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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253)화 (253/300)

“조만간 메이드 일을 그만두고 저택을 떠날 수도 있다고 메이드장에게 들었어요.”

체스휘의 입에서 흘러나온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 두 귀를 스쳐 지나갔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처음에 이게 내 얘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해서 곧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잠시 후, 체스휘의 말에 나온 ‘일을 그만두고 떠난다’는 사람이 나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체스휘도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어 내 얼굴을 마주했다.

“그런 말을 언제 들었어요?”

“조금 전에요.”

혹시 예전에 메이드장 제인과 비슷한 말이 오갔을 때 그 얘기가 체스휘의 귀에도 들어간 건가 싶어서 물었으나, 그게 아니었다. 그 건은 분명 취소되었을 텐데, 조금 전에 메이드장이 또 그런 말을 꺼냈다고? 어떻게 된 거지? 혹시 제인이 아까 나한테는 별말을 안 했지만, 내심 이번에 근무지를 무단이탈한 일로 해고할 마음이라도 먹은 건가? 아, 아니면 제인은 내가 중병에 걸렸다고 의심하고 있으니, 그것 때문일 수도 있었다.

나는 작게 인상을 쓴 채 그런 생각을 하느라 체스휘의 말을 바로 부정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자신이 들은 말이 정말 사실이라고 확신한 듯했다. 나를 응시한 체스휘의 눈동자가 약간 어둡게 가라앉았다.

“확실히 레드포드는 위험하니까, 다른 일을 찾는 게 좋을지도 모르죠.”

귓가에 흘러드는 목소리도 점차 속삭이듯이 낮아졌다. 내 손을 움켜쥔 체스휘의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는지, 살짝 압박감이 들었다.

“그러니까 차라리 이게 낫다고 생각하고, 나도 웃으면서 보내 줘야 하는데….”

하지만 다음 순간 정면에서 마주친 눈동자에, 나는 체스휘에게 손을 그만 놔 달라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왠지 싫어요.”

가까이에서 소곤거리며 날아든 속삭임은 깃털처럼 작고 가벼웠지만, 실제로 내가 체감한 무게는 그렇지 않았다.

“당신이 없는 레드포드 저택은….”

창밖에서 스며드는 늦은 오후의 햇빛에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왠지 싫어.”

체스휘와 내가 있는 공간은 방금까지와 조금도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였는데, 어쩐지 뭔가가 변한 것처럼 느껴졌다. 금속이 녹아내린 듯한 진한 햇빛 때문에 공기의 밀도도 덩달아 짙어진 것 같았다. 꼭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사방이 고요했고, 눈앞에 있는 사람과 맞닿아 있는 손에서는 이제 더 이상 서늘하다고 할 수 없는 온기가 퍼지고 있었다.

그렇게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고 체스휘와 눈을 마주하다가, 문득 지금 이곳이 피아노가 있는 음악실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자각했다. 그러고 나자 예전에 미래의 체스휘와 함께 다른 사람들을 피해 이곳에 숨어 들어왔던 기억이 언뜻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후에 이곳에서 있었던 일도 거의 동시에 떠올랐는데….

“린 씨하고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나네요.”

기억 속의 적막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한순간 귓가에 어른거렸다. 지금 마주한 눈에 희미하게 고인 열기는 내게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던 체스휘가 맞잡은 내 손을 약간 아플 정도로 세게 움켜쥐었다. 아무래도 무의식적인 행동인 듯했다. 그리고 이내, 그가 내게 다가왔다. 나는 비록 지금 내 앞에 있는 남자의 많은 부분이 내가 원래 알고 있던 미래의 체스휘와 다를지라도, 이 두 사람이 결국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체스휘는 성급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니 피하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이 남자 앞에서 그랬듯이, 이번에도 내 의지가 아니라 별수 없이 벌어진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접근을 허용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이미 경험해 본 것과 어딘가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사실은 중요한 부분이 다르기도 했다. 일단 지금의 나는 명백히 다른 사람의 몸을 껍데기로 빌리고 있었고, 지금 이 남자는 과거의 시간 속에 있는 절반짜리 체스휘였다. 그래도 결국 둘 다 본질은 같은 사람이었기에, 어쩌면 그래서 나는 다가오는 그를 피하지 못했다.

기울어진 체스휘의 얼굴이 내 위로 떨어졌다. 그 후에 일어난 일은 기억과 비슷했다. 어느 정도 정신을 되찾은 뒤, 먼저 피아노에 머리를 박으며 벌떡 일어나 음악실을 뛰쳐나간 것도 똑같았다.

그래도 다행히 시간이 지나 이성이 조금 돌아온 마리네즈가 나를 찾으라고 보냈던 사람들을 물렸다. 그래서 나는 마리네즈에게 잡혀가는 대신, 도주범의 입장에서 벗어나 다시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다이안 도련님.”

“…엠버!”

“쉿. 목소리를 조금만 낮춰 주세요.”

그러고 나서도 미카엘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기에 나는 다이안을 보러 갔다.

이미 복도를 살펴보긴 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주변을 훑은 뒤 문을 닫고 다이안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바로 뛰어와 어느새 바로 내 앞에 서 있었다.

“너, 그동안 어디 갔었어? 오늘 다시 돌아온 거야?”

다이안은 나를 보고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반응을 보니 지난번처럼 단순히 내가 한동안 방에 찾아오지 않았다고 해서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았고, 아무래도 내가 지난 일주일 동안 저택에 없었던 걸 아는 모양이었다.

나는 다이안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히고 쭈그려 앉으며 그에게 물었다.

“제가 여기에 없었던 거, 어떻게 알았어요?”

“안 보이길래 그냥 다른 메이드한테 물어봤지!”

오오, 다른 고용인에게 내 안부를 묻다니? 혼자 아웃사이더의 외길을 걷던 이 시절의 우리 까칠한 아기 고양이로서는 상당히 큰 시도를 했다고 할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야 기특하고 신통방통하다고 다이안을 마구 오구오구 해 주고 싶었지만, 그의 얼굴을 보니 그래도 될 분위기가 아니었다.

“사정이 있어서 잠깐 저택 밖에 나갔다 왔어요. 워낙 급한 일이라 갑자기 움직이느라, 미리 말도 못 했네요. 미안해요. 사실은 메이드장님한테도 사전에 얘기를 못 하고 가서 방금 혼나고 오는 길이에요.”

나는 선수를 쳐서 다이안에게 얼른 사과를 하며 엄살을 떨었다. 다이안은 잔뜩 뿔이 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다가 내 말을 듣고 움찔했다. 그는 내 갑작스러운 부재에 마음이 상해 있다가 오랜만에 나를 다시 보고는 흥분해서 살짝 씨근덕거리던 숨을 골랐다. 그러면서 여전히 찌푸린 눈으로 날 응시하다가, 마지못한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럼 그 급한 일은 잘 해결됐어? 그래서 돌아온 거야?”

“아니요. 아직 완전히 해결되진 않았어요.”

“그럼 다시 가야 돼?”

“그건 확실하지 않아서 지금 대답을 못 하겠는데….”

“뭐야, 네 일 아니야? 그런데 네가 모르면 어떻게 해?”

“그러게요.”

내 일이지만 내 일이 아니기도 하고, 지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단다.

나는 다이안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의 몸을 위아래로 빠르게 훑었다. 다행히 다이안에게는 지난 일주일 동안 별다른 일이 없었던 듯했다. 마리네즈 같은 위험한 사람이 그에게 해코지하지도 않았던 것 같았고, 조금 창백하기는 해도 껍질을 벗긴 달걀처럼 윤기 있는 그의 얼굴을 보니 따로 아픈 데도 없었던 듯했다. 일주일 전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루시오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나름대로 충격을 받았는지 표정이 안 좋더니, 그래도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는 회복된 눈치였다.

“이상하게 기운이 없네. 그 마무리가 안 됐다는 일 때문에 그래?”

그런데 나와 마찬가지로 내 안색을 유심히 살피는 듯하던 다이안이 방금보다 확연히 누그러진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힘내. 잘 해결될 거야.”

그는 조금 망설이다가 제 딴에는 제법 힘을 들인 듯한, 그러나 나한테는 솜털로 느껴지는 손길로 내 어깨를 토닥이듯이 몇 번 툭툭 두드려 주기까지 했다.

“아유, 이렇게 위로해 줄 줄도 알고! 없던 힘도 막 나네요!”

다이안이 이렇게 귀여운 짓을 하니 내가 어쩌겠는가? 자제하려던 마음을 집어던지고 더는 참지 못해 다이안을 덥석 끌어안고 말았다. 그러자 이런 스킨십에 익숙하지 않은 다이안이 곰한테 덮쳐지기라도 한 것처럼 얼어붙었다. 그런 다이안을 배려해서 나는 금방 그에게서 몸을 뗐다. 마침 조금 전에 방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부터 다이안에게 하려고 생각 중이던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다이안의 어깨를 붙잡고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다이안 도련님. 우리가 지난번에 약속한 거 기억해요?”

“뭐를?”

“기억 안 나요? 진짜? 진짜?”

내 심각한 얼굴을 따라 다이안의 얼굴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어리둥절한 기색을 보이다가,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아, 전에 암호 정한 거 말하는 거야?”

“그래요, 방금은 나한테 왜 확인 안 했어요?”

나한테 볼을 쿡 찔린 다이안이 입술을 삐죽이며 우물우물 대답했다.

“깜빡했어. 오랜만에 보니까 반가워서.”

지난번에 다이안과 나는 우리 둘만의 약속으로 한 가지 암호를 정했다. 진짜 엠버와 나를 구분하기 위해서였는데, 내가 암호를 말했을 때만 가까이 다가오고 그렇지 않으면 굳이 아는 척을 하지 말고 멀리 떨어지기로 했다. 상당히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는 짓이었지만, 다이안은 의외로 흔쾌히 그러자고 수락했다. 그냥 어른의 사정이겠거니 생각해서 넘긴 것 같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꼭 우리 둘만 아는 놀이를 하는 기분이 들어서 조금은 재미있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앞으로는 잊으면 안 돼요! 이렇게 가까이 와서 말을 걸기 전에 꼭 먼저 확인하란 말이에요.”

“알겠어. 다음부터는 기억하면 되잖아.”

이번에 외출했다가 온 이후로 나는 더욱이 엠버를 요주의 인물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다이안에게 다시 한번 신신당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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