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안은 내가 예민하게 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거듭 당부하니 순순히 앞으로는 주의하겠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걸로 완전히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정도로 하고 다이안의 방을 빠져나왔다.
미카엘이 돌아온 건 그다음 날 오전이었다.
“미카엘 씨!”
나는 아예 동이 트자마자 밖으로 나가, 악마의 화원 앞을 서성이던 중이었다. 물론 내가 이곳에 와 봤자 갈 수 있는 곳은 문 앞까지만일 뿐, 이 안에 직접 들어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마음 편히 방에서 혼자 휴식을 취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어제도 다른 사람들이 없을 때를 노려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악마의 화원 앞에 가서 불안한 마음을 삭이곤 했다. 그나마 후원 쪽에는 원래도 유동 인구가 적어서, 오늘도 화창한 오전부터 지금 내가 서 있는 길을 오가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렇게 괜히 주변을 서성거리면서 발끝으로 바닥에 박힌 돌멩이를 툭툭 차다가, 문득 화원 안에서 걸어 나오는 검은 형체를 발견했다. 나는 그게 미카엘인 걸 알고 얼른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미카엘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어떻게 된 거예요? 왜 이제 나와요? 게다가 왜 혼자… 어? 이봐요!”
그런데 방금까지 멀쩡해 보이던 미카엘이 갑자기 화원을 완전히 빠져나오기 무섭게 비틀거렸다. 그의 뒤에서 낡은 철문이 철커덩, 소리를 내며 닫혔다. 미카엘이 휘청이다가 그 문에 등을 기대는 바람에, 조용한 후원에 소리가 한결 더 크게 울렸다. 당연히 나는 깜짝 놀라서 미카엘을 부축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잠깐, 이거 피 아니야?”
그러다가 미카엘이 손으로 움켜쥔 복부에 붉게 물든 자국이 있는 걸 발견했다. 심지어 거기에서는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져, 상처를 감싼 미카엘의 손과 그가 서 있는 발밑에 깔린 잔디를 흠뻑 적시는 중이었다.
“잠깐, 의사… 콘라드를 불러올게요! 잠깐만 여기 가만히 있어 봐요!”
“부르지 마.”
“이렇게 피를 콸콸 쏟는데 뭘 부르지 말래?”
“필요 없….”
가느스름하게 내리뜬 눈으로 나를 한차례 응시하던 미카엘이 다음 순간 눈꺼풀을 내리며 옆으로 허물어졌다.
“미카엘 씨! 미카엘 씨…!”
나는 미카엘이 넘어지지 않게 붙잡으려다가 오히려 그와 함께 바닥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의식을 잃은 듯한 남자를 앞에 두고 당황해서 그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내 부름에 눈을 뜨기는커녕, 희미한 미동조차 없었다.
아니, 이게 뭐야?! 미카엘이 왜 이렇게 다친 거지? 총알이 빗발치는 곳에서도 부상 하나 없던 사람인데, 도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설마 괴물 꽃한테 공격당했나? 하지만 그 꽃들은 해충제를 앞에 둔 벌레들처럼 미카엘을 무서워해서 피하는 거 아니었나?
나는 줄곧 초인처럼 강해 보이던 미카엘이 처음으로 이렇게 내 앞에서 큰 부상을 입고 정신을 잃은 상황에 이루 말할 수 없이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분명 루시오까지 두 사람이 저 안으로 들어갔는데, 왜 지금 밖으로 나온 건 한 명뿐인 걸까? 하지만 미카엘은 나한테 대답해 줄 새도 없이 바로 쓰러져 버렸으니, 지금 당장 여기서 내가 뭘 더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초조한 눈으로 꽉 닫힌 화원의 문을 힐끔거리다가, 결국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는 미카엘에게 먼저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하지만 체격 조건이 뛰어난 미카엘을 나 혼자 옮기는 건 역시 어려웠다. 엠버의 약하디약한 힘으로 그를 부축해서 데려가는 건 애초에 무리라, 그건 그냥 깔끔하게 포기했다. 대신에 나는 그를 바닥에 눕힌 상태로 질질 끌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도 쉬운 건 아니었다. 관절이 빠질 것처럼 팔이 아픈 걸 꾹 참고 젖 먹던 힘까지 내서 애써 봤지만, 미카엘은 처음의 위치에서 고작 30cm 정도만 움직였을 뿐이었다. 아우, 미치겠네. 도대체 왜 이렇게 무거워?!
부스럭.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마침 그때, 누군가 잔디를 밟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나 혼자 미카엘을 옮기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아서 다른 사람을 불러와야 하나 싶었는데 잘 된 셈이었다. 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마자 잔디 위에 서 있는 단정한 붉은 머리칼과 은회색 눈을 가진 소년이 시야에 들어왔다.
“제이!”
늘 조용하니 존재감이 없던 6호실의 소년이 나를 보며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혼자 후원 쪽에 산책이라도 온 건가? 아니면 근처를 지나가다가 내가 소리치는 걸 듣고 와 봤나? 아무튼, 지금은 반갑다! 나는 제이에게 서둘러 부탁했다.
“혹시 근처에 힘 좀 쓰게 생긴 고용인이 있으면 이쪽으로 보내 줄래? 보다시피 부상자가 있는데, 나 혼자 옮기기는 무리라서….”
내 말을 들은 제이가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 미카엘을 보고도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다. 제이는 여전히 차분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인 뒤, 뒤돌아 길 반대쪽으로 뛰어갔다. 나는 미카엘의 상처를 지혈하면서 초조하게 소년을 기다렸다. 다행히 그는 금방 돌아왔다. 그래서 제이가 불러온 사람이 누구였느냐 하면….
“엠버 씨?”
무척 공교롭게도 체스휘였다. 체스휘도 제이를 따라왔다가 나를 만날 줄은 몰랐던 듯했다.
“체스휘 씨! 빨리 이 사람 좀 옮겨 주세요.”
나는 이것저것 따지고 잴 여유가 없어서, 체스휘한테 얼른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체스휘는 나를 보고 한순간 멈칫했지만, 곧 미카엘을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미카엘의 상태를 서둘러 한차례 살피더니 눈매를 찌푸렸다.
“이 사람은… 저택의 손님? 도대체 어디에서 이렇게 다친 거예요?”
“아, 그게… 사실 나도 잘 몰라요. 여기에 쓰러져 있는 걸 나중에 발견한 거라서요.”
체스휘의 물음에 일단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둘러댔다. 하지만 대답할 때 나도 모르게 중간에 약간의 간극을 둬서 그런가? 내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눈치챈 듯이 나를 보는 체스휘의 눈빛이 조금 변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잠깐 굳은 눈으로 나를 보았을 뿐, 내게 다른 걸 더 캐묻는 대신 그냥 말없이 미카엘을 들어 올렸다.
“그럼 체스휘 씨, 이 사람 좀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 주세요.”
“제이가 닥터 콘라드를 부르러 갔어요. 금방 여기로 올 거예요. 방으로 옮기면 길이 엇갈릴 수도 있으니까 일단 콘라드가 있는 연구실 쪽으로 가죠.”
몰랐는데 제이는 은근히 행동력이 좋았다. 벌써 콘라드를 데리러 갔다고? 하지만 미카엘이 의사를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도 이왕 불러온 김에 진찰을 받게 할까?
나는 잠깐 갈팡질팡하면서 마음속으로 갈등하다가, 이내 다른 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체스휘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아뇨, 그냥 미카엘 씨 방으로 가요. 이 정도 부상이면 제가 직접 치료할 수 있어요.”
“엠버 씨가 직접 치료한다고요?”
내 말에 체스휘가 찌푸린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왜 굳이….”
“이 사람이 의식을 잃기 전에 의사를 부르지 말라고 했거든요! 저도 이유는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딱 보니까 그렇게 심한 상처도 아닌 것 같… 아무튼, 방으로 가죠! 다른 사람들이 보기 전에 빨리요!”
사실 미카엘의 부상은 가볍게 취급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나는 그를 직접 치료해 볼 생각으로 체스휘를 닦달했다. 생각해 보니 미카엘이 콘라드를 굳이 부르지 말라고 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일단 혁명 단체 소속의 콘라드는 스텔라 출신인 미카엘과 적대 세력이라고 할 수 있지 않던가? 물론 콘라드도 미카엘의 정체를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경계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혹시나 그가 나쁜 마음을 먹어서 미카엘의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고 오히려 해코지하려고 들 수도 있는 노릇이 아닌가?
체스휘는 지금 이 상황이 무척 탐탁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하도 재촉하기도 하고, 또 미카엘의 상태도 제법 위중해 보여서 그런지 일단은 그를 데리고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미카엘의 방으로 갔다. 그래도 주말 오전이라 저택을 오가는 사람이 적어서 다행이었다. 일주일 전의 일로 죽거나 다친 사람이 많아, 가뜩이나 저택이 빈 상태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레드포드의 귀한 손님이 이렇게 저택 안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상황인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숨길 수 있었다.
나는 일단 체스휘에게 미카엘을 침대에 눕히게 한 다음, 그의 방을 마음대로 뒤졌다. 그동안 미카엘의 방을 청소하면서 물건의 위치는 전부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본 상비약을 어디에 두는지도 알고 있었다.
“정말 직접 하려고요? 엠버 씨, 이런 일도 할 줄 알아요?”
“바쁘니까 지금은 말 걸지 말아요! 체스휘 씨는 지혈되게 계속 거기 좀 누르고 있어요.”
체스휘는 내가 영 못 미더운지, 나를 말리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서둘러 방에 딸린 세면실로 가서 대야에 물을 받고 깨끗한 수건을 꺼내 온 다음, 필요한 붕대와 약을 척척 꺼내는 걸 보고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손까지 깨끗하게 씻고 모든 준비를 끝마친 뒤 미카엘의 옆으로 가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고 나서 상처 부위를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하려는데, 피에 흠뻑 젖은 옷이 영 거추장스러웠다. 그래서 먼저 미카엘의 옷부터 벗기기 시작했다. 체스휘는 미간을 좁힌 채 그 모습을 잠깐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내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냥 내가 할게요. 조금만 옆으로 가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