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건물의 문이 봉쇄되기 전에 루시오를 데리고 밖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우리는 곧장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통행국으로 이동했다. 깊은 숲속에 덩그러니 존재하던 성당 같은 건물은 거리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혹시 모를 추격자와 맞닥뜨리기 전에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내가 통행국의 문을 직접 사용한 건 44세계에 갔을 때뿐이었다. 하물며 그때는 관리자가 나를 안내해 줘서, 이런 무인 시설을 이용하는 방법은 몰랐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미카엘이 방법을 알고 있었다. 문을 이용해 세계를 뛰어넘어, 우리는 소장이 있던 곳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마음을 놓고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하지만 루시오를 데리고 갈 곳이 마땅치 않아 고민이었다. 어쩌다 보니 애를 보쌈해 온 셈이 되었긴 한데, 이후의 일이 막막했다. 생각나는 곳은 원래 있던 레드포드 저택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저택의 문이 열리는 주말이 되려면 아직도 며칠이나 시간이 남아 있기도 했다.
“미카엘 씨, 혹시 돈 좀 가진 거 있어요?”
나는 통행국 밖으로 나오자마자 지나가는 사람에게 돈이라도 뜯는 양아치처럼 미카엘에게 물었다. 미카엘은 루시오를 안은 채 헛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나를 쳐다보았다. 눈빛만 보아도 그의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실망하기 전에, 미카엘이 나를 향해 작게 턱짓했다.
“이쪽으로.”
나는 미카엘을 의심하며 앞서 걷기 시작한 그의 뒤를 따라갔다. 낯선 장소가 분명한데 거침없이 걷는 걸 보면, 혹시 미카엘이 전에 와 본 적이 있는 곳인가 싶었다.
가로등이 모두 꺼진 길은 어두웠다. 그래도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니 주변의 풍경을 그럭저럭 식별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어떤 세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꼭 한차례 태풍이라도 휩쓸고 간 것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게 파손되어 있었다. 건물도 그렇고, 길거리에 자라난 가로수와 울타리 같은 것도 본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게 없었다. 바닥에 파손된 물품들의 잔해와 쓰레기도 마구 널려 있어서, 방금도 하마터면 뭔가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가만. 혹시 여기, 어제 공중전화 부스로 처음 이동했던 곳 아니야?’
그런데 계속 걷다 보니 어쩐지 낯선 장소에서 묘하게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의구심 어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면 신원 확인도 없이 바로 이동할 수 있는 세계가 그렇게 흔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경황이 없기도 했고, 또 빨리 움직이느라 아까 우리가 빠져나온 이곳의 통행국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공중전화 부스처럼 아주 비좁은 곳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미카엘은 루시오를 안고 좁은 골목길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가다가 내가 인내심의 한계를 맞아 다시 한번 입을 열었을 때쯤, 앞서 걷던 남자의 다리가 멈췄다.
“일단 오늘은 여기에서 쉬는 게 좋겠어.”
나는 미카엘의 말을 듣고 찌푸린 눈으로 우리가 서 있는 곳을 둘러봤다. 내가 그러는 동안 미카엘은 앞에 있는 문고리를 부수고 작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긴… 빈 건물?”
“최근에 사용했던 흔적이 없으니 그렇겠지.”
미카엘의 말처럼 물건들 위에 살짝 먼지가 쌓인 걸 보니 최소한 오늘내일 잠깐만 비어 있던 집은 아닌 것 같았다. 먼저 길거리에서 본 파손된 건물들과 달리, 여기는 골목 깊은 곳에 위치해서 그런지 망가진 곳 없이 비교적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방금 미카엘이 부순 문고리를 제외하고는 멀쩡했단 말이었다.
좀 더 주변을 살펴본 끝에 나도 이곳은 그럭저럭 안전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골목치고는 지대가 높아 바깥의 상황을 파악하기에도 용이했고, 뒷문도 따로 있어서 혹시 추격자가 쫓아왔을 때 도주하기도 쉬울 것 같았다. 일단은 미카엘의 말을 따라 여기에 루시오를 눕히고, 우리도 한숨 돌리는 게 나을 듯했다.
미카엘이 먼지가 약간 묻은 담요를 찾아내서 털었다. 그런 다음에 담요와 마찬가지로 조금 더러운 소파 위에 그것을 깐 다음 루시오를 거기에 눕혔다. 나는 루시오의 옆에 앉아 잠든 소년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들여다봤다.
루시오는 여전히 색색 작은 숨소리만 내면서 자고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오랫동안 의식이 없는데, 언제까지 이 상태로 있을 거지? 정말 아픈 곳이 없는 게 맞나?
그런데 내가 그렇게 루시오를 살피고 있을 때, 갑자기 미카엘이 자리를 뜨려는 것처럼 문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카엘 카드리고 씨, 어디 가요?”
“바로 여길 찾아내진 못할 것 같으니까 일단 자. 시간이 늦었어.”
“그전에 우리, 해야 할 얘기가 있잖아요?”
나는 이 녀석이 또 말을 돌리려고 한다 싶었다. 그래서 눈을 치켜뜨고 미카엘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그러자 미카엘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잠깐 말없이 쳐다보다가 다시 내게 다가왔다. 그는 팔을 들어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아프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툭 건드렸다.
“대화를 할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은 손길이었는데, 내 몸은 거센 비바람이라도 맞은 갈대처럼 너무나 손쉽게 뒤로 기울어졌다.
“지금 본인의 상태가 어떤지 모르는 모양인데, 당장 쓰러져서 죽을 것 같은 얼굴이야.”
미카엘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정말 내 몸이 천근만근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 주변만 둘러보고 올 거야. 깨어나서 다시 눈을 떴을 때도 옆에 있을 테니까, 지금은 고집부리지 말고 자 둬.”
귓가에 속삭여지는 조곤조곤한 낮은 음성이 자장가와 비슷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던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그래, 일단은 여유가 있을 때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는 게 나을 수도 있지….
그렇다고 해서 진짜로 곧바로 잠들 생각이었던 건 아닌데, 조금 마음을 놓자마자 최면에라도 빠진 것처럼 스르륵 눈이 감겼다.
잠결에 얼핏 미카엘의 손이 내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는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완전히 의식이 끊어져 버렸다.
***
다음 날 아침 소파에 누운 상태로 눈을 떴을 때, 나는 ‘여기가 어디인고?’ 하는 상태로 잠깐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금방 현실을 깨닫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 새벽이야.”
창가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날아와 귓가에 흘러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창문 앞에 서서 밖을 응시하고 있는 미카엘의 모습이 보였다.
“피곤할 테니 좀 더 자도 돼.”
이른 아침 특유의 청명한 고요함과 창문에서 스며든 차가운 새벽빛이 방 안에 넓게 깔려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이 번진 창가에 선 미카엘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옆에 있겠다더니, 정말 미카엘은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방 안에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평온하게 느껴지는 아침 풍경이었다. 어젯밤까지 정신없이 움직였던 건 모두 꿈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 기묘한 고요함에, 나도 모르게 미카엘을 향해 목소리를 작게 낮추게 되었다.
“아니, 더 안 자도 괜찮….”
“음….”
옆에서 작은 신음 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나를 보던 미카엘의 시선이 움직였다. 나도 흠칫 놀라 얼른 소파에 누운 소년을 확인했다.
어젯밤에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까지만 해도 의식이 없던 루시오가 미간을 찌푸리며 흐릿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루시오? 이제 좀 정신이 들어?”
나는 드디어 깨어난 루시오를 보고 서둘러 그에게 말을 걸었다. 루시오는 처음엔 잠이 덜 깨서 그런지 나를 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초점 없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던 루시오가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메이드 누나…. 여긴 어디야?”
나는 그의 질문에 잠깐 멈칫했다. 루시오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래서 일단은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레드포드 저택 밖이야.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 줄게. 그보다 넌 아픈 데 없어? 몸은 좀 어때?”
“나는….”
루시오는 아직 잠기운이 남은 것처럼 느릿느릿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하지만 그는 처음 운을 뗀 이후로 뜸을 들이듯이 바로 말을 잇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내가 다시 한번 루시오를 독촉하려던 찰나에, 갑자기 담요 위에 얹혀 있던 소년의 팔이 힘없이 소파 밑으로 풀썩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내 심장도 덜컹 떨어졌다.
“루, 루시오?”
다시 눈을 감은 루시오를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소년은 미동 없이 누운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사람은 명이 다하기 직전에 잠깐 의식을 찾을 때가 있다는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설마, 설마…?!
“정신 차려, 루시오…! 루시오!”
나는 축 늘어진 소년의 몸을 마구 흔들며 몇 번이나 그의 이름을 다급히 불렀다.
그때, 죽은 줄 알았던 루시오가 스르륵 다시 눈을 떴다. 나는 동그란 소년의 눈을 마주하며 숨을 들이켰다. 그런 나를 향해 루시오가 작게 속삭였다.
“메이드 누나….”
그는 새끼 고양이처럼 힘이 다 빠진 가냘픈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하지만 가까스로 이어진 그의 말은 내 생각과 달랐다.
“나 배고파.”
“…….”
루시오를 흔들던 내 손이 멈췄다. 그때까지도 창가에 서서 내가 혼자 쇼하는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미카엘이 입을 열었다.
“이틀 정도를 굶었으니 기운이 없을 만도 하지.”
“…….”
“나가서 배를 채울 만한 걸 구해 올 테니까 기다려.”
그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한 뒤 내 대답을 듣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나는 어색한 눈으로 문을 나서는 미카엘을 쳐다보다가, 루시오의 어깨를 붙든 손을 조용히 떼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