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 인간…. 진짜 왜 이렇게 순순히 나하고 동행하는 거지?’
미카엘의 성격 나쁜 부분을 자각할수록, 그가 왜 지금 나와 루시오하고 같이 움직이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부분도 확실히 하고 넘어갔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어서 아까 미카엘에게 그의 목적을 확인하는 걸 깜빡했다. 미카엘이 얘기해 준 저택의 소년들과 혁명 단체의 꿍꿍이를 듣고 충격을 받아서 정신이 그쪽으로 쏠렸기 때문이다.
나야 다이안과 비슷한 신세라고 할 수 있는 루시오의 안위가 걱정스러워서 지금 그를 데리고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설마 갑자기 저택의 아이들이 가련하게 여겨지기라도 한 건가? 미카엘이 그렇게 이타적이고 동정심 많은 성격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내가 전에 본 미카엘의 인물 정보나 라파엘, 혹은 카드리고 가문의 집사 같은 사람들에게 들은 내용에 의하면, 미카엘은 린 도체스터처럼 도살자의 칭호를 가진 상당히 무자비한 남자였다. 그런데 지금 그는 나를 도와 혁명 단체로부터 루시오를 빼돌리는 걸 도와주고 있었다.
원래 가슴 밑자락에 깔려 있던 의심이 바닷바람에 굴러다니는 해변의 모래알처럼 슬그머니 제 존재감을 과시하려고 했다.
어쩌면 지금 미카엘이 이렇게 루시오를 보호해 주고 있는 건 그가 스텔라 소속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가장 합당할지도 몰랐다. 내가 린 도체스터일 때 스텔라로부터 받은 퀘스트에도 레드포드의 아이들과 양육자를 보호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배양실이 있는 그 연구 시설에서 미카엘이 소장을 공격한 것 또한 스텔라의 요원으로서 혁명 단체와 손을 잡은 반동분자를 처리한 것이라고 하면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지금 루시오와 나를 데리고 함께 움직이는 미카엘의 저의가 조금 의심스러워졌다. 조금 전에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미카엘이 비밀 관리국의 문을 이용해 다른 세계로 이동할 것이라고 한 말도 뒤늦게 수상하게 여겨졌다. 설마 같은 편인 척, 나를 안심시켜 놓고 스텔라로 붙잡아 갈 생각인 건 아니겠지?
하지만 나는 곧 고개를 작게 저으며 미카엘에 대한 의심을 한풀 꺾었다. 루시오는 그렇다 쳐도 나를 데려가는 건 그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혹시 혁명 단체의 본거지를 칠 생각이었다면 소장이 있는 시설을 떠나기 전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이용하는 게 나았으리라.
게다가 그때 소장을 공격한 미카엘의 행동은 계획적이라기보다는 충동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이건 좀 막연한 믿음이었지만… 미카엘이 나를 위험하게 만들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결국 이것도 원점이네…? 뭐야, 따져 보니까 생각보다 미카엘에게 캐낸 게 많지 않잖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카엘과의 대화에서 굉장히 많은 수확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을 좀 가라앉힌 뒤에 침착하게 다시 생각해 보니 반도 제대로 알아낸 게 없었다. 나는 미카엘에게 속은 기분에 혼자 씩씩거렸다. 이따가 마차에서 내리면 아까 미카엘이 묵비권을 행사한 부분에 대해 다시 제대로 캐내 봐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얼굴을 구긴 채 머릿속에 있는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미카엘에 대해서도 생각하다가, 예전에 다른 사람에게 들었던 그와 관련된 정보들을 집중해서 떠올렸다.
내가 미카엘에 대한 정보를 주로 습득한 건 역시 일전에 라파엘과 함께 카드리고 저택에 갔을 때였다. 그때 내가 라파엘에게 달라붙어서 빨대를 꽂았다고 오해한 카드리고의 집사가 특히 쓸데없는 말을 많이 나불거렸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 집사 때문에 갇혔던 지하에서 이상한 환영을 봤던 것이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분명 미카엘의 유년 시절 모습을 한 소년이 내 눈앞에 어른거렸었는데….
그렇게 인상을 찌푸린 채 기억을 되감다가, 그때 환영 속에서 소년 미카엘을 학대하던 가정 교사 같은 남자가 지껄였던 말이 갑자기 퍼뜩 떠올랐다.
“이래서 카타콤 출신 따위는 억지로라도 맡는 게 아니었는데! 애초에 만들어진 목적도 이루지 못하고 하등 쓸모도 없는 쓰레기가 되어 무덤에 버려진 폐품 주제에 어딜 건방지게…!”
“아직도 카타콤에 가기 전의 옛 시절을 잊지 못한 모양인데, 자신의 입장이 어떤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면 오늘에야말로 확실히 새겨 드리겠습니다.”
머릿속에서 엉켜 있던 실이 다림질이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빳빳하게 풀리는 느낌이 든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서로 닿을 듯 말 듯, 가까이에 흩어져 있던 단서들이 예기치 못한 순간에 자석처럼 끌어당겨져 불시에 연결됐다.
언젠가 레드포드 저택에서 체스휘와 함께 갔었던 한밤중의 화랑이 문득 눈앞에 떠올랐다. 그곳에서 언뜻 내가 목격한, 미카엘과 닮은 소년이 그려진 초상화가 예전과 다른 존재감으로 나한테 훌쩍 다가들었다.
뭐야…. 혹시, 진짜 혹시….
“미카엘 카드리고 씨….”
나는 어떤 인위적인 힘이 나를 조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고개를 돌려 내 옆에 앉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당신 혹시 어릴 때 레드포드 저택에서 살았었어요?”
평소보다 크게 확장된 내 눈에 수려한 남자의 얼굴이 담겼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혹시 당신도 선발되어서 저택에 들어간 배양실 출신… 이라거나?”
‘내가 왜 이런 생각을 이제야 처음 해 봤지?’ 싶기도 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내 입으로 말하고 있으면서도 ‘에이, 너무 억지스럽게 끼워 맞춘 생각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진짜 정답이 어느 쪽이든, 지금 한순간 내 머릿속에 동그란 전구의 불빛이 반짝 켜지는 느낌이 든 건 사실이었다.
지금까지는 미카엘에 대한 이상한 고정관념 같은 게 있어서, 그런 쪽으로 연관 짓지 못했다. 내가 아는 미카엘 카드리고는 스텔라의 선배였고, 린 도체스터와 같은 도살자의 칭호를 가진 남자이자 선임인 라파엘의 의붓형이었다. 그런데 그가 레드포드 저택의 아이들과 같은 존재라니?
나는 미카엘이 그렇다고 말해 주기를 바라는지, 아니라고 말해 주기를 바라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상태로 그의 반응을 주시했다.
“손님, 도착했습니다!”
그때, 조금씩 속도를 늦추던 마차가 완전히 멈춰 섰다. 앞에서 마부가 외치는 소리가 마차 안에 흐르던 기묘한 정적을 깨트렸다.
“길이 번잡해서 마차를 오래 세우지 못할 것 같은데…. 마차 삯 5굴트는 밖으로 나오셔서 여기 제 조카에게 주시면 됩니다.”
먼저 마주하고 있던 시선을 비낀 건 미카엘이었다. 그는 루시오를 데리고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나도 후딱 그를 따라 마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는 동안 미카엘은 마부석에 탄 귀여운 소녀에게 마차 삯을 건네주고 있었다. 분명 수중에 가지고 있는 돈이 없다고 해 놓고 마부에게 지불할 돈은 어디에서 났나 싶었는데, 그가 소녀에게 준 건 돈이 아니라 옷에서 떼어 낸 듯한 커프스 버튼 같은 것이었다. 어린아이의 눈이 찬란한 빛으로 반짝이는 보석을 보고 휘둥그렇게 떠졌다.
미카엘이 어디론가 도망이라도 가 버릴까 봐 서둘러 마차에서 내려선 것이 무색해지게도, 그는 마차에 타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서슴없이 내게 다가와 비어 있는 한 손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붐비는 사람들 속으로 섞여 들어가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이러니 아까 마차에서 그 어린 여자애가 우리를 부부로 오해했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미카엘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발을 재게 움직여 미카엘을 따라 걸으면서 그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진짜? 진짜로 미카엘 씨, 루시오랑 다이안이랑 같은… 그런 거예요? 정말로?”
미카엘은 나를 힐끗 내려다보다가, 맞은편에서 걸어온 사람과 부딪힐 뻔한 나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앞을 보고 걸어.”
그러고는 특유의 서늘함이 감도는 고요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나한테 말했다.
“어…. 아니라고 안 하네?”
나는 부정하지 않는 미카엘을 보고 황망하게 입술을 벙긋거렸다. 만약 내 말이 틀렸다면 최소한 헛소리라고 하든가, 아니면 비웃고도 남았을 텐데 미카엘은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미카엘에게 이끌려 걷다가, 나는 문득 또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어? 잠깐만. 그런데 미카엘하고 린 도체스터는 출신이 같다고 했잖아. 둘 다 무덤인지 카타콤인지 하는 출신이라고 멸시받았었는데…. 그런데 루시오가 마리네즈에게 들었다는 말에 의하면, 그 무덤은 레드포드 저택의 선발에서 탈락한 아이들이 가는 곳이라고 했다. 그럼 뭐야? 설마 린 도체스터도… 레드포드 저택 출신이야?
그러고 보면… 지금 저택에는 소년들밖에 없었지만, 화랑에 있는 초상화 중에는 나이가 비슷한 소녀들의 그림도 있었다. 그러니 예전에는 여자아이들이 저택에 선발되어 머물던 때도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갑자기 휘몰아치듯이 밀려든 새로운 정보들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미카엘 씨….”
“생각보다 빠른데.”
“예? 어? 으앗…!”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강하게 감싸 갑자기 확 끌어당긴 건 바로 그때였다. 나지막한 혼잣말을 읊조린 미카엘이 양쪽 팔로 나와 루시오를 붙잡고 옆으로 몸을 비켰다. 거의 동시에 묵직한 무언가가 부웅, 하고 머리 위로 빠르게 지나가며 공기 중에 거센 파동을 퍼트리는 게 느껴졌다.
우리를 향해 불시에 날아든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미카엘이 한발 일찍 몸을 피하지 않았다면 단번에 머리가 박살 나고도 남았을 것만 같은 속도와 힘이었다.
당연히 나는 흠칫 놀라서 우리를 공격한 게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급히 시선을 움직였다. 하지만 사실은 굳이 내 두 눈으로 확인할 필요도 없이, 미카엘과 나를 노릴 만한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놈의 망할 단체에서 우리가 빼돌린 루시오를 다시 포획하려고 쫓아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