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을 후벼 파는 듯한 싸늘한 침묵이 소장의 뒷덜미를 누르며 방 안을 얼게 만들었다. 이어진 정적에 괜히 불안해진 소장은 일단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말을 부랴부랴 덧붙였다.
“하지만 완전 적합자로 최종 판명되어서 빈 세계에 들어가기로 내정된 것들은 그때부터 성장을 멈추는 약을 투여받고 가사 상태에 빠지게 되니, 수명이라는 건 별 의미가 없는… 억!”
그러나 그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한 번 더 ‘쾅!’ 하고 큰 소리를 내며 소장의 머리가 테이블에 부딪혔다. 이번에는 뼈를 잘못 맞았는지, 그의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소장은 그의 등 뒤에서 흘러나오는 남자의 기운이 처음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살벌해진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소장의 말에 기분이 아주 나빠진 것 같았다. 소장은 입 안으로 흘러드는 피를 꼴깍 삼키며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했는지 생각하다가, 이내 남자가 분노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확실히 이번에는 소장이 경황이 없어 말실수를 한 게 맞았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이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얘기고, 자네 같은 특수한 경우는….”
그러나 미처 방금 한 말을 정정하기도 전에, 소장은 자신의 목을 부러뜨릴 듯이 세게 움켜쥐어 확 끌어당기는 손길에 말을 더 잇지 못하고 급히 숨을 들이마실 수밖에 없었다.
불빛을 등진 채 그를 관통할 듯이 형형하게 내려다보는 섬뜩한 눈.
그것이 소장이 기억하는 그날 밤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부르려면 진작 부르든가,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사람을 오라 가라야?”
밤늦게 방에서 빠져나온 나는 혼자 구시렁거리며 또 미로 같은 복도를 걷고 있었다. 소장이 이 야심한 시각에 갑자기 나를 호출했기 때문이다.
방금 소장은 내 의사를 묻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시켜 지금 당장 자신의 방으로 오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어차피 나도 아직 잠들지는 않은 상태였지만, 그래도 느닷없는 호출이 영 못마땅했다.
아까는 세라의 말에 수긍하는 눈치더니, 갑자기 또 그 검사인지 뭔지가 하고 싶어진 건가? 내가 봤을 때, 아무래도 소장은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느낌이 살짝 들고 있었다. 물론 아까 낮에 봤을 때는 그럭저럭 정상인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 후에 내가 목격한 것들이….
나는 아까 세라에게 안내받아 도중에 들렀던 배양실을 떠올리며 얼굴을 우그러뜨렸다.
이름이 배양실인 걸 보고 무언가를 키우는 장소라는 건 당연히 짐작하고 있었지만, 설마 그런 걸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커튼을 걷고 방 안쪽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수많은 인큐베이터 같은 장치가 배열되어 있었다. 나는 그 안에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기들을 보고 깊은 의혹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혹시 소장이 고아들을 데려다가 보살피는 건가 싶었다. 예전에 엠버와 세라, 그리고 소장이 같이 찍힌 사진 속에서도 두 소녀와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이 함께 있었으니까.
하지만 단순히 그렇다기에는 느낌이 좀 이상했다. 이제 겨우 걸음마나 떼었을까 싶은 어린아이들은 꼭 잠든 것처럼 누워서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잠귀가 밝은 아이라면 내가 방에 들어온 걸 알고 눈을 뜨거나 잠투정이라도 할 만한데, 그들은 하나같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내가 미심쩍은 마음에 가장 가까이 있는 한 아이에게 살짝 손을 대자, 바로 옆에 있던 장치에서 삐이, 하는 작은 소리가 울렸다. 그 직후, 바로 눈을 뜬 아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한순간 내가 뭘 잘못 건드렸나 싶어서 당황했다. 혹시라도 잠에서 깨어난 아이가 울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 더욱이 숨소리 하나 크게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하지만 내가 걱정한 게 무색하게도, 아기는 나를 보고 칭얼거리는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꼭 알맹이가 없는 빈 껍데기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아이의 모습이 기이했다.
더 기묘한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어느새 소리 없이 눈을 뜬 다른 인큐베이터의 아이들도 전부 내게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오기 시작한 것이다. 갑자기 일제히 눈을 떠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조용히 쳐다보는 아이들의 모습이 어쩜 그렇게 소름이 끼치던지…. 그래서 나는 바로 뒤돌아 그 자리를 피하듯이 서둘러 배양실을 빠져나가고 말았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나 이상한 광경에 나는 괜히 닭살이 돋은 팔을 문질렀다.
‘도대체 그 아이들은 왜 배양실에 있던 거지?’
아이들이 있는 인큐베이터와 거기에 연결된 수많은 장치를 떠올리면, 역시 단순한 이유는 아닐 게 분명했다. 이후에 루시오를 찾아갔을 때 목격한 장면도 수상쩍기는 마찬가지였다.
소장의 허락을 받지 않았으니 몰래 얼굴만 보고 와야 한다고 세라가 신신당부를 해서, 루시오가 있는 방 안으로 직접 들어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문에 달린 투명한 창구로 살짝 들여다보니, 의사처럼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루시오를 침대에 눕혀 놓고 무언가를 열심히 종이에 기록하고 있었다.
그들이 루시오의 팔에 주삿바늘을 찔러 넣고 피를 뽑은 뒤 이상한 장치를 그의 몸에 연결했을 때는 나도 모르게 안으로 뛰어 들어갈 뻔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 세라가 붙잡아서 가까스로 멈췄다.
세라는 그냥 기본적인 검사만 몇 가지 진행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물론 그녀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절친한 친구인 엠버에게 거짓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세라는 내가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 게 이상하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며, ‘아무렴 우리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연구물인데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다루는 게 당연하지, 설마 섣불리 다치게 할 만한 일을 하겠느냐’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늦은 저녁 시간쯤에 다시 한번 몰래 혼자 루시오를 찾아가 보았지만, 그때마다 소년의 옆에는 수많은 사람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가까이 가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일단은 세라의 말대로 그들이 지금 당장 루시오에게 해로운 짓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오늘은 그냥 조용히 상황을 지켜볼 예정이었다.
그래도 역시 이 낯설고 수상한 곳에서 나라도 소년을 지켜 줘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이 들었다. 하여 밤이 깊으면 다시 한번 루시오를 보러 가 볼 생각이었다. 물론 유사시에 이 개복치 같은 엠버의 몸으로 얼마나 활약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아까부터 몸 상태가 별로더라니, 피로가 쌓여서 그런지 해가 졌을 무렵부터는 몸살이 온 것처럼 삭신이 쑤시고 온몸이 아린 느낌이었다. 입맛도 없어서 아까 식사도 억지로 꾸역꾸역 입 안에 밀어 넣다가 말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열심히 먹어 둘 걸 그랬다 싶었다.
‘그보다… 이 길이 맞겠지? 아까 한번 와 본 곳이라 그런지 좀 헷갈리네.’
나는 어두운 복도를 잘 살피면서 걸음을 옮겼다.
중간에 헷갈려서 길을 한번 잘못 들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제대로 된 길을 찾아낸 것 같았다. 그나마 아까 세라와 함께 소장실에 갔을 때 주변을 잘 확인해 둔 게 다행이었다.
밤이 늦어서 그런지, 미로 같은 복도는 아까보다 더 조용한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는 소장실이 있는 상층에 멈춰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면 무엇이 있을지 궁금했지만, 일단 지금은 소장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소장실 앞에 도착해 노크를 하려고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옷소매가 살짝 흘러내려 가면서 엠버의 마른 손목이 시야에 드러났다. 어디에서 묻은 건지, 손목 안쪽에 검은 얼룩 같은 게 묻어 있는 걸 이제 발견했다. 하지만 문질러도 얼룩은 지워지지 않았고, 살갗만 아팠다.
나는 찌푸린 눈으로 손목을 보다가, 일단 소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소장님, 저 왔어요.”
세라를 상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소장과 단둘이 독대하는 건 위험부담이 있었지만, 원래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소장에게 지금 내가 있는 이 건물의 배양실 같은 시설이나, 루시오를 데려온 목적 등에 대해 캐내 볼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세라에게서 정보를 얻어 보려고 했지만, 그녀는 그런 얘기보다는 나와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기가 영 쉽지 않았다. 그러니 이왕 소장의 호출을 받은 김에 이쪽을 공략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 인간이 왜 사람을 불러 놓고 대답이 없지?
“소장님, 저 들어갈게요.”
나는 소장의 허락 없이 그냥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그런데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내가 목격한 건, 나를 반기는 소장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 뭐야, 왜 당신이 여기에 있….”
불빛이 은은하게 어린 어두운 방 안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사람의 형체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는 아까 낮에 헤어진 뒤 어디에서 뭘 하는지 도통 모습을 찾아볼 수 없던 미카엘이었다.
나는 그가 왜 지금 이 야심한 시간에 소장의 방에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눈살을 찌푸리며 무심코 입을 벌렸다가, 이내 미카엘의 발치에 널브러진 사람을 발견했다.
“소, 소장님?”
테이블 밑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소장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얼른 문을 닫고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처음에는 어두워서 잘못 본 줄 알았지만, 소장이 엎어져 있는 바닥에는 그가 흘린 것이 분명해 보이는 핏자국까지 남겨져 있었다.
나는 부릅뜬 눈을 들어 다시 미카엘을 쳐다봤다.
“죽였어?”
미카엘은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눈을 들어 내 얼굴을 마주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감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을 보면,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말을 안 해? 당신이 죽였냐니까?”
내가 다급히 독촉하며 다시 한번 묻자, 그때서야 미카엘의 입술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