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체스휘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는 다른 설명을 더 요구하면서 나를 추궁하거나 몰아붙이지 않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를 잠자코 응시하는 체스휘의 얼굴은 어두웠다. 가라앉은 눈동자 안에 소리 없이 일렁이는 감정은 사뭇 복잡해 보였다. 방금까지는 체스휘가 차분한 상태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내 착각이었던 듯하다. 꼭 목 끝까지 치달은 말을 애써 억눌러 삼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목울대가 거칠게 움직이는 게 눈에 띄었다.
“엠버 씨가 왜 그러는지, 알아요.”
뭐, 알아?
그러다 이내 체스휘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 의외의 말에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하지만 내가 그래도 상관없다고 하면요?”
체스휘의 심중에 든 생각이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진심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체스휘가 내 진짜 사정을 알 리는 없지 않나? 그가 뭘 생각하고 있든 간에, 그건 잘못 짚은 것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아무튼, 나는 체스휘의 말에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서 쉽사리 대꾸하지 못했다. 그러자 내 망설임을 또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체스휘가 한 발 물러나는 모습을 취했다.
“미안해요. 지금 바로 대답을 강요하지는 않겠다고 방금 내 입으로 말해 놓고는 이러네요.”
그의 눈에 설핏 후회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난 정말 진심이에요. 그러니까 엠버 씨도 내가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끝으로 체스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둘이 대화를 끝마치자, 작은 말소리만 울리던 방이 금세 조용해졌다. 그렇게 체스휘와 나는 침대에 누운 미카엘 카드리고만 의미 없이 응시했다. 그 후로 누구 한 사람 쉽게 입술을 또 떼지 않아서, 방에는 침묵만이 맴돌았다.
***
시간은 소리 없이 흘러, 어느새 창밖의 해가 저물었다.
체스휘는 긴 속눈썹을 드리운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잠든 여인을 시야에 담았다. 엠버는 어느 순간부터 피로가 몰려오는지 앉은 상태로 꾸벅꾸벅 졸다가, 이내 그의 앞에서 완전히 고개를 떨구고 새근새근 잠들었다. 체스휘는 그녀를 굳이 깨우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어제 레드포드 저택에 돌아온 직후에 얼굴을 봤을 때도 엠버는 굉장히 피곤해 보였다. 그러다가 또 마리네즈와의 일로 체력을 소모한 데다, 오늘은 저택의 손님 때문에 한참 신경을 써야 했으니 지금 그녀가 이렇게 파리한 얼굴로 잠든 것도 이해가 되었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가뜩이나 건강이 상해, 몸이 정상인 상태도 아니지 않던가.
체스휘는 어제 그의 눈앞에서 엠버가 피를 쏟던 장면을 떠올렸다. 굳은 얼굴로 잠든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던 체스휘의 입술이 지그시 깨물렸다.
“아, 메이드장님. 그렇지 않아도 찾고 있었는데 마침 만났네요. 엠버 씨는 좀 괜찮나요?”
“엠버요? 오…. 아니요,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어요. 문을 나설 때까지 넋이 빠져 있던 그 창백하던 얼굴이라니….”
어제 양육자 관리 기관에서 파견을 나온 손님이 돌아간 뒤에 엠버를 찾다가, 체스휘는 메이드장 제인과 마주쳤다. 그녀가 굉장히 당황스럽고 망연한 얼굴로 체스휘의 물음에 다소 횡설수설하며 대답한 말이 생각나, 또다시 입 안이 써졌다.
“어쩐지 그동안 아주 간단한 잡무 하나도 야무지게 해내지 못하는 게 이상했지요. 그래도 그저 생긴 것과 달리 둔해서 실수가 잦은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거예요. 오늘도 그렇게 피를 한 바가지나 쏟는 게 이상해서 혹시 심각한 병에라도 걸린 거냐고 무심코 물어봤는데 전혀 부정하지 않고…. 어쩐지, 그래서 그동안 그 아이가 저택에 오래 있을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던 건가?”
메이드장 제인은 앞에 체스휘가 있다는 사실도 잊은 것처럼 혼자서 멍하니 주절거렸다. 평소대로라면 저택에 고용된 메이드의 개인적인 정보를 이렇게 쉽게 발설할 리 없었지만, 아무래도 그녀 역시 경황이 없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듯했다.
체스휘는 어제의 일을 상기하다가 속에서 들썩이는 감정을 완전히 억누르지 못해, 손을 옆으로 뻗었다. 잠들어 있는 여인의 얼굴에 손가락 끝이 살짝 닿은 순간에는 잠깐 멈칫하긴 했지만, 그는 곧 조심스럽게 다시 손을 움직였다.
체스휘는 엠버의 창백한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준다는 핑계로 괜히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훑듯이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더한 욕심이 솟구치는 걸 참고, 불편한 모습으로 잠든 그녀의 머리를 기울여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그의 어깨 위로 내려앉은 무게가 가슴이 허전해질 정도로 가벼웠다.
‘생각해 보면 엠버 씨에게 예전부터 자주 닥터 콘라드를 찾을 만한 일이 생기곤 했지.’
조심성 없이 어딘가에서 넘어지거나 몸을 부딪쳐 자잘한 부상을 입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얼마 전에 엠버가 어지럼증으로 쓰러졌을 때 알게 된 사실로는, 그런 식으로 현기증을 느끼는 날도 잦다고 했다. 그동안에는 단순히 의외로 덜렁거리는 성격인가 보다, 또 보이는 것처럼 연약해서 자꾸 잔병치레를 하나 보다 싶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단지 그런 이유로 사람이 그렇게 매일 아플 리는 없었다.
체스휘는 가끔 엠버를 볼 때, 왠지 그녀가 한순간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어느 날 갑자기 말없이 어디론가 훌쩍 떠나 버릴 것 같은, 그런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괜한 착각이 아니라, 혹시 이런 이유 때문이었던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제 메이드장에게 들은 말로 엠버의 몸 상태가 지극히 비정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음악실에서 다시 그녀를 만났을 때는… 체스휘도 마음속의 혼란을 이기지 못해 평소보다 감정적으로 굴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마리네즈는 몸이 성치도 않은 사람을 그렇게 지독하게 괴롭히다니….’
원래 체스휘는 저택의 양육자 중에서 마리네즈와 가장 친분이 있는 편이었지만, 이제는 그녀의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관계로 지냈던 두 사람이 최근에는 벌써 몇 번이나 엠버의 문제로 얼굴을 붉히며 싸웠는지 몰랐다.
그나마 루시오가 죽은 일로 마음이 조금 누그러져 마리네즈를 위로해 주기도 했으나, 어제 그녀는 또다시 예전의 버릇을 드러내 엠버를 못살게 굴었다. 이제 체스휘는 그녀를 친구로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그는 또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자신에게 몸을 기대어 잠든 엠버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치맛자락 위에 놓인 그녀의 손에 핏자국이 묻은 것을 발견해, 체스휘는 그것을 살살 문질러 닦아 주었다.
엠버는 손조차도 마르고 창백했다. 딱 봐도 연약해 보이는 몸은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일전에 모로스가 나타나 7호실의 다이안에게 달려들었을 때, 다른 사람들처럼 도망가지 않고 혼자 남아 그 앞을 가로막았다. 체스휘는 그런 용기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궁금했다. 생각해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눈으로 좇게 되었던 건 그날부터였다.
‘그건 그렇고… 지금 방 안에는 그녀에게 남다른 마음을 품은 남자가 둘이나 있는데, 너무 무방비하게 잠든 것 아닌가?’
그러다가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에, 체스휘의 눈빛이 방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심란하게 변했다. 앞으로 미끄러진 그의 시선이 이번에는 침대에 시체처럼 누운 사람에게 닿았다.
이름이 미카엘이라고 했던가? 체스휘는 저택의 손님인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난번에 악마의 화원 앞에서 체스휘보다 한발 앞서 엠버를 구해서 나온 미카엘과 마주쳤을 때도, 또 저택에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일주일 전 별관에서 범인을 데려온 미카엘이 엠버와 자신의 앞에 나타났을 때도…. 체스휘는 미카엘이 품고 있는 그녀를 향한 소유욕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체스휘는 지난 일주일 동안 두 사람이 함께 저택에서 사라졌던 것도 알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동시에 모습을 감춘 건 단순히 공교로운 우연일 뿐인지도 몰랐으나, 이상하게도 그게 아니라는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체스휘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미카엘과 엠버 사이에는 모종의 유대감 같은 것이 존재하는 듯했다. 그것은 단순히 미카엘이 저택의 귀한 손님이고 엠버가 그를 담당하는 메이드이기 때문에 생긴 연결고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이 경계심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그녀의 주변에 있는 남자를 당당하게 밀어낼 어떤 자격도 아직 없다는 것 역시 이미 알고 있었다.
체스휘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엠버가 사라진 이후부터 오늘까지도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서 그런지, 사실은 그도 걷잡을 수 없이 피곤했다. 여전히 머리가 복잡하고 감정이 들쑥날쑥하게 술렁거려서 좀처럼 마음을 비우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 그가 있는 방은 언뜻 평온하게 느껴질 정도로 조용했고, 몸에 맞닿아 있는 타인의 온기는 적당히 따스하고 포근해서 이렇게 조용히 숨을 내몰고 있으려니 서서히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깐만 눈을 감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체스휘는 어느 순간 그만 깜빡 잠들어 버렸다.
그가 다시 눈을 뜬 건 해가 완전히 지고 난 뒤였다. 눈을 감기 직전까지만 해도 방 안까지 가득 채우고 있던 노을의 붉은 빛은 이미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줄곧 희미한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하던 방 안에 문득 어떤 인기척이 느껴졌다. 체스휘는 거기에 잠이 깨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직 초점이 완전히 잡히지 않은 눈에 거무스름한 형체가 비쳤다. 처음에는 저택의 귀한 손님이자 이 방의 임시 주인인 미카엘이 정신을 차려 일어났나 싶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체스휘는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린 남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확인하고는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