인이어서.”

꼭 으스스한 악몽을 꾸는 듯했다. 여전히 그에게 몸을 기댄 채 곤히 잠들어 있는 여인의 숨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지만 않았다면, 이 상황이 좀 더 현실성 없게 느껴졌을 것이다. 체스휘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던 남자의 시선도 잠깐 숨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눈이 체스휘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운 강렬한 감정을 머금은 채 반짝 빛났다. 하지만 그는 금방 시선을 움직여 다시 체스휘를 응시했다.

“그래도 역시 성가시게 굴면 나도 모르게 없애 버릴지도 모르니까….”

나지막한 목소리가 속삭이듯이 귓가에 내려앉고, 곧이어 달빛에 희게 빛나는 손이 훌쩍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냥 잠들어 있어.”

그 말이 어떤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체스휘의 의식은 정말 거기에서 끊어졌다.

그러고 나서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번에는 창밖에서 스며들어 온 햇살이 그의 온몸을 따뜻하게 감싸 안고 있었다. 체스휘는 무심코 숨을 멈춘 채, 아연한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방에 있던 엠버와 미카엘, 두 사람이 어디론가 자리를 비워 그 혼자만 이곳에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어제 잠들기 직전에 본 것과 똑같았다.

순간적으로 ‘어젯밤에 본 그것은 꿈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목격한 것이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 워낙에 말도 안 되는 그런 광경이었으니, 잠결에 헛걸 봤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엠버 씨?”

체스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혹시 방 안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사람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엠버와 미카엘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방을 나섰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복도에는 청소를 하러 나온 고용인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들은 체스휘를 보고 인사를 건넸다. 그들을 지나치며 얼굴을 확인했지만, 체스휘가 찾는 사람은 개중에 없었다. 엠버는 저택의 청소를 담당한 메이드가 아니니 그 또한 당연했다.

그럼 그녀를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걸까? 이 시간에 방까지 직접 찾아가는 것은 예의가 아닐뿐더러, 이렇게 급히 그녀를 만나야 할 타당한 이유 또한 없었다. 하지만 체스휘는 왠지 마음이 초조했다. 어젯밤에 본 그 악몽인지 뭔지 모를 것이 지금도 눈앞에서 생생하게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체스휘는 마음속의 고민을 오래 이어 갈 필요가 없었다. 잠깐 갈팡질팡하던 그의 눈에 금빛 머리칼을 흩날리며 빠르게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엠버 씨!”

체스휘는 곧바로 자리를 박차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앞서 걷던 엠버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그녀는 어째서인지 당황하고 조금 놀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체스휘는 급한 마음이 앞서 그 이유를 미처 따져 보지도 못하고, 한달음에 달려가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마주했다.

“나갈 거면 나도 깨우지 그랬어요. 방에 아무도 없던데, 혹시 그 남자도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간….”

하지만 정면에서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뭔가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얼굴을 마주한 사람과 떨어져 있던 건 불과 몇 시간 남짓인데, 그녀는 이미 그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이 다른 건지, 말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아직 잠이 덜 깨서 그가 뭔가 착각하고 있을 뿐, 실제로 다른 건 하나도 없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반대로 하나하나 전부 셀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게 다르기 때문에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것인지도 몰랐다.

체스휘는 차마 형언하기 어려운 기분을 느끼며 자기도 모르게 말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차갑게 얼어붙은 얼굴로, 지금 마주하고 있는 사람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꿰뚫을 듯이 직시했다.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여인의 눈에는 혼란과 당혹감이 그득했다. 그걸 보며 체스휘는 점점 까닭 모를 불안감이 폐부에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죄송하지만 체스휘 님…. 저희가 어젯밤에… 같이 있었나요?”

“…….”

“제가 조금 전에 눈을 떴을 때는 지하실이었는데…. 죄송해요. 사실 제가 지병이 있어서, 가끔 이런 식으로 기억을 잃을 때가 있어요.”

엠버는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곤혹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 후로 그녀가 설명을 몇 마디 더 이었으나 체스휘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엠버에게 큰 병이 있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라면, 지금 이렇게 체스휘가 눈앞에 있는 사람을 평소와 다르다고 느끼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체스휘는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것이,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기억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니라 좀 더 본질적인 부분이 달랐다. 그러고 보면, 이런 위화감을 체스휘는 전에도 엠버에게서 느낀 적이 있었다.

확실한 건,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그에게 낯선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생각할수록 당황스럽고도 의아했고, 그 이상으로 어딘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체스휘는 굳은 얼굴로 그가 마음에 품은 사람과 같은 얼굴, 같은 이름을 가진 낯선 여자를 내려다보다가, 잇새에 힘을 주며 뒤돌아섰다.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가냘픈 여인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체스휘는 어젯밤까지 그와 같은 방에 있던 또 다른 한 사람을 찾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미카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저택의 손님. 지금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이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그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뭐야, 간지러워….’

문득 뭔가가 내 얼굴과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듯이 어루만지고, 이마와 뺨 같은 곳에 입술처럼 부드럽고도 말랑한 감촉이 가볍게 눌러 찍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꼭 강아지가 주인에게 애정 표현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알다시피 나는 기르는 반려동물이 없었다.

자꾸만 나를 건드리며 치근덕거리는 느낌이 귀찮고 또 조금 간지럽기도 해서, 나는 미간을 좁히며 불만스럽게 몸을 뒤척였다. 그러자 귓가에 듣기 좋은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조금씩 잠에서 깨어났다.

처음에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으나, 금방 잠들기 직전의 일이 떠올랐다.

아, 내가 미카엘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다가 깜빡 졸았던가? 그런데 생각보다 굉장히 푹 잠들었던 모양이다. 분명히 눈을 감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건 해 질 무렵의 붉은 하늘이었는데, 지금 가늘게 뜬 눈에 스미는 빛은 꼭 아침 햇살처럼 밝고 눈이 부셨다.

“벌써 아침이에요?”

나는 뻑뻑한 눈을 비비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방금 누가 날 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이 과거의 체스휘라면 그럴 리가 없었다. 아마도 내가 잠결에 뭔가를 착각했나 보다.

“미카엘 씨는요? 깨어났어요?”

내 물음에 체스휘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는 모습이 가물가물한 시야에 비쳤다.

“응.”

그의 짤막한 대꾸가 성에 차지 않아서 나는 다른 질문을 덧붙였다.

“상태는 멀쩡해요?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해요? 혹시 깨어났다가 다시 잠든 거예요? 어? 그런데 왜 내가 침대에 있지…?”

그러다가 문득 지금 내가 몸을 일으킨 곳이 의자가 아닌 침대 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는 미카엘이 누워 있어야 하는 곳인데? 혹시 미카엘이 깨어나서 자리를 비키고 대신 날 여기에서 재웠나?

“뭐야, 미카엘 씨는 어디에 있어요?”

나는 눈을 비비던 손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물음에 이번에도 체스휘는 평온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지금 눈앞에 있잖아.”

눈앞? 어디….

내가 체스휘의 말에 의문을 느낀 것과, 지금 이곳이 눈을 감기 전에 있었던 미카엘의 방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거의 동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내가 있는 이 방이 완전히 낯선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 방 역시 눈에 익숙하다면 익숙했다.

나는 갑자기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크게 떴다. 숨을 훅 깊이 들이마시며 좀 더 제대로 방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떤 깨달음이 서서히 내 안에 경악을 불러일으킬 무렵, 체스휘의 손이 다시금 내 뺨을 감싸 와서 나는 몸을 흠칫 떨 수밖에 없었다. 주변을 살피기 위해 옆으로 돌렸던 고개를 천천히 원상태로 되돌렸다.

그러자 여전히 가볍게 미소를 지은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정면으로 시야에 들어왔다. 체스휘는 내가 잠에서 깰 때 그랬던 것처럼, 내 얼굴을 간지럽게 어루만졌다. 그 손길에서 나를 향한 짙은 애정과 집착 같은 것이 느껴졌다. 왜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지금 내가 마주한 남자의 눈빛 역시 잠들기 직전에 본 체스휘의 것과 달랐다. 뺨을 훑듯이 매만지던 남자의 손이 미끄러지듯이 움직여, 이번에는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을 정리하듯이 다정하게 쓸어넘겨 주었다. 그러다가 귀를 살짝 스친 손길에 나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어깨를 작게 움츠렸다.

“린 씨, 밤 나들이는 재미있었어요?”

이윽고 달콤하지만 서늘한 남자의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든 순간, 나는 의심이 확신이 된 것을 느끼며 숨을 멈추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