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진짜 엠버가 들었다면 무슨 헛소리냐며 황당해할 생각이었다.
미카엘이 갑자기 정답을 쿡 찌르고 들어와서 놀라긴 했지만, 벌렁거리는 가슴을 서서히 가라앉혔다. 동그랗게 부릅떴던 눈도 원래 크기로 되돌렸다.
내가 엠버든 아니든, 미카엘에게 그것을 증명할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엠버가 아니면, 자기가 뭐 어쩔 건가? 나는 죄지은 것도 없는데, 설령 미카엘에게 뭔가를 들켰다고 해도 이렇게 동요할 이유가 없었다.
“별….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자꾸 하고. 이상한 사람이야.”
나는 헛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읊조리며 부담스럽게 가까이 붙어 서 있는 미카엘을 밀쳤다.
“비켜요. 루시오한테 가 봐야 하니까.”
그런데 이 남자는 몸이 대리석 같은 돌로 만들어지기라도 했나? 뭐 이렇게 꼼짝도 안 해?
그래도 문이 바로 옆에 있어서, 어정쩡하게 팔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다.
쾅!
하지만 조금 열린 문은, 미카엘의 손에 의해 다시 가차 없이 닫혀 버렸다.
“알아듣지 못할 말이 아닐 텐데.”
그리고 이어서 고막을 파고든 말에 나는 숨을 멈추고 말았다.
“이하린.”
꼭 실에 묶여 조종당하는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상태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조금 전 귀에 울린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내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을 다시 올려다봤다.
“이하린.”
그리고 차마 외면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렬한 광채를 발하고 있는 노을빛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미카엘은 친절하게도 방금 그의 입으로 내뱉은 말을 다시 한번 내게 속삭였다.
“당신 이름 맞잖아.”
조금 전에 미카엘이 내가 엠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맞혔을 때 이 이상 놀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당치도 않았다.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거칠게 요동치는 마음으로 미카엘을 마주하고 있었다.
“당신 뭐야…?”
충격으로 꽉 막힌 목에서 가까스로 가느다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당신이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아?”
있을 수 없는 일을 목격한 기분에 뒷덜미가 오싹거리면서 손발이 다 저릿해졌다. 내 반응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나를 주시하던 미카엘의 눈 속에 나로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이채가 일순간 스쳐 지나갔다.
“들었으니까.”
“누구한테?”
내 조급한 반문을 들은 미카엘의 입술이 이내 느릿하게 어스름한 호선을 그렸다.
“누구겠어?”
나도 모르게 밭은 숨을 내뱉었다. 심장이 달음박질치듯이 아까보다 더 빠르게 뛰었다.
“무슨 소리야, 난 당신한테 그런 말 한 적 없….”
“게임을 하는 중이라고 했지.”
미카엘이 단조로운 음성으로 덧붙인 말에 펄떡이던 심장이 밑으로 쿵 떨어져 내렸다.
“억지로 저택에 끌려와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기어이 그의 입에서 내 가장 큰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것까지 파헤쳐져 밖으로 내뱉어진 순간, 내 동요는 정말 걷잡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어떻게….”
그러나 이렇게 내 두 귀로 직접 듣고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원래 가상 현실 게임에서 NPC들은 이 세계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내용을 플레이어에게서 습득하지 못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었다. 설령 바로 눈앞에서 플레이어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NPC는 내용을 인식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미카엘은 지금 아무렇지 않게 내게 ‘게임’이란 얘기를 했다. 게다가 그것을 내게서 직접 들었노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아니라고 안 하네.”
창밖에서 들어온 타오르는 듯한 붉은 석양이 미카엘의 눈을 한결 더 짙은 색채로 물들였다.
“또 알아듣지 못할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이하린이란 사람이 누구냐고, 이번에는 부정 안 해?”
이미 내 얼굴을 아주 가까이에서 마주 보고 있으면서, 미카엘은 내 눈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기라도 하려는 듯이 손을 들어 내 눈가를 가린 머리카락을 옆으로 걷어 냈다. 서늘한 손길이 잘게 떨리는 눈매를 스쳐, 내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하지만 미카엘은 어차피 내가 부정해도 믿지 않을 터였다. 또 내가 더는 아무런 변명이나 핑계를 가져다 붙이며 거짓말할 수 없게 만든 사람이 바로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미카엘 본인이었다.
나는 충격과 혼란, 그리고 경악이 섞인 눈으로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마주했다. 미카엘은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망연히 서 있는 모습을 집요할 만큼 곧은 시선으로 응시하다가, 이윽고 입술에 비틀린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래.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속삭이는 듯한 조용한 목소리가 고막을 간질인 것과 동시에, 옅은 숨결이 내 콧잔등을 스쳤다.
“당신이, 그 여자일 줄 알았다고.”
다음 순간, 몸이 앞쪽으로 훅 끌려갔다. 커다란 손이 머리카락을 움켜쥐듯이 내 뒷머리를 세게 붙들고, 나무줄기처럼 단단한 팔이 허리를 으스러뜨릴 것처럼 강하게 옥죄었다. 내가 처한 상황을 미처 깨달을 새도 없이, 그대로 입술을 아프게 물어뜯겼다.
“잠깐, 만…! 흡!”
반사적으로 나를 붙든 사람을 밀쳤으나, 오히려 한 번 더 입술을 세게 깨물렸을 뿐이었다. 결국 피까지 봤는지, 이어진 거친 입맞춤에서는 비릿한 맛이 났다. 이슬에 젖은 깊은 숲 같은 미카엘의 체향이 나를 온통 뒤덮을 듯이 짙게 파고들어 머리를 아득해지게 만들었다. 나를 옭아맨 몸을 밀어내는 건 둘째치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것도, 잠깐 숨을 고르는 것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내가 겨우 내뱉은 숨 한 조각까지 아깝다는 듯이 미카엘이 전부 집어삼켰다.
힘이 빠져서 휘청거리던 몸이 다시 벽에 닿았다. 가까스로 나를 뒤덮은 남자의 옷깃만 손으로 붙잡았다. 그 후로는 정말 한 치도 더 피할 곳이 없어, 홍수처럼 쏟아지는 입맞춤을 전부 받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만… 해… 읏.”
“내가 그동안 당신을 찾으려고 몇 번이나 그 빌어먹을 문을 넘고 또 넘었는지 모를 거야.”
오랫동안 호흡을 고르지 못한 탓인지, 시야가 일렁이며 번져 보였다. 그 사이로 보이는 미카엘의 눈에는, 예전에 봤던 것과 비슷한 희열 비슷한 광채가 난폭하게 서려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덫에 걸린 사냥감이라도 된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찾아냈어, 결국.”
아주 잠깐 숨을 몰아쉬었을 뿐인데, 미카엘이 다시 내 입술을 집어삼켰다.
“다음에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시 찾아낼 거야.”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 입술을 벌렸으나, 이번에도 그는 내게 기회를 주지 않고 조금 전보다 더 조급하고 집요하게 내 안을 파고들었다.
“시간이 얼마가 걸려도, 당신이 이런 나를 지긋지긋하게 생각해도….”
귓가에 부스러지는 목소리가 점멸하는 빛처럼 흐리게 깜빡거렸다. 녹아내리는 것처럼 붉은 노을빛이 머릿속을 아득해지게 만들었다.
“반드시 다시 찾아내고 말 거야.”
이후 미카엘이 무슨 말인가를 더 한 것 같았지만, 다시 정신이 가물가물하게 흐려져서 이어지는 말은 잘 듣지 못했다.
***
다음 날 새벽, 나는 무척 기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어, 에이브릴. 이제 일어났어? 그렇지 않아도 10분쯤 뒤에 출발하려고 했는데 정확하군.”
단체에서 나온 이름 모를 남자… 서술이 쓸데없이 너무 기니까, 그냥 편의상 이제부터는 덩치라고 부르겠다. 아무튼,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덩치가 나를 알은척하며 인사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방금 막 시야에 비친 광경에 흠칫 놀라, 그에게 대답하는 것도 잊은 채 문가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왜… 저 사람이 이 방에 있지요?”
창가에 앉아 여유롭게 찻잔을 기울이고 있던 미카엘이 말없이 힐끗 눈길을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받자마자 또 몸을 움찔 떨었으나, 미카엘은 어제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집요함이 느껴지는 고요한 눈으로 나를 지그시 응시할 뿐이었다.
“왜는, 어제 이 방에서 지냈으니까 그렇지.”
덩치가 내 물음에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이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오히려 의구심이 더 커지는 것을 느꼈다.
“저 사람이 이 방에 있었다고요? 그럼… 둘이 같이 여기서 잤어요?”
“아니, 나는 다른 방을 잡았는데.”
뭐야, 미카엘이 이 방에서 묵고, 덩치는 방을 따로 잡았어?
어제 덩치는 분명 내가 데려온 미카엘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어차피 하룻밤만 묵었다가 떠날 거니까 이 방에서 다 같이 쪽잠을 자도 된다고 권유하긴 했었다. 그러니 미카엘이 여기에 있는 게 그렇게 이상한 건 아니었지만…. 그럼 어째서 둘이 같은 방을 사용하지 않고 미카엘이 덩치의 방을 빼앗은 꼴이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덩치는 왜 또 순순히 미카엘에게 방을 내어 준 뒤 새로운 방을 잡은 거란 말인가?
“뭐 해? 거기 그렇게 멀뚱히 서 있지 말고 문 닫고 들어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상한 건, 지금 덩치가 보이고 있는 행동이었다. 덩치는 지금 미카엘의 시종이라도 된 것처럼 그가 어제 벗어놓은 듯한 코트를 구김 없이 만들려는 듯이 탈탈 털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혼자만 평온하게 커피인지 차인지를 마시고 있는 미카엘을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제저녁 늦게 미카엘과 헤어지고 나서 이렇게 그를 다시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도대체 어제는 남은 하루를 어떻게 보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미카엘이 내게 던진 폭탄 발언 때문에 나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나서 미카엘과 다시 대화를 나누어 보려고 했으나,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젯밤을 거의 뜬눈으로 보낸 뒤, 동이 틀 무렵에 덩치의 방으로 온 것인데…. 설마 이런 기묘한 광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