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새 둘이 많이 친해졌나 보네요….”
나는 석연찮은 기분으로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덩치는 이번에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이, 오히려 나를 헛소리하는 사람처럼 쳐다보았다.
“무슨 이상한 소리야? 하룻밤 새 많이 친해졌다니. 하루 이틀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뭐라고요?”
나야말로 지금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이 지금 뭐라는 거지? 미카엘과 하루 이틀 지낸 사이가 아니라고? 분명히 어제 처음 만나서 서로 통성명… 은 아니고, 얼굴을 텄는데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창가에서 달그락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려온 것은 덩치와 내가 영문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서로를 마주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미카엘이 태연히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창틀에 내려놨다. 그러고 나서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어 싸늘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먼저 나가 있어.”
“아, 시끄러웠어? 그럼 안 되지…. 아침에는 조용히 해야지.”
나는 어제 임시로 정해 놓은 콘셉트를 깨고 미카엘이 말을 한 것에 첫 번째로 놀라고, 또 그것이 명령조인 것에 두 번째로 놀랐다. 그리고 덩치가 미카엘에게 어떤 의혹이나 반발심도 드러내지 않고, 굉장히 순순히 그의 말대로 몸을 움직이는 것에 세 번째로 가장 크게 놀랐다.
“그럼 10분 후에 다시 올 테니까 그때까지 쉬고 있어.”
내가 멍청히 입을 벌리고 있는 사이에 덩치는 열심히 주름을 펴던 미카엘의 코트를 의자에 반듯하게 잘 걸어 둔 뒤 문을 나섰다. 나는 남자가 사라진 자리를 얼떨떨하게 쳐다보았다.
“…뭐야. 저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덩치의 눈에 띄는 태도 변화가 몹시 수상했다. 미카엘에게 미친 친화력과 사교성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미카엘은 내 의심의 눈초리를 보고 이번에도 태연하게 반응했다.
“어제부터 저놈 앞에서 안달복달 못 하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좀 더 지켜보려다가, 귀찮아져서.”
나는 미카엘의 답변을 듣고 허, 기가 찬 헛웃음을 흘렸다. 미카엘이 말한, 안달복달 못 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는 사람은 당연히 나를 지칭하는 것일 터였다. 아니, 그럼 도중에 귀찮아지지 않았다면 계속 옆에서 내가 불편해하는 꼴을 보기만 할 생각이었단 말인가? 그런데 도대체 미카엘은 무슨 수로 덩치를 자기 편으로 만든 거지?
그러다 나는 퍼뜩 레드포드 저택에서 미래의 체스휘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전에 체스휘와 함께 있을 때, 몇 번인가 무조건 그의 말을 따라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한동안 잠깐 존재 자체를 잊고 있던 라파엘도 체스휘에게 조종당하는 것처럼 굴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오늘도 덩치에게 그런 방법을 사용한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미카엘의 얼굴을 찌푸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도대체 뭐부터 물어야 하는 거지?
아까까지만 해도 미카엘을 다시 보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정작 이렇게 그의 눈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진짜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가 현실의 나를 알고 있는 건 절대 쉽게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택에서 데려온 아이를 보고 싶어 했었지.”
하지만 미카엘은 꼭 어제 일을 완전히 잊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고요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내게 작게 턱짓했다.
“확인해 봐. 어제부터 궁금해했잖아.”
솔직히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은 따로 있었지만, 미카엘의 말대로 어제부터 루시오의 안위가 걱정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마침 이상하게 말문이 막혀서 주저하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미카엘을 한 번 힐끔 쳐다본 뒤, 바로 걸어가서 테이블 위에 놓인 가방을 열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이지? 가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부릅뜬 내 눈을 마주한 미카엘이 입매를 느슨히 풀어 끌어올리며 다시 한번 내게 턱짓했다.
“거기 말고.”
나는 미카엘이 가리킨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낡은 침대가 놓여 있었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서둘러 가까이 다가가자, 침대 위에 누운 검은 머리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 내가 서 있던 문가에서는 두꺼운 이불 때문에 거기에 폭 파묻힌 소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듯했다.
“루시오. 루시오?”
나는 깊이 잠든 것처럼 보이는 소년을 흔들어 깨웠다. 하지만 어제저녁에 그랬듯이, 그는 외부의 자극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계속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루시오의 모습을 보자 경각심이 들어서 얼굴이 굳어졌다. 손을 움직여 루시오의 상태를 좀 더 면밀하게 살폈다.
일단 다행스럽게도, 소년은 숨을 고르게 내쉬고 있었다. 들숨과 날숨의 간격이 규칙적이고 평온한 느낌인 데다, 몸에서 열이나 식은땀이 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런 걸 보면, 최소한 병이 나서 이렇게 잠들어 있는 건 아닌 듯했다.
미카엘이 루시오를 언제 꺼내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얼마 동안 가방 속에 웅크리고 있던 몸이 불편하지는 않나 싶어서 이불에 덮인 손과 팔도 주물러 주었다. 그러고 나서 관절이나 뼈에도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소년에게서 다시 손을 뗐다.
물론 내가 의사는 아니라서 정확한 상태를 진단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봐서는 딱히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그런데 왜 계속 눈을 뜨지 않는 거지?
“혹시 루시오가 잠깐이라도 깨어났었어요?”
“아니.”
“어젯밤에 어디가 아파서 앓거나 하지는 않았고요?”
“계속 지금 보는 상태 그대로였어.”
“그런데 왜 아직도 자는 건지 혹시 알아요?”
“오염되지 않은 공기에 육체가 바로 적응하지 못해서 그런 거겠지.”
미카엘의 단조로운 목소리를 듣고 나는 침대 위에 누운 루시오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오염되지 않은 공기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레드포드 저택의 검은 공기를 말하는 건가?
그곳에 있는 아이들이 저택 밖으로 나왔을 때 적응기가 따로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쩌면 외부 환경에 민감한 어린아이들이니 그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거의 다 됐군. 대충 살펴봤으면 그만 나가지.”
그때, 창가 앞에서 움직인 미카엘이 내 뒤로 다가왔다. 그는 침대 위의 이불을 걷고, 누워 있는 루시오를 안아 들었다. 혹시 그를 다시 가방 속에 넣으려는 건 아닌가 아주 잠깐 의심했으나, 미카엘은 루시오를 한 팔에 안은 상태로 문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급히 손을 뻗어 그런 미카엘을 붙잡았다.
“잠깐! 나가지 말고 잠깐만 기다려요. 아직 10분 안 지났잖아.”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미카엘과 단둘이 있게 될지 모르는데, 가장 중요한 얘기를 끝내지 않고 이대로 그를 내보낼 수는 없었다.
“당신, 나랑 해야 할 말 있잖아요. 조금이라도 괜찮으니까 어제 하던 얘기나 마저 하고 가요.”
다행히 미카엘은 걸음을 멈추고 그의 팔을 붙잡은 나를 내려다보았다.
“해야 할 말.”
내 말을 곱씹듯이 나지막하게 되뇌어 읊조린 미카엘이 나한테 붙잡힌 팔을 움직여 내 손을 떼어 냈다. 미카엘이 섞여 있던 미래의 체스휘를 포함해, 이렇게 그에게 뿌리쳐진 건 처음이라 왠지 나는 살짝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에게 또 놀랐다.
“그건 모르겠고, 어제 일 중에 마저 해야 할 거라면 지금 하나 생각나긴 했는데.”
하지만 다음 순간, 이번에는 미카엘이 굳어 있는 내 팔을 먼저 움켜잡아 그가 있는 쪽으로 끌어당겼다. 방심하고 있던 차에 몸이 그에게 훅 끌려갔다. 곧바로 익숙한 감촉이 입술을 덮었다. 미카엘에게 밴 은은한 차향이 어제와 비슷한 온도를 가진 열기에 뒤섞여, 그의 숨결을 타고 내 안에까지 번져 들었다. 미처 거부할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짧지만 강렬한 입맞춤 끝에 미카엘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똑똑!
“10분 다 됐어. 이제 출발해야 되는데, 혹시 좀 더 쉬어야 할까? 아니, 절대 재촉하는 건 아니고….”
문밖에서 소리가 들려온 건, 내가 갑작스러운 키스 직후에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굳은 듯이 서서 미카엘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퍼뜩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동시에, 미카엘이 잡고 있던 내 팔을 놓으며 앞으로 기울이고 있던 상체를 느슨히 바로 세웠다.
“시간 됐어. 이제 나가야겠군.”
미카엘이 먼저 나를 지나쳐서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그를 붙잡지 못했다.
등 뒤에서 덩치가 문밖으로 나선 미카엘을 반기는 소리가 들렸다. 미카엘이 무슨 수를 쓴 건지, 덩치는 가방이 아닌 미카엘의 팔에 들린 루시오를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카엘과 닿은 곳이 아직도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나는 손을 들어 열기가 밴 곳을 괜히 거칠게 문지른 뒤, 얼굴을 굳히면서 뒤돌아 미카엘의 뒤를 따라 나갔다.
***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미카엘이 미래의 나와 만난 게 아닌가 싶었다.
미카엘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그에게 내 비밀을 이야기한 것도 진짜로 내가 맞는다고 가정한다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는 그런 기억이 없었고, 레드포드 저택에서는 문을 통해 시공간을 넘나드는 게 가능했다. 그 증거로 지금의 내가 이렇게 1년 전의 시간대로 이동해 있는 것이었고 말이다.
그러니 과거의 미카엘이 미래의 나와 만났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오히려 이 상황에서는 그게 가장 가능성이 크고 합리적인 판단인 것 같았다.
“이쪽이야, 바로 연달아 이동할 거니까 다들 잘 따라와.”
우리가 여관을 떠나 향한 곳은 38세계의 통행국이었다. 덩치가 미카엘과 나를 데리고 앞서 눈앞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