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오를 남들 눈에 보이지 않게 숨기지 않고, 대놓고 가방 속에서 꺼내 여기까지 안고 온 게 불만인 모양이었다.
“뭐야, 그래서 안 보이게 옷으로 잘 덮어서 왔잖아?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어련히 알아서 잘했을까. 왜 만나자마자 대뜸 시비부터 걸지?”
“시비를 거는 게 아니라….”
오늘 아침부터 갑자기 미카엘의 시종이라도 된 것처럼 굴기 시작한 덩치가 앞으로 나서서 대신 사람들을 상대하기 시작한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에이브릴, 저 남자는 누구야?”
그때, 나처럼 옆의 소리를 듣고 미카엘 쪽을 쳐다보고 있던 세라가 궁금하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한눈에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미카엘에게 흥미와 경계심을 동시에 느끼는 얼굴이었다.
“저 멧돼지 같은 인간이 안 어울리게 저 사람한테는 꽤 서글서글하게 구네? 난 처음 보는데, 본부 쪽 동료인가?”
“어어…. 맞아, 그쪽 사람.”
나는 계속 미카엘 쪽이 신경 쓰여서 세라와의 대화에 주의를 집중하지 못하고 눈을 힐끔거리며 대충 대답했다. 그러는 동안 저들도 소모성 입씨름을 여기서 끝내기로 했는지, 마뜩잖게 말을 이었다.
“오늘 들를 중간 거점까지는 거리가 가까우니, 이제부터 물건은 우리가 옮기도록 하지. 그러니 들고 있는 건 이쪽으로….”
그런데 세라와 함께 온 사람 중 한 명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미카엘이 그를 무시하고 그냥 지나쳐서 걸어갔다. 물론 루시오를 다른 사람에게 건네주지 않고, 여전히 안고 있는 상태였다.
사람들이 ‘이 새끼 뭐야?’ 하는 눈빛으로 자신들을 개무시한 미카엘을 쳐다봤다. 그때, 어째서인지 덩치가 거들먹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거, 시답잖은 실랑이는 그만두고 중간 거점으로 안내나 빨리 하시지. 지금까지 수고는 우리가 다 했는데 중간에 끼어들어서 괜히 숟가락 얹을 생각하지 말고.”
덩치는 얄밉게도 말한 뒤 미카엘의 뒤를 따라갔다. 나와 함께 그 일련의 광경을 목격한 세라가 혀를 찼다.
“우리도 가자, 다들 오랜만에 네가 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어.”
기가 막힌 듯이 얼굴을 구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세라는 그들의 기 싸움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이 여전히 밝은 얼굴로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나는 세라의 말을 듣고 이맛살을 구겼다.
다들 엠버를 기다리고 있다고? 방금 덩치는 이곳에 처음 와 본 것처럼 굴었는데, 엠버에게는 이곳이 익숙한 장소인 모양이었다. 하긴, 세라가 엠버를 반기며 마중까지 나왔을 때부터 짐작한 부분이긴 했다.
그러고 보니 세라가 방금 초면인 미카엘을 보고 덩치와 같은 본부 쪽 동료인가 의문을 품었었지. 그러니 이쪽 사람들은 그들과 파벌이 다른 모양이었다.
나는 세라와 어색하게 팔짱을 낀 채,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회녹색 숲의 오솔길을 걸어 내려갔다.
***
잠시 후 우리가 도착한 곳은 숲의 한 귀퉁이에 세워진 한 건물이었다. 이곳 역시 후미진 숲속에 위치해 있었다. 거리가 멀지 않다는 말은 사실인지, 빗속을 그리 오래 걷지 않아 우리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다만 여기는 무슨 용도로 사용되는 건물인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아까 우리가 떠나온 곳은 고해성사실과 벽 곳곳에 걸린 역십자가 모양의 장식, 또 건물의 구조 등으로 한눈에 종교 시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반면 지금 우리가 들어선 건물의 1층 로비는 흔한 액자나 화병 하나 장식되어 있지 않아서, 건물주의 취향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흰 바닥과 벽을 보고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무척 깔끔한 성격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우리를 마중 나온 사람들이 삭막한 분위기에 약간의 활기를 불어넣었다.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간단한 절차를 밟은 뒤 안으로 들어가서 일단 오늘은 푹 쉬시지요.”
“데려온다는 아이는… 아, 거기에 있군요. 상태를 살펴봐야겠으니 저희에게 주십시오.”
아까 밖에서 아이를 넘기라는 사람들의 말을 이미 한 차례 무시한 적이 있는 미카엘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똑같이 행동하지 않을까 싶었으나, 뜻밖에도 미카엘은 이번엔 그냥 순순히 루시오를 넘겨주었다.
뭐야, 지금은 왜 거부하지 않지? 단순한 변덕인지 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미카엘의 생각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확실히 먼저 마중 온 사람들이 루시오를 물건 취급했던 것과 달리, 지금 만난 이들의 태도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수중에 들어온 루시오를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대하고 있었다. 밖에서 빗방울이 하나라도 튀었을세라 서둘러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고, 또 부랴부랴 체온계를 가져와서 열을 측정하는 등, 그들은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도대체 뭘 하는 곳이기에 바퀴 달린 간이침대 같은 게 있는 거람?
“신원 확인은 이쪽에서 따로 하겠습니다. 한 분씩 안내인을 따라가 주십시오. 소지품 검사도 함께 진행될 예정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순차적으로 신원 확인을 하려나 싶었는데, 미카엘과 덩치에게 각각 다른 안내인이 다가가 섰다.
애초에 문제 될 건 미카엘뿐이지만, 덩치를 구워삶은 방법으로 어떻게든 알아서 하겠거니 싶었다. 실제로도 여기까지 조용히 따라와서 얌전히 있는 걸 보면, 미카엘도 당장 무슨 일을 벌일 생각인 건 아닌 듯했다. 그래도 신경이 쓰이기는 해서 눈매를 살짝 찌푸린 채 미카엘을 쳐다봤다. 그도 마침 나한테 시선을 돌려서 눈이 마주쳤다.
“에이브릴, 넌 이리로 와.”
내 안내인은 세라인 것 같았다. 나는 먼저 미카엘에게서 시선을 떼고 세라를 따라갔다.
“오랜만에 왔으니까 소장님한테 인사드려야지.”
“신원 확인은 안 해?”
“너를? 굳이 뭐 하러?”
세라가 내 말에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웃었다. 세라는 나한테서 아직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엠버와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이상하다는 생각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세라와 나는 새하얀 복도를 걸어갔다. 소장이라는 사람에게 가는 동안, 주로 세라가 재잘재잘 떠들고 나는 그녀가 하는 말을 거의 듣기만 했다. 세라는 정말 엠버와 절친한 친구였는지, 내 반응이 좀 어색하거나 어정쩡해도 신이 난 얼굴로 계속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런데 왜 이렇게 멀어? 정문에서는 안 보였는데, 우리가 들어온 건물 뒤쪽에 다른 건물이 더 있었나?’
나는 세라의 말을 반쯤 흘려들으면서 길을 외우려고 주변을 살폈다.
세라가 나를 안내해 주는 길은 꼭 미로 같았다. 복도의 우측과 좌측을 여기저기 번갈아 움직였다가, 계단을 올라간 뒤 다시 내려가기도 하고, 건물 사이에 연결된 듯한 구름다리 같은 곳을 지나가기도 했다. 마지막에는 엘리베이터라고 할 수 있는 것도 탔다. 엘리베이터 내부의 버튼은 단 두 개뿐이었는데, 세라는 위쪽으로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소장님. 저희 왔어요.”
그렇게 도착한 어느 방 앞에서 세라가 노크를 했다. 들어오라는 대답은 없었으나, 세라는 익숙한 듯이 그냥 문을 열었다.
“소장님.”
“응? 오, 이런. 그래, 벌써 그런 시간이 됐구나.”
책상 앞에 앉아 이상한 그래프가 그려진 종이를 집중해서 보고 있던 남자가 방 안에 들어온 우리를 그제야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어린 시절의 엠버와 세라, 그리고 몇몇 아이들이 찍힌 사진에 함께 있던 바로 그 남자였다. 그런데 고아원 원장 같은 게 아니라, 소장이었어?
“에이브릴, 오랜만이다. 그동안 소식만 전해 듣다가, 이렇게 직접 얼굴을 보니 더 반갑구나. 갑자기 네가 온다고 해서 깜짝 놀랐지 뭐냐.”
세라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역시 나를 제법 반가워하며 인사해 주었다.
“네, 오랜만에 뵙네요, 소장님.”
세라도 소장이라고 부르니까 나도 그렇게 부르면 되겠지? 나는 예의상의 미소를 생긋 지으며 그냥 무난하게 소장의 인사에 화답했다. 다행히 소장도 내가 진짜 엠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환한 얼굴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세라와 내가 서 있는 쪽으로 급히 다가오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거리가 점점 좁혀지면서 그의 눈이 이상하게 희번덕거리는 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몸을 흠칫했다.
“마침 잘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네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이 있었어. 18세계에 장기간 머물다 온 네 몸 상태에 대해 확인해 보고 싶은 것도 있고 말이다. 이럴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소장님, 에이브릴도 쉬어야지요. 지금 막 도착했는데 피곤할 거예요.”
세라는 그런 소장의 모습에도 익숙한 듯이 중간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상황을 중재했다.
“어차피 최소한 이삼일은 여기에 머물 텐데, 먼저 충분한 휴식부터 취하게 하는 게 어때요? 소장님의 일에도 그편이 더 효율적일 것 같은데요.”
세라의 말에 소장이 급히 다가오던 발걸음을 늦추었다.
“그래, 듣고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구나. 하긴, 지금 상태에서는 정확한 수치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소장은 아쉬운 눈으로 나를 봤지만, 지금 당장 나를 데리고 뭔가를 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에이브릴, 그럼 일단 오늘은 푹 쉬어라. 나중에 내가 다시 부르마.”
나는 속으로 의구심을 느끼며 세라와 함께 소장의 방을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돌아왔는데 소장님이 귀찮게 굴지? 그래도 지금만 저러지, 금방 다른 데 정신이 팔릴 거야. 당장 우선순위는 네가 아니라 오늘 데려온 그 아이니까.”
세라가 너도 알 만큼 알 테니 소장의 말은 흘려들으라는 듯이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