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네즈는 나한테 신경이 쏠려 있던 탓에 마차가 멈춰 선 걸 이제 눈치챈 모양이었다.
“젠장, 곧 자정인데 저 멍청한 마부가 왜….”
곧 저택의 문이 닫힐 시간이었다. 그런 와중에 마차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것이 더욱 이상해 보였다.
“가서 확인해 봐야겠으니까 너도 따라와.”
마리네즈가 내 허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우리 둘 다 아직 서로에게 겨눈 무기를 치우지 않고 있었다.
“빨리.”
어차피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해 경계하는 상황이었다. 사실 나야 이대로 시간을 끌다가 마차가 정문을 빠져나가지 못해 마리네즈가 망해도 상관없었지만, 저 안에 타고 있는 소년이 신경 쓰이긴 했다. 그래서 괜히 실랑이하지 않고 잠자코 걸음을 옮겼다.
“허, 참. 갑자기… 시면, 위험….”
마차에 가까워질수록 마부석에 앉은 존이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마부가 갑자기 헛것을 보고 혼잣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가정하에, 아무래도 저 앞에 갑자기 누가 나타나서 마차가 멈춘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거기 누구 있어?”
마리네즈가 마차로 다가가면서 경계심이 어린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앞에서 들려오던 말소리가 멈췄다. 곧이어 작은 발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내 시야에 나타난 사람을 보고 마리네즈와 나, 둘 다 숨을 들이켰다.
‘미카엘…?’
“이 늦은 시간에 누가 레드포드 밖으로 마차를 내보내려고 하나 했더니.”
보호색처럼 어두운 색상의 코트를 입은 미카엘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우리를 응시했다.
“이상한 조합이네.”
“…….”
“이 마차에 있는 게 뭔지 더 궁금해지게.”
똑똑.
손을 들어 마차의 뒷문을 노크하듯이 두드린 미카엘이 다음 순간 주저 없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이 벌컥 열리고, 서늘한 시선이 마차 안에 날아가 꽂혔다.
“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군.”
“…….”
“이상한 물건도 없고. 이 짐가방 말고는.”
고요한 목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실려 와 나지막하게 두 귀에 울렸다. 기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와중에, 돌연 마리네즈가 의심하는 눈초리로 나를 휙 돌아봤다. 곧 소리를 낮춘 목소리가 내 고막을 파고들었다.
“너…! 설마 저 남자한테 네가 말한 거야?”
“돌았어요? 내가 왜요?”
“그럼 들켰어? 이런 멍청한 것!”
다짜고짜 내 탓을 하고 보는 마리네즈의 행태가 어이없었지만, 갑작스러운 미카엘의 등장에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마리네즈는 초조함이 서린 숨을 한번 들이마신 뒤, 태연함을 가장한 목소리로 미카엘에게 말했다.
“제 짐을 고향에 보내려고 하는 것뿐이에요. 이번 주말 동안 꼭 처리해야 하는 일이었는데, 아시다시피 어제 일 때문에… 깜빡 잊고 있다가 자정이 지나기 전에 급히 마부에게 부탁한 것뿐이라고요.”
“그래?”
미카엘은 마리네즈에게 뭐라고 더 추궁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어제 그랬던 것처럼 다소 냉소적인 눈으로 좌석 위에 놓인 짐가방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거기에 손을 올렸다.
꼭 가방을 열 듯 말 듯, 장갑을 낀 손으로 테두리를 느릿하게 훑는 모습에 옆에서 전해지는 마리네즈의 불안함도 짙어졌다.
그러다가 미카엘이 루시오가 들어 있는 가방을 마차의 안쪽으로 밀었다. 제법 묵직한 무게를 가진 가방이 좌석의 시트를 긁으며 옮겨졌다.
“잠깐!”
그 모습을 본 마리네즈가 급히 마차의 뒷문 쪽으로 걸어갔다.
아니, 그런데 나는 또 왜 끌고 가는 거야?
“왜 남의 소지품을 그렇게 마음대로 건드리는 거예요? 제 짐가방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아니, 없어.”
미카엘은 이번에도 냉소적으로 대꾸한 뒤, 가볍게 마차에 올랐다.
“마침 나하고 목적지가 같은 듯하니 내가 동승하지.”
“어, 엇?!”
갑자기 미카엘이 손을 뻗어 나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나는 마리네즈의 옆에 있다가 졸지에 마차 안으로 훅 끌려 들어가 미카엘의 무릎 위에 엎어졌다. 그 직후, 곧바로 등 뒤에서 마차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출발해.”
미카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멈췄던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에서 마리네즈가 뭐라고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출발한 마차는 멈춰 서지 않았다.
“뭐… 뭐야?”
나는 갑자기 벌어진 황당한 상황에 잠깐 넋을 놓고 있다가, 이내 부릅뜬 눈을 들어 미카엘을 쳐다봤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미카엘이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웃었다.
내가 미처 그에게 뭐라고 하기도 전에 마차는 레드포드의 정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지금까지 늘 그랬듯이, 저택 밖으로 나가자마자 곧바로 의식이 끊어졌다.
***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과 동시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헉, 또 레드포드를 벗어나는 순간 의식을 잃었었구나!
정신을 차리자마자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가방은 좌석 위에 그대로 있었고, 나는 그 옆에 앉은 미카엘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상태였다.
나보다 먼저 눈을 떠 마차의 문 바깥쪽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던 듯한 미카엘이 내가 깨어난 걸 알았는지 시선을 돌렸다.
“…으악!”
바로 코앞에서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기겁해서 펄쩍 뛰어올랐다. 꼭 미카엘의 다리에 올라타 그와 마주 보고 끌어안은 것 같은 남사스러운 자세에 질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차의 문이 닫히기 직전에 억지로 끌려 들어와, 미카엘의 몸 위에 넘어진 상태로 정신을 잃은 게 문제였다.
나는 그와 진하게 밀착한 자세에 소스라쳐서 급히 몸을 일으키다가 좌석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런 나를 보고 미카엘이 실소하듯이 여트막한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혼자 재밌게 노는군.”
혹시 비웃은 건가 싶어서 발끈하려던 찰나에, 그가 마차의 문을 열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
“어? 다, 당신 뭐야?”
그러자마자 열린 문틈으로 놀란 듯한 낯선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분명 이 마차가 맞는데…. 어? 혹시 아닌가? 내가 뭘 잘못 알았나?”
누구인지 모를 남자는 마차에서 내린 미카엘을 보고 당황한 듯했다.
“뭐가 어떻게 된…. 앗, 에이브릴!”
그러다가 그가 마차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문을 더 활짝 열어젖혔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그는 엠버를 아는 듯했다. 그럼 저 남자는 마리네즈에게서 루시오를 전달받기 위해 나온 단체의 동료일 가능성이 컸다. 메이드 세라도 레드포드에서 사용하는 이름과 단체에서 사용하는 이름이 달랐으니,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저 남자가 엠버를 낯선 이름으로 부른 것도 이해가 되었다.
나도 혼란한 정신을 가다듬고 일단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 마차 밖으로 나갔다.
“난 또 일이 잘못된 줄 알았잖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남자가 곧장 나를 붙잡고 내 귀에 급히 속닥거렸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 좀 해 봐. 같이 온 저 남자는 또 뭐고?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러게, 나도 이게 뭔 상황인지 잘 모르겠는데.
나는 대답을 구하는 눈빛으로 미카엘을 쳐다봤다. 그런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숙여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뭐야? 나한테 어쩌라고 이런 눈으로 봐? 날 대뜸 납치해 온 건 댁이잖아? 그럼 당신이 나랑 이 남자를 제압하든, 취조를 하든, 알아서 해야지?
하지만 미카엘은 나한테 대신 알아서 하라는 듯이 나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고, 이름 모를 남자도 그런 미카엘을 보고 내게 대답을 재촉하는 시선을 보냈다.
나는 기묘한 압박감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엉겁결에 입을 열었다.
“어어, 동료…가 되어 줄 사람?”
“뭐?”
“그러니까, 내가 영입 제안을 했다고…요.”
사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이런 거짓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젯밤의 낌새도 그렇고, 미카엘은 가방 안에 있는 루시오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게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가방을 열어 아까 저택 안에서 마리네즈의 거짓말을 폭로하는 게 아니라 굳이 마차에 올라 여기까지 온 걸 보면, 그에게는 다른 목적이 더 있는 듯했다.
자세한 건 들어 봐야 알겠지만… 설마 나를 앞세워 단체의 본거지에라도 뚫고 들어갈 생각인 건가? 그럼 나는 인질 비슷한 용도로 데려온 건지도 몰랐다. 확실히 엠버는 미카엘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여도 찍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죽을 만큼의 최약체였으니까.
“그래…? 네가 영입 제안을 했다고? 그럼 이 사람도 레드포드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이야?”
“그런 셈이죠.”
미카엘의 정체를 여기에서 폭로하는 걸 한순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까닥 말실수 하나라도 잘못했다가는 여기서 나도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남자가 미카엘을 미심쩍은 눈으로 훑어보았다. 하기야, 미카엘의 외모나 분위기 모두 저택의 고용인으로는 보이지 않았으니, 그가 의아해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왜 입도 벙긋 안 해? 이 남자, 설마 말을 못 해?”
그 순간 미카엘이 뭐라고 말하려는 듯이 입을 벌렸다. 하지만 내가 그의 발을 콱 밟아서 막았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서 직설적으로 묻지 마세요. 상처받을 수도 있어요.”
나는 네 생각이 맞는다는 듯이 남자에게 눈짓했다.
미카엘의 말투는 일반 사람답지 않게 고압적인 면이 있는 데다 억양이 귀족처럼 반듯하고 우아했다. 그래서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미카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뜻대로 입을 다문 채로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래도 외부인을 이렇게 갑자기 데려오다니…. 게다가 넌 또 왜 왔어? 물건만 혼자 보내고 동행인은 없을 거라고 알고 있었는데.”
“계획에 살짝 변동이 생긴 부분이 있어서 직접 설명해야 할 것 같아서요.”
남자는 여전히 마뜩잖은 기색이었다. 그래도 이 자리에서 더 따져 묻기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한 듯이 그가 말을 돌렸다.
“그래, 그럼 네가 알아서 직접 보고해. 어쨌든 약속한 물건만 확실하면 문제없지. 자리를 옮겨서 확인하자.”
남자는 직접 마차 안에서 가방을 꺼내, 그것을 들고 옮겼다. 나는 그의 우락부락한 팔근육을 보고 혹시 여기에서 미카엘과 둘이 맨몸으로 싸우면 누가 이길까 아주 잠깐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