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박은 지금 내가 당하는 것 같은데.”
나는 미카엘의 말에 그건 또 무슨 신박한 헛소리냐고 반박하려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미카엘과 내 자세가 좀 그래 보이긴 했다.
“게다가 내가 마차 밖으로 나와서 지금까지 한마디라도 했던가?”
“뭐….”
“사람을 벙어리 취급하는데도 그냥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뒀더니, 도리어 성질을 부리기나 하고.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는지 이해가 안 되는데.”
하긴 그것도… 그렇긴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레드포드 저택을 나와서 지금 이 방에 오기까지, 미카엘은 입도 벙긋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격으로, 지레 위기감을 느껴서 미카엘을 알아서 신분 세탁시켜 주고, 루시오를 데리러 온 저 이름 모를 덩치랑 마찰도 생기지 않게 먼저 중재하고, 미카엘 대신 변명도 해 주고….
갑자기 내가 뻘짓을 한 건가 싶어서 정신적 타격을 좀 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걸 제외하고는 미카엘이 나한테 한 모든 짓이 문제였단 말이다! 그러니 미카엘이 이렇게 무고한 척하면서 시치미를 떼는 건 내가 좀 많이 어이가 없었다.
“말은 안 했지만…! 대신 눈빛으로 협박했잖아! 막 이렇게, 이렇게…!”
나는 발끈해서 미카엘의 눈빛을 흉내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내 정체에 대해 폭로하면 지금 당장 널 땅에 묻어 버릴 것이다! 네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걸 파괴해 버리겠다! 이런 눈빛으로 사람을 막 조종했으면서 지금 어디서 순진한 척이세요?”
사실 내가 이렇게 미카엘에게 큰소리를 치는 건 상당히 과감한 짓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카엘의 얼굴만 보면 입이 달라붙고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져서, 그의 앞에서는 본의 아니게 저절로 말조심, 행동 조심을 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그것뿐이면 내가 말을 안 해요. 애초에 저택에서부터 사람을 마음대로 끌고 나오고, 또 아까도 다른 사람 앞에서 친한 척하면서 남의 팔을 함부로 막 잡아당기고! 그러면서 나한테 아무 짓도 안 한 것처럼 사기를 치려고 하기까지? 사람이 그렇게 더럽고 치사하게 살면 되나요? 예?”
원래 미카엘에게서 풍기는 미묘한 존재감과 압박감에, 그의 앞에서 평소보다 얌전해지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마 레드포드 저택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 이런 내 모습을 본다면,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고 기함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나는 미카엘이 처음만큼 껄끄럽고 무섭지는 않았다. 일단 내가 이렇게 건방지게 까불어도 그는 날 때리거나 죽이는 건 고사하고, 화조차 내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미카엘이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건 여전했다. 미카엘이 섞여 있던 미래의 체스휘보다 지금의 그가 대하기 더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동안 미카엘이 뜬금없이 나를 방으로 불러 책을 읽게 하면서 전보다 얼굴을 자주 마주한 덕인가? 아니면 의도는 모르겠지만, 위험한 상황에서 미카엘이 나를 몇 번 구명해 준 게 그동안 알게 모르게 긍정적으로 작용해서 그런가?
어쨌든 처음보다는 미카엘의 범접하기 어려운 아우라에도 무뎌진 감이 없잖아 있었다.
게다가 의외로 미카엘은 내가 말을 가끔 필터 없이 내뱉거나 가끔 불손하게 쳐다봐도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어떨 때는 혹시 감정의 일부분이 마모된 사람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으니….
가끔 행동이 제멋대로이긴 했지만 그래도 폭력적으로 군 적은 없었고, 가끔 사람을 불편하게 빤히 쳐다보는 것도 그냥 다른 사람과의 거리감을 좀 이상하게 재서 그런가 싶었다.
…그런데 뭐지? 왜 내가 지금 나도 모르게 미카엘을 또 살짝 두둔해 주고 있는 거지? 원래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더라?
아, 그래! 아무튼, 요점은 이거였다. 미카엘은 이렇게 그를 좋게 봐주려고 노력하는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미카엘에게 어디 한번 양심이 있으면 더 말해 보라는 듯이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보일 듯 말 듯한, 기묘한 미소를 입술 끝에 매달고 있던 미카엘이 고개를 가볍게 까딱였다.
“말 잘하네. 나한테 협박당한 사람치고는.”
나는 솜털조차 간지럽지 않다는 듯한 미카엘의 반응에 부아가 치밀었다.
“어쨌든… 뭘 원해서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뭔가에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절 데려온 거면 도움이 별로 안 될걸요?”
“응, 그건 그럴 것 같긴 해.”
…뭐지? 먼저 말을 꺼낸 건 나인데, 미카엘이 너무 쉽게 수긍하니까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또 은근히 불쾌해졌다.
“애초에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어. 그냥 거기에 혼자 놔두고 오기 불안해서 데려온 거니까.”
하지만 무심히 이어진 미카엘의 말에는 기분이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게 좀 이상해졌다.
혼자 놔두고 오기 불안해? 뭐를? 설마 날 말하는 건가…?
“…뭐야, 날 걱정해서 데리고 온 거라고?”
“나야 거슬리는 것들은 그냥 전부 죽여 버리고 나와도 되지만, 그런 건 원하지 않잖아?”
미카엘이 내 말이 틀리냐는 듯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나는 잠깐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그 눈을 마주했다.
확실히 레드포드 저택을 떠나기 직전에 마리네즈와 사이좋게 서로를 협박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기는 했다. 어쩌면 미카엘의 손에 이끌려 바로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면 훨씬 난감한 상황에 직면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막상 미카엘에게 내 안위를 걱정했다는 듯한 말을 들으니 좀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아, 잠깐. 나 또 되게 순진하게 이 녀석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는데?’
나는 또 자각 없이 미카엘의 말에 넘어가 깜빡 속을 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맛살을 구겼다.
“참나, 내가 그런 소리를 또 믿을까 봐? 그런 것치고는 날 여기에 데려와서 그쪽이 얻은 이점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요?”
“방금은 나한테 별로 도움이 안 될 거라고 하더니.”
“그건! 앞으로의 일을 말하는 거고.”
이 자식이, 솔직히 지금까지는 도움이 됐잖아…! 내가 일시적이지만, 그래도 네 신분 세탁까지 해 줘서 다음 장소까지 동행할 수도 있게 됐는데!
“하여튼, 미카엘 카드리고. 당신, 마리네즈가 루시오를 빼돌릴 걸 어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죠?”
나는 쓸데없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한번 진지한 대화를 시도했다.
미카엘은 말없이 나를 쳐다봤지만, 나한테는 그 모습이 긍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 왜 저택에 남아서 루시오를 밖으로 내보내지 못하게 막지 않고 여기까지 같이 온 건데요? 솔직히 목적이 뭔지 모르겠거든요?”
물론 내가 이렇게 묻는다고 해서 미카엘이 순순히 지금 생각 중인 걸 이실직고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혹시 날 앞세워서 뭘 어떻게 해 볼 생각으로 데려온 거면 일찌감치 노선 바꾸라고요. 어차피 내가 아까 그 남자한테 당신을 영입할 거라고 거짓말한 것도 임시방편일 뿐인 거 알지 않아요? 신원 확인이 안 된 사람은 중간까지밖에 같이 못 갈 게 뻔한데.”
사실 이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였다. 전에 갔었던 사이비 단체의 모임에서 얼핏 확인하긴 했지만, 여기 임원들의 계급은 전부 나뉘어 있었다. 그러니 미카엘을 미래의 동료로 취급해 준다고 해도, 중요한 사람들이 있을 진짜 본거지에 데려갈 리는 없는 것이다.
“아까 그 남자나 나나,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운반책일 뿐이니까 혹시 우리를 인질 삼는다고 해도 위에서는 눈 하나 깜짝 안 할 테고….”
그렇다고 해서 엠버가 그렇게까지 비중 있는 인물인 것 같은 느낌도 아니었다. 일단 그렇다기에는 너무 개복치잖아!
아니, 물론 콘라드도 신체 능력이 쥐똥인 데다 전투력도 없어 보이는 건 마찬가지긴 하지. 하지만 일단 그쪽은 의사라는 특수한 직업이었으니 가산점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난 진짜 아는 게 없어요. 나한테 정보를 불라고 아무리 협박해도 아무것도 말 못 해 줘요.”
그러다가 마침 생각난 사실 하나도 얼른 덧붙였다. 미카엘은 내 말을 안 믿을지도 모르지만,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사실이었다! 난 엠버가 아니라 중요한 정보는 진짜 하나도 모른단 말이다.
미카엘은 내가 말하는 동안 끼어들지 않고 내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기만 하다가,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이상하네. 엠버 그린로스 양은 나한테 억지로 끌려와서 불만이 많을 텐데, 왜 날 걱정해 주는 것처럼 들리지?”
나는 미카엘의 말에 무심코 멈칫했다.
사실 마차에서 내려 단체에서 나온 사람을 보자마자 미카엘의 정체를 숨겨 준 것도 그렇고, 지금 굳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도 나중에 그가 곤란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기는 했다.
이유를 따지자면… 일단은 나도 미카엘과 같은 스텔라 소속이지 않은가? 내가 진짜 엠버도 아닌데, 딱히 좋은 일을 하는 것 같지도 않은 혁명 단체를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할 이유가 없었다.
솔직히 수상한 건 스텔라도 마찬가지였지만, 어린애를 물건 다루듯이 말하고 취급하는 혁명 단체의 사람들을 두둔하고 싶지도 않았다. 루시오를 밖으로 빼내기 위해 어제 마리네즈 측에서 벌인 일들도 끔찍했다.
일단 나는 루시오가 걱정되어서라도 그를 따라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어차피 끝까지 동행하기 어려우니, 차라리 정체를 들켜서 문제가 터지기 전에 헤어지는 게 낫지 않나 싶었다.
물론 미카엘이 들으면 쥐가 고양이를 생각한다고 비웃을지도 모르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사실 내가 미카엘만을 위해서 이러는 건 아니었고, 그와 엮여서 나까지 난처해질까 봐 겸사겸사 치워 버리려는 게 좀 더 솔직한 심경이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