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소장은 늦은 시간까지 잠들지 않고 깨어 있었다.
책상 앞에 서 있는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소장은 요 몇 달 동안 가장 기분이 좋은 상태로, 오늘 이곳에 온 소년에게서 추출한 피를 살펴보았다.
작은 유리병 속에 든 피는 영롱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불빛 아래에서 기구로 확대해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희미한 연기 같은 거뭇한 빛깔이 어려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오.”
소장의 눈에 번들거리는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레드포드 저택에서 일하는 닥터 콘라드에게 기본적인 정보는 정기적으로 전달받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추출한 샘플은 이동 중에 변질이 심하게 되어 소장에게 도착했을 때는 쓸모없게 되기 일쑤였다. 소장은 늘 그 점이 아쉬웠다. 그러던 차에 드디어 이렇게 직접 표본을 구해 관찰할 수 있게 되었으니, 소장이 흥분해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18세계의 레드포드 저택에서 어렵사리 빼돌려 온 소년은 지금껏 소장이 직접 본 연구물 중에 가장 걸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소년 역시 아직은 완성품이 아니었지만, 확실히 18세계에서 장기간 머물다 온 표본은 대체품과 어디가 달라도 달랐다. 소장이 지금까지 옆에 두고 있던 에이브릴과 헤스티니아도 연구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긴 했으나, 역시 이런 대체품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도 소장이 데리고 있던 아이들 중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그 둘밖에 없었으니, 끈질긴 생명력 하나만큼은 인정해 줘야 할지도 몰랐다.
‘좀 더 심도 깊은 연구를 하려면, 아무래도 처음 예정보다 관찰 일수를 늘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소장은 아까 다른 연구원들이 소년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 올린 보고서를 들여다보며 고심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이 세상에 나타난 빈 세계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빈 세계의 문을 닫게 할 존재들, 즉 레드포드 저택에 있는 아이들에 관한 연구에 거의 일생을 걸고 있었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장이 정말 은밀히 진행하고 있는 것은 그 아이들을 이용한 어떤 ‘비밀 연구’였다.
후원자들도 그를 믿고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들이는 판국이었으니, 이 연구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만큼 총책임자인 소장도 그들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부담감과 책임감은 일단 뒤로 하고, 우선 지금 당장은 연구할 거리가 늘어나 신이 나는 것이 사실이었다.
‘에이브릴이 그 저택에 두세 달 정도 있었던가? 마침 잘됐어. 두 표본을 비교해서 연구해 보면 더 좋겠군.’
소장은 곧바로 책상 옆쪽에 부착된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야간 근무를 서고 있던 연구원이 바로 응답했다.
- 예, 소장님.
“지금 당장 에이브릴을 불러와.”
한밤중이라 웬만한 사람은 이미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지만, 그런 건 소장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특히 에이브릴과 헤스티니아는 소장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 있는 그의 소유물, 혹은 부속품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든 그의 뜻대로 할 수 있었다.
“이 늦은 밤중에 그 여자는 왜 찾지?”
바로 그때, 갑자기 소장의 등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소장은 흠칫 놀라서 급히 몸을 돌렸다.
문이 여닫히는 소리는 물론이고 조금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다음 순간 소장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어떤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용했던 방 안에 차가운 경악이 내려앉았다.
누군지 모를 남자의 긴 다리가 의자 위에 느슨히 꼬아져 있는 모습이 소장의 시야에 비쳤다. 그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린 채, 고개를 손에 가볍게 기대고 있었다. 불빛이 은은하게 번진 턱과 무심하게 다물린 입술이 공들여 깎아 만든 대리석 조각처럼 매끄럽고 반듯해 보였다.
하지만 그 위쪽으로는 미처 불빛이 닿지 않아, 어둠에 가려진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소장은 허락도 없이 그의 방에 들어와 있는 남자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소장이 짙은 의혹에 미간을 찡그리며 입술을 뻐끔거렸다. 방금 목소리를 들어 보니, 한밤중의 불청객은 이 시설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방에 이렇게 낯선 사람이 들어온 건 지극히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외부인이 어떻게 여기까지 소리 소문도 없이 침입할 수 있었지?
소장은 미심쩍은 눈으로 의자에 앉은 남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오늘 레드포드의 아이를 운반하는 데 동행한 사람인가? 여기까지는 어떻게 찾아왔지?”
“막는 사람도 하나 없던데, 내가 여기에 들어온 게 이상한가?”
조금 전 그랬던 것처럼 태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잇따랐다.
물론 그의 말처럼 이 방을 지키고 선 경호원은 따로 없었다. 하지만 길이 미로처럼 복잡해서, 보통의 방법으로는 그가 있는 이 방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니 단순히 길을 잃어서 여기에 오게 되었다는 말도 통하지 않았다.
소장은 하던 일을 멈추고 책상에 붙은 버튼을 한 번 더 누를까 말까 고민하며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거기에서 손을 떼고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불청객의 얼굴 윤곽이 암흑 속에서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주변의 어둠과 거의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는 생각보다 더 젊어 보였다.
소장은 갑자기 그의 눈앞에 나타난 이 낯선 남자와 지금의 이 수수께끼 같은 상황에 깊은 경계심과 수상쩍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보다는, 늘 쳇바퀴 돌듯이 똑같던 일상에 예고 없이 찾아든 존재에 대한 신선함과 흥미가 더 컸다.
“이 늦은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인가?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그쪽에게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왔지.”
“확인하고 싶은 거라니, 뭘 말인가?”
소장은 의아하게 반문했다. 그러자 정체를 모를 남자가 꼭 이곳이 자신의 방이라도 된 듯이 여전히 편안한 모습으로 턱을 괴고 앉아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살아 있는 인간들 중에 빈 세계의 연구를 가장 오랫동안 진행해 온 자가 맞나?”
소장의 눈에 어린 호기심과 의문이 더욱 짙어졌다.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운 좋게 내가 지금까지 죽거나 연구에 질려서 포기하지 않고, 가장 오래 이 바닥에 남아 있으니 말이네. 자네, 빈 세계에 대해 궁금한 게 있어서 나를 찾아온 건가?”
결국 경계심보다는 호기심이 이겼다. 소장은 지금 당장 비상 버튼을 눌러 사람들을 소집하는 대신,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가 그 맞은편에 앉았다.
“그럼 낮에 오지 않고. 지금은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그래도 마침 시간이 조금 빈 참이니, 잠깐이라면 상대해 주지.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게나.”
소장은 원래도 겁이 없는 편이었고, 지금은 더더욱 폐쇄된 연구실 생활을 한 지 오래되어 공포라는 감정이 마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침입자를 상대로도 두려워하지 않고 서슴없이 굴 수 있었다. 게다가 낮에 방문한 본부 쪽 사람이라면, 연구의 핵심 인사인 그에게 위해를 끼칠 리가 없었다.
물론 소장이 예의 없이 한밤중에 덜컥 찾아온 남자를 굳이 상대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그는 눈앞의 존재가 흥미로웠다. 그래서 방금 호출한 에이브릴이 오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있는 김에 선심을 쓰기로 했다.
방에 어린 불빛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건지, 아니면 원래 눈빛이 그런 건지, 젊은 청년은 주변의 어둠을 모조리 집어삼켜 버릴 것 같은 강렬한 주홍색 눈으로 자신의 앞에 앉은 소장을 응시했다. 소장은 그런 남자에게 점점 더 큰 호기심을 느꼈다. 이렇게 정면에서 남자의 얼굴을 마주 보니, 조금 전부터 은연중에 느끼고 있던 알 수 없는 압박감 같은 것이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소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입술에 서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쪽에게 선택권이 있는 문제라고 착각하고 있군. 어지간히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야.”
명백한 조롱에 소장의 미간에 주름이 그려졌다.
“그래도 순순히 대답하겠다니, 이쪽도 귀찮아질 일이 줄어서 나쁘지 않군.”
하지만 혼잣말을 하듯이 느른히 읊조린 남자가 다음 순간 물어 온 말에, 소장은 젊은이의 치기 어린 건방진 발언을 지적하려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그럼 묻지. 이곳에 있는 배양실, 언제 만들어진 거지?”
소장은 아까보다 더 미심쩍은 눈으로 자신의 앞에 앉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자네, 어떻게 배양실을 알지? 본부에서도 배양실의 존재를 아는 자들은 극히 일부일 텐데?”
남자는 의심 어린 소장의 물음에도 아무 말 없이 대답을 기다리듯이 그를 응시하기만 했다. 소장은 의아해졌다.
이 청년은 혹시 그의 후원자들과 연관이 있는 걸까? 물론 극비리에 진행되는 이 연구에 직접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는 후원자들은 대부분 나이가 지긋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암암리에 몰래 정보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쪽 분야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이 그중에 있을 수도 있었다.
“나도 잘 모르네. 여긴 내가 만든 게 아니라서. 어디 보자, 빈 세계가 처음 생겨난 게 중앙 세계 기준으로 2543년이었고, 그와 관련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게 그 후로 대략 3년에서 5년 사이니까…. 아마 이 시설도 그때쯤 처음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인데.”
소장은 잠깐 고민하다가 남자의 질문에 답변했다.
지금 그가 있는 이 연구 시설은 소장이 처음 이곳을 맡기 훨씬 전부터 존재하던 것이었다.
“그래도 이곳에서 진행하는 연구를 이 정도로 발전시킨 건 내 공로라고 할 수 있지.”
소장은 지금까지의 역사를 찬찬히 되짚어 떠올리다가, 흡족하게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