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통행국이라니…. 예전에 갔던 44세계에서는 열차가 다니는 역사의 매표소 안에 관리국이 숨겨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있는 38세계는 공중전화 부스로 통로가 연결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사용하지 않은 듯이 붉은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부스는 인적이 드문 골목길의 한구석에 존재감 없이 놓여 있었다.
덩치가 먼저 부스 안으로 들어가고, 입구 앞에서 미카엘이 나한테 먼저 들어가라는 듯이 멈춰 섰다. 나는 아직 아까의 불만이 남아 있는 상태라 그런 그를 살짝 흘겨봤다.
미카엘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코트로 감싼 루시오를 한 팔로 안고 있었다. 그는 또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태연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내 시선을 마주했다. 그 천연덕스러운 모습에 내 얼굴도 더 구겨졌다. 나는 한번 못마땅하게 쯧, 혀를 찬 뒤 앞에 있는 부스로 들어갔다.
겉보기와 마찬가지로, 공중전화 부스의 내부 또한 낡은 느낌이었다. 혹시 망가진 게 아닌가 싶었으나, 덩치가 동전 투입구에 무언가를 넣고 전화기를 집어 들자 빛바랜 부스 안에 희미하게 빛이 들어왔다.
“3명, 현재 입국 절차가 가장 간단한 곳으로.”
통신소와 바로 연결되었는지, 덩치의 입에서 이동을 요청하는 말이 내뱉어졌다. 전화기 너머에서 사무적인 어투의 음성이 어렴풋이 들려왔지만, 소리가 작아서 뭐라고 하는지까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잠시 후, 공중전화기에 ‘012’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팟, 하고 한순간 부스 안의 공기가 바뀌는 느낌이 들었다. 단지 한번 눈을 감았다 뜬 것뿐인데, 어느새 시야에 비치는 풍경이 변해 있었다.
우아아아아!
콰앙…!
그리고 곧바로 거대한 굉음이 귓전을 때렸다. 수많은 사람이 거친 함성과 비명을 내지르며 떼 지어 달려가는 모습이 유리 너머로 비쳤다.
우리는 지금 원래 있던 후미진 골목이 아니라, 큰길 한복판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 안에 있었다. 유리창 밖으로 비치는 세계는 한눈에 봐도 낙후된 곳이었다.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더러운 비포장도로, 곳곳이 부식되고 부서진 낮은 건물들.
우리가 있는 공중전화 부스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갈라져 성난 들소 떼처럼 달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딘가 비정상적으로 보였다. 폭동이라도 일어난 건지, 그들은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과 맨손으로 주먹질을 하기도 했고, 손에 들고 있는 몽둥이 같은 것으로 상대방을 때리기도 했다. 돌이나 병 같은 걸 집어던져 건물이나 물건을 부수는 사람도 있었다. 어디선가 검은 연기가 올라오는 걸 보니 불이 난 곳도 있는 것 같았다.
쾅!
이번에는 큰 소리가 바로 옆쪽에서 들려서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우리가 있는 공중전화 부스에 몸을 부딪친 것 같았다. 하지만 다들 저들끼리 치고받느라 바빠, 안에 있는 우리를 발견하지는 못한 듯했다.
“와, 씨! 완전 난장판이네. 이래서 지금 입국 절차를 따로 안 밟는구나? 바로 다시 이동할 거니까 나가지 말고 가만히 있어!”
집단 광기가 느껴지는 광경에 질렸는지, 덩치가 서둘러 다시 공중전화의 다이얼을 눌렀다.
우리는 그대로 대여섯 번 정도 더 연달아 이동했다. 위치를 추적하기 어렵게 여러 번 우회하여 목적지까지 이동할 생각이라고 하더니, 생각보다 다른 곳에 들르는 횟수가 많았다.
처음을 제외하고는 간단하게나마 입국 절차라는 게 필요하긴 한 듯, 신원 조회 비슷한 걸 하기도 했다. 이동하는 장소가 모두 공중전화 부스인 것도 아니었다. 어떨 때는 평범한 건물로 이동될 때도 있었고, 또 어떨 때는 엘리베이터 안이나 극장의 박스석 같은 곳으로 이동되기도 했다.
“어디 보자….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장소에는, 맨 처음 이동했던 장소와는 정반대로 고요한 침묵이 사방에 잔잔하게 고여 있었다. 여기도 그리 넓은 장소는 아니라, 세 명… 아니, 루시오까지 포함해서 네 명이 함께 들어와 있으려니 몸이 조금 끼는 느낌이었다. 바로 앞에 다른 방과 연결된 네모난 작은 구멍을 제외하고는 밖을 볼 수 있는 창문이 하나도 없고, 또 사방이 짙은 원목으로 된 벽이라 더욱 답답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
“밖에 아무도 없지? 나가자.”
문을 열고 좁은 방을 나서자 그제야 조금 숨통이 트였다.
“본부로 가기 전에 물건의 상태를 점검받아야 해서 들러야 할 곳이 있어. 따라와.”
어쩐지 사방이 조용하더니, 밖으로 나와 복도를 걷는 동안 마주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긴… 종교 시설인가?’
이곳의 종교가 정확히 뭔지 몰라서 뭐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우리가 나온 곳은 고해성사실과 용도가 비슷해 보였다.
낡은 성당 같은 곳을 빠져나오자, 우거진 숲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외딴 숲속에 자리한 종교 시설인 듯했다.
건물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덩치가 앞서 걷고, 내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부슬비가 내리는 바깥으로 한 발 내딛자마자 내 머리 위로 갑자기 뭔가가 내려앉았다. 미카엘의 코트였다. 루시오에게 덮었던 코트를 벗겨서 내 머리에 씌워 준 미카엘이 나를 지나쳐 먼저 걸어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앞서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오묘하게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뭐야, 혹시 지금 비 맞지 말라고 나한테 옷을 덮어 준 건가?
“이걸 왜 나한테 줘요? 다시 가져가요.”
미카엘을 뒤쫓아 가서 다시 코트를 넘겨주려고 했지만,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 정도 비는 맞아도 돼.”
“당신은 몰라도 루시오는 안 될 것 같은데요?”
내 말에 그제야 미카엘이 눈동자만 움직여 나를 힐끗 쳐다봤다.
“아닌 것 같은데.”
“뭐라고요?”
“그쪽이 이 루시오라는 애보다 더 약해 보인다고.”
미카엘은 꼭 내가 가끔 다이안을 보는 것 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스트레스만 받아도 죽을 개복치를 보는 듯한 눈으로 말이다. 물론 나보다는 미카엘의 시선이 훨씬 더 노골적이고 기분 나빴다. 꼭 하찮은 미물을 보는 듯한 시선에 나는 주먹에 빠직 핏대가 서는 것을 느꼈다. 물론 엠버의 몸이 약해 빠진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면전에서 열두 살짜리 어린애와 비교당할 일인가?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이거나 애한테 잘 덮어 줘요.”
오기가 들어서 내가 더 고집스럽게 부득불 코트를 루시오에게 덮어 주자, 미카엘이 마뜩잖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뭐야? 이거 그냥 가랑비 아니야? 비가 그렇게 많이 내리지도 않는데, 왜 별것도 아닌 일로 싸우는 거야?”
앞서 걷던 덩치가 고작 이 정도 비에 누가 코트를 덮느니 마느니, 하면서 티격태격하는 우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구시렁거렸다.
그런 그에게 미카엘의 시선이 미끄러졌다. 미카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에게서 어떤 압박을 느꼈는지 덩치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러다가 이내 그가 알겠다는 듯이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 참, 상대적으로 내가 괜히 매너 없는 사람으로 보이게…. 내 옷을 벗어 줄 테니까 내려갈 때까지 이거라도 잠깐 덮고 있든가.”
덩치가 주섬주섬 겉옷을 벗어 그걸 나한테 내밀었다. 나는 이놈까지 왜 이러나 싶어서 차게 식은 눈으로 그 모습을 쳐다보기만 하고 덩치가 준 옷을 받지 않았다. 더군다나 좋은 냄새가 나는 미카엘의 코트와 달리 이 녀석이 내민 옷에서는 땀내가 폴폴 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나처럼 찡그린 눈으로 덩치의 겉옷을 내려다보던 미카엘이 손을 움직였다. 그는 자신의 코트를 아까처럼 나한테 휙 던져 주고, 대신 덩치가 벗은 겉옷을 가져가 루시오에게 덮었다. 그러고 나서 먼저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 난 외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덩치가 따르고, 나도 하는 수 없이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마지막까지 덩치 게 아니라 자기 코트를 나한테 주고 가다니…. 미카엘도 나 못지않게 고집이 센 게 분명했다.
“에이브릴!”
그렇게 한 2, 3분 정도 걸었나?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던 건물 안과 달리, 오솔길을 내려가자마자 위쪽으로 올라오고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쳤다.
그런데 가장 앞에서 나를 발견하고는, 곧 반갑게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사람의 모습이 기묘하게 눈에 익었다. 흩날리는 긴 검은 머리칼이 좀 더 가까워졌을 무렵에서야 나는 지금 내 시야에 비친 여자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앗, 세라…!”
메이드 세라의 트레이드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검은 단발이 아니라, 지금은 긴 머리를 하고 있어서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은 레드포드 저택의 메이드복을 입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응? 세라라니? 뭐야, 그 이름은?”
그런데 그녀는 내가 무심코 외친 이름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내게 좀 더 가까이 다가와서 우산을 씌워 주며 풋 하고 웃었다.
“혹시 지난번에 지어 준다고 했던 내 가명이야? 난 아직 저택에 가려면 멀었는데?”
헉, 그런데 깍쟁이 같은 세라 언니가 이렇게 순수하게 웃는 건 처음 봤다. 게다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새침하고 도도하던 세라가 지금은 지나치게 친근감 있는 태도로 나를 대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이렇게 반가워하는 건 내가 아니라 엠버일 터였다.
“어쨌든 오랜만이야, 에이브릴! 네가 저택에서 물건을 운반하는 데 동행했다는 소식을 전보로 듣고 내가 마중 나오겠다고 지원했어.”
“그, 그랬구나.”
“이렇게 얼굴 보니까 너무 좋다. 네가 저택에 들어간 이후로 쉽게 만나기 어려워졌잖아?”
세라는 내 손까지 부여잡고 진짜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반가워하듯이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눈을 돌려보니, 세라와 함께 온 듯한 다른 사람들은 덩치와 미카엘 쪽에 붙어 있었다.
“왜 물건을 밖으로 꺼내서 가져왔지? 눈에 띄지 않게 옮기는 게 기본 수칙이었을 텐데.”
그런데 그들은 세라와 달리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미카엘이 안고 있는 루시오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