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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220)화 (220/300)

마리네즈와 헤어져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여전히 몸에서 소름이 가시지 않았다.

방금 그녀에게서 들은 말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다. 굳이 곱씹어 기억하려 노력할 필요도 없이, 마리네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귓가에 어른거리는 듯했다. 그 내용 중에 충격적이지 않은 건 하나도 없었다.

어쩐지 흘러가는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마리네즈는 엠버와 같은 그 사이비… 아니, 혁명 단체에 소속된 임원이었다.

“여기까지 알아들었으면 나가 봐. 곧 다가올 예정일에 계획을 실행하는 데 차질이 없게 하고. 그때까지는 경솔하게 굴지 말고 조용히 몸 사리고 있어.”

마리네즈의 입에서 지령까지 들었으니 이건 빼도 박도 못 하게 확실한 사실이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마리네즈와 엠버가 체스휘를 사이에 두고 치정극을 벌이는 것 같은 모양새였던 것이야말로 사기였다. 사랑에 미친 여자인 것 같았던 마리네즈의 모습도 어디까지나 레드포드 저택 안에서의 콘셉트, 즉 다른 사람들의 눈을 가리기 위한 속임수 같은 것이었던 모양이다.

“허….”

생각할수록 기가 막혀서 몇 번이나 헛숨을 들이켰다.

아니, 이게 말이 돼? 그게 전부 다 거짓말이라니? 이게 진짜면 둘 다 연기를 너무 잘하는 거 아니야? 지금까지 당연히 마리네즈가 체스휘의 집착 스토커고, 엠버는 원치 않게 그녀의 등쌀에 인생이 피곤해진 경우인 줄로만 알았는데!

하지만 오늘 마리네즈의 말투나 태도를 보면, 체스휘한테 그렇게 푹 빠진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까 본인의 입으로도 말했듯이, 그녀의 관심사는 체스휘보다는 미카엘 쪽인 것 같았다.

‘…아니, 잠깐! 그럼 설마 마리네즈의 유령이 미래의 체스휘에게 집착하던 이유가 그 안에 있는 미카엘 때문이었던 건… 아니겠지?’

방금의 만남을 기점으로 여태껏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과 고정관념이 와르르 무너지고, 머릿속에서 일련의 정보가 재구성되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어지럽게 널려 있던 퍼즐 조각 중 하나가 문득 제자리에 딱 들어맞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순간 뒷덜미가 오싹거리면서 또 피부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새로이 알게 된 이면에 놀란 건 엠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에 내가 강제로 악마의 화원에 끌려가게 된 것도 사실은 모두 마리네즈와 짜고 친 일이었다고 하니, 정말 뒤통수가 얼얼한 느낌이었다. 심지어 거기에 마리네즈의 강압이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마리네즈의 만류에도 엠버 본인이 강행한 일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런 위험을 무릅쓴 이유는, 아마도 체스휘의 동정심과 죄책감을 얻어내 그를 이용하기 위해서….

‘엠버 이 여자도 미친 거 아니야?’

나는 다시 한번 허 참, 탄식한 뒤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하듯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지금까지는 마리네즈가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진짜 제정신이 아닌 건 엠버 쪽이었던 듯하다. 체스휘의 관심을 받기 위해 몸이 다치는 것도 불사하고, 일부러 가련한 피해자인 척 행세한 것만 봐도 확실히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실제로도 체스휘는 엠버에게 미안해하며 내게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보상해 주겠다고 먼저 제안했었다.

이런 뒷배경이 있을 거라고 예상한 건 아니지만…. 그럼 일단은 내가 체스휘의 위기를 한번 막아 준 셈인가?

“참나, 체스휘는 나한테 이렇게 빚진 걸 알기나 할지 몰라….”

“빚지다니, 뭘?”

“……!”

그 순간, 갑자기 들려선 안 될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서 소스라쳤다.

“다, 다이안 도련님?”

아뿔사! 내가 또 뇌를 의탁해놓고 걷다가 몸에 익은 대로 다이안의 방에 찾아왔구나!

“왜 그렇게 놀라? 너… 날 보러 온 게 아니구나?”

다이안은 예전에 언젠가 내가 봤던 것처럼 문 앞에 혼자 오도카니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날 보고 반갑게 아는 척 말을 걸었다. 하지만 어리둥절한 내 반응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지, 그는 금방 얼굴에 우중충한 빛을 드리웠다.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예요?”

“그냥 바람이나 쐬는 중이었어.”

“복도에서요?”

내 물음에 이번에는 다이안이 대답 없이 신발의 앞코로 바닥을 문질렀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나를 보지 않고 살짝 밑으로 수그러진 다이안의 얼굴에는 은은한 실망감이 번져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그가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헉, 설마… 날 기다리고 있던 건가?’

물론 내가 나 좋을 대로 해석한 것일 수도 있지만, 양육자로서의 촉이 이게 단순한 착각은 아닐 것이라고 내게 말해 주고 있었다.

“그, 그렇구나! 마침 다이안 도련님 방에 가는 길이었는데 갑자기 문 앞에서 마주쳐서 깜짝 놀랐네요.”

제길, 엠버인 상태로 웬만하면 다이안과 만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다이안이 이렇게 풀이 죽어서 어두워져 있는 모습까지 목격했는데, 어떻게 여기에서 그냥 뒤돌아 갈 수가 있겠는가?

“그래…? 내 방에 오는 길이었다고?”

아니나 다를까, 내 말을 들은 다이안이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으럼요. 아니면 제가 뭐 하러 여기까지 왔겠어요? 이 근처에 다른 볼일도 없는데.”

“하긴, 넌 손님 방을 담당하고 있으니까 굳이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긴 하지.”

내 말이 신빙성 있다고 생각했는지, 다이안의 표정이 한결 밝게 갰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저절로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고, 다이안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매번 바람을 이런 식으로 쐬어요? 복도에 나오는 것보다는 차라리 방에서 창문을 열고 있는 게 나을 텐데.”

“그건, 혹시 네가 오는지 보려고….”

다이안은 내 질문에 무심코 대답하다가 멈칫했다. 본인도 너무 솔직하게 튀어나온 말에 당황했는지, 내 시야에 비친 그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

다음 순간, 다이안이 창피함을 감추려는 듯이 괜스레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아니라! 그냥 내 취향이 이래! 뭐 불만 있어…?!”

“그럴 리가요! 너무 멋진 취향이라 감탄스러워서요!”

나는 진실한 눈으로 다이안을 보면서 박수까지 짝짝짝 쳐 줬다. 자고로 자라나는 이 시대의 새싹들에게는 칭찬을 아낌없이 해 줘야 하는 법!

하지만 다이안은 순진하면서도 가끔은 눈치가 빨라서 내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그의 얼굴은 나한테 놀림당하기라도 한 듯이, 방울토마토처럼 점점 더 새빨개지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보자 이대로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다이안이 툭 하고 터지는 게 아닐지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호들갑스럽게 손뼉을 치는 걸 멈추고 말을 돌렸다.

“그런데 문은 왜 이렇게 열어 두는 거예요? 겸사겸사 환기시키려고? 캬아, 그렇죠. 맑은 공기에 맑은 정신이 깃드는 법이죠! 아니, 이 나이에 어떻게 벌써 그런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지? 혹시 천재 아니에요? 예? 그런 소리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겹다고요?”

하지만 역시 다이안을 보면 저절로 어화둥둥 내 새끼! 버전에 돌입하게 돼서, 아무리 자제하려고 마음먹어도 별 소용은 없었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나 놀려? 비웃는 거지?”

과거의 다이안은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아서 많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는 내가 고도의 비꼬기 기술을 사용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운 기색이었다.

“그럴 리가요! 제가 다이안 도련님을 비웃긴 왜 비웃어요? 그렇게 오해하시면 저 슬퍼요.”

그 순간, 아주 견고한 방어 기제라도 작동시킨 듯이 경계심을 잔뜩 곤두세운 채 나를 보던 다이안이 멈칫했다. 그는 뭐라고 형언하기 어려운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다이안은 표정을 미묘하게 시시각각 변화시키다가, 또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하며 달싹였다.

그러다가 이내 그가 시선을 내리깔고 내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를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미안…. 기분 나쁘게 하려고 그런 건 아니었어. 내가 오해해서 미안해.”

방금의 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건지, 다이안의 얼굴이 또 약간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나대로, 지금의 다이안에게는 농담조차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멈칫했다. 곧바로 스스로의 실책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다이안 도련님, 아니에요. 저 기분 하나도 안 나빠요.”

몸을 낮춰 고개를 숙인 다이안과 시선을 마주했다.

“오히려 내가 가볍게 말해서 미안해요. 난 그냥 다이안 도련님이 귀여워서 장난을 쳤던 건데….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제멋대로 굴었어요. 나야말로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다이안은 말없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나는 그를 향해 어렴풋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장난이었구나…. 나야말로 오해했네.”

잠시 후, 다이안의 굳은 얼굴이 살짝 풀렸다. 그는 잠깐 주저하다가, 조금 전의 내 물음에 뒤늦게 답변하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방문을 열어 놓는 건… 난 양육자가 없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혼자 밖에 나와 있다가 혹시 모로스가 나오면 바로 방으로 도망가려고 그런 거야.”

예상치 못한 다이안의 답변에 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곧, 잔잔하던 수면 위에 돌멩이가 떨어진 것처럼 속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아… 어떻게 하지? 이 아이를 진짜 어쩌면 좋지?

마음속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치열한 갈등이 생겨났다. 하지만 저울 양쪽에 올려 둔 것들의 가치가 똑같아서 도무지 어느 한쪽에 무게를 더할 수가 없었다. 결국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결론을 내렸다.

역시 안 되겠다. 과거의 다이안도 이대로 혼자 두고 가지 못하겠어.

아까까지만 해도 최대한 빨리 원래의 내가 있던 레드포드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월등했다. 하지만 최소한 마리네즈가 말한 그날까지만이라도 이곳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결심한 뒤, 다이안을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다이안 도련님, 나하고 약속 하나만 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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