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에 급격한 현실 혼동이 오면서 멍해졌다.
뭐야,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이렇게 느닷없이 둘이 주먹 다툼을 한다고? 아까까지만 해도 의식이 없던 미카엘이 이렇게 깨어난 건 다행인데… 이건 멀쩡해도 너무 멀쩡한 거 아닌가? 기절할 정도로 상처가 크게 났으면 얌전히 누워나 있을 것이지, 갑자기 이게 무슨 난장판이냐 이 말이다.
혹시 내가 너무 피곤해서 헛걸 보는 건 아닌가 의심스러워서, 손을 들어 두 눈을 비비고 다시 앞을 봤다. 하지만 방 안의 광경은 바뀌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내가 온 것도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뒤엉켜 있었다.
체스휘는 미카엘에게 어깨를 틀어 잡힌 채 바닥에 내쳐져 있었고, 그 위를 덮치듯이 누르고 있는 미카엘은 체스휘에게 멱살을 붙들린 상태였다. 그러다가 이내, 내 눈앞에서 체스휘가 미카엘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미카엘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바로 그 순간, 잠깐 가출했던 내 정신도 돌아왔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지금?! 둘 다 미쳤어요? 당장 떨어져요…!”
나는 질겁해서 바닥을 구르고 있는 체스휘와 미카엘에게 서둘러 다가갔다. 내가 자리를 비운 그 짧은 시간 동안 도대체 얼마나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는지, 신발 밑창에 깨진 화병의 잔해와 부서진 물건들이 마구 밟히고 차였다.
“내 말 안 들려? 당장 떨어지라니까!”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 크게 소리치고 나서야 내 목소리가 들렸는지, 마침내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움직였다. 서로를 향하던 살기가 남아서 아직 형형한 눈빛이었지만, 그래도 나를 발견한 순간 두 눈에 날카롭게 벼려져 있던 그들의 감정이 아주 약간은 누그러지는 것 같기도 했다.
체스휘는 나를 보고 눈매를 움찔 찌푸리며 미카엘을 한 대 더 치려는 듯이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미카엘도 체스휘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고 살벌하게 얼어 있던 표정을 서서히 이완시켰다. 체스휘는 내가 지금 그들이 싸우는 장면을 목격해서 곤란해하는 얼굴인데, 미카엘은 오히려 나를 보고 한풀 마음을 놓기라도 한 듯이 굳은 얼굴을 펴는 게 상반적이었다.
그것만 보면 체스휘가 지금의 이 상황을 주도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는 않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바로 다음 순간, 흉흉한 기운을 흩날리던 미카엘이 의식을 잃고 체스휘의 위로 쓰러졌기 때문에 어차피 이 아수라장의 원인을 따질 겨를도 없었다.
“미카엘 씨! 미카엘 씨, 또 기절했어요? 이봐요, 정신 좀 차려 봐요!”
체스휘는 뒤늦게 이성이 돌아온 듯이 미카엘의 몸에서 먼저 손을 뗐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를 경계하고 있다가 그제야 몸에서 힘을 풀었다. 하지만 그는 곧 미카엘을 떼어 놓으려다가 말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움찔 찌푸렸다. 그 이유가 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기껏 체스휘가 열심히 치료해 놓은 미카엘의 상처가 그새 다시 터져서 붕대 밖으로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밀려드는 황당함과 어처구니없는 마음에 하, 하고 헛숨을 내뱉으면서 이맛살을 구겼다.
“진짜,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게 무슨 일이에요? 애들도 아니고, 난데없이 싸우긴 왜 싸우는데요?”
쓰러진 미카엘을 다시 끌어다가 침대에 눕히며 두 사람을 타박했다. 물론 미카엘은 의식이 없는 상태였기에, 지금 내 말을 듣는 사람은 체스휘밖에 없었다. 체스휘도 자신의 잘못을 알긴 아는지 말없이 묵묵하게 미카엘을 옮기는 걸 거들었다. 사실은 말이 거들었다 뿐이지, 아까 악마의 화원에서 내가 아무리 잡아당겨도 나한테 끌려오지 않았던 미카엘을 내가 혼자 주도해서 침대까지 데려가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지금도 거의 체스휘가 혼자서 그를 나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체스휘가 저지른 짓이 있으니 이 정도는 당연히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미카엘은 부상을 입은 환자인데, 이유가 뭐든 간에 그런 사람을 데리고 이렇게 상처가 터질 때까지 싸우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다.
“눈을 뜨자마자 갑자기 공격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이번에는 체스휘가 아니라 내가 직접 미카엘의 벌어진 상처를 다시 치료했다. 대신에 체스휘는 아까의 내가 그랬듯이 옆에서 나를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 그가 어쩔 수 없이 설명한다는 듯한 어투로, 살짝 변명하듯이 말했다. 나는 체스휘의 말을 듣고 눈썹을 추어올리면서 그를 쳐다봤다. 내 눈빛이 썩 곱지 않은 걸 알아봤는지, 체스휘가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믿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진짜예요.”
“안 믿는다고는 안 했어요.”
체스휘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내게 알리고 싶은 듯했다. 조금은 억울해 보이는 얼굴이기도 했다. 굳이 귀여운 비유를 들고 싶지는 않지만, 이건 마치 주인이 없는 사이에 사고를 치고 눈치를 보는 댕댕이 같았다.
체스휘가 나한테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원래도 그를 일방적으로 탓할 생각은 없었다. 체스휘가 미카엘을 때린 건 사실이지만, 그 전에 미카엘이 체스휘를 짓누르며 다른 손으로 목을 조르고 있던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지 않았던가.
체스휘의 말대로라면, 내가 없는 동안 미카엘이 눈을 떴는데 웬 낯선 사람이 옆에 있어서 경계심을 느낀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대뜸 체스휘를 공격했던 모양이다. 미카엘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쪽으로 얼굴 좀 돌려 봐요.”
나는 먼저 미카엘의 치료를 끝낸 다음에, 찌푸린 눈으로 체스휘를 돌아보았다. 아까 방에 들어오자마자 처음 본 위치에서는 체스휘의 얼굴에 생긴 상처가 눈에 띄지 않았는데, 이렇게 보니 체스휘도 미카엘에게 당했는지 입술 옆이 터져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다시 한번 두 남자를 향한 못마땅한 마음이 울컥 치밀었다. 하지만 더 이상 뭐라고 말하지는 않고, 그냥 입을 다문 채 잠자코 손을 움직였다.
내 손가락이 입술에 닿자 체스휘가 움찔하며 고개를 살짝 뒤로 물렸다. 하지만 이후에 그는 나한테 얌전히 상처 부위를 대 주며, 바로 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내 얼굴을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물끄러미 쳐다봤다.
“혹시 저 사람, 그동안 엠버 씨한테도 이런 식으로 거칠게 군 적이 있었어요?”
나는 체스휘의 말을 듣고 슬쩍 시선을 들어 그의 눈을 마주했다. 나를 응시한 체스휘의 눈빛은 조금 어둡고 서늘했다. 아무래도 그는 지금까지 내가 이런 위험한 사람 옆에 혼자 있었다는 사실이 우려스러운 듯했다.
“그런 적 없어요”
내 대답에 체스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체스휘와 미카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이 상황이 편치만은 않아서 입을 다물고 손만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렇게 체스휘의 상처를 살피는 것도 끝마치고 막 구급상자를 정리하려고 하는데, 그때까지도 나를 조용히 응시하던 체스휘가 내 손을 움켜잡았다.
“어제 일, 사과하지는 않을 거예요.”
귓가에 내려앉은 나지막한 목소리를 듣고 한순간 멈칫했다. 고개를 들자, 내 속까지 들여다보는 듯이 깊고 신중한 눈을 하고 있는 체스휘가 보였다.
“반쯤은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한 일이었지만, 미안하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후회하지도 않고.”
무의식중에 그에게 붙잡힌 손을 뒤로 빼려고 했으나, 체스휘가 놔주지 않았다. 손을 감싼 온기가 한결 더 깊이 피부 위에 눌러 찍혔다.
체스휘의 말대로, 어제 그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은 사과가 필요치 않았다. 거기에 강제성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그를 거부하지 않은 나한테도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바로 확답을 달라고는 안 해요. 하지만 당신도 내가 싫지는 않은 거죠?”
“…….”
“어제 내가 느낀 것들, 나 혼자 착각한 게 아니잖아요. 그렇죠?”
하지만 엠버의 몸으로 과거의 체스휘와 이런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으려니, 등 뒤로 은근한 식은땀이 배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어제 체스휘 못지않은 충동적인 기분으로 그를 단호하게 뿌리치지 못했던 나 자신을 속으로 책망했다.
지금 내 옆에는 미카엘 카드리고가 누워 있는 상태였다. 물론 의식은 없었지만, 어쨌거나 그의 앞에서 체스휘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도 굉장히 부적절하게 느껴졌다.
체스휘는 지금 당장 나한테 자신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노라고 확신을 주길 바라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 뒤에 덧붙인 물음에 대한 대답만큼은 지금 바로 돌려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나는 내게 재촉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체스휘를 피해 애꿎은 곳에 시선을 두며 이런 상황에서는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건지 맹렬히 갈등했다. 그러다가 이내 바로 코앞에서 쏟아지는 그의 눈빛을 견디지 못해,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말을 꺼냈다.
“미안하지만, 난 여기서 좋아하는 사람을 만들 수 없어요.”
젠장, 그런데 정말 이게 최선인가? 정작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웬 삼류 소설의 대사 같은 어색한 내용이라, 내가 말하고도 우습고 궁색한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요?”
체스휘는 내 부자연스러움을 느낀 건지 아닌 건지, 처음과 같은 차분한 어투로 내게 반문해 왔다.
어째서긴 뭐가 어째서야. 난 엠버가 아니고, 당신은 과거의 시간 속에 있는 체스휘니까 그렇지.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런 말을 지금 내 앞에 있는 남자에게 할 수는 없었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게 있어요. 그러니까 나한테 뭘 기대하지는 마세요.”
어쩌다 보니 나는 본의 아니게 이런 나쁜 여자 같은 대사를 과거의 체스휘의 앞에서 주절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