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앞에는 왜 계속 그러고 서 있는 거지? 고개 아프니까 빨리 이리 와서 앉아.”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는 편견에 사로잡혀서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를 향한 마리네즈의 표정은 평소와 달랐다. 정확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그동안 나와 마주칠 때마다 눈에 보였던 독기가 오늘의 그녀에게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지금껏 나를 노골적으로 위협할 때와 달리, 마리네즈가 다른 고용인들을 다 떼고 이렇게 혼자 와서 비밀리에 나와 만나려 하는 것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렇다 해서 갑자기 나를 대하는 마리네즈의 태도가 온건해지거나 한 건 아니었다. 지금도 날 보는 시선이 썩 곱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바로 사흘 전에 별관에서 봤을 때만 해도 마리네즈는 질투에 환장한 미친 여자 같았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그냥 성격이 좀 더러운 보통의 평범한 사람처럼 나를 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방금까지의 내 생각과 달리 지금의 마리네즈에게선 내게 해코지를 하려는 것 같은 느낌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뭐야, 계속 문 앞에 서 있을 거야?”
“…….”
“흥, 앉기 싫으면 말아. 하긴, 어차피 오래 같이 있어 봤자 다른 사람한테 들키면 좋을 것도 없고, 또 그렇게 할 말이 많은 것도 아니니까.”
마리네즈는 이런 상황이 익숙하기라도 한 것처럼, 가볍게 콧방귀를 뀐 뒤 내 반응과는 상관없이 말을 잇기 시작했다. 반면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굳어져 버렸다.
“방금은 비꼬면서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지. 너 정말 제법이더라. 체스휘, 그 착해 빠진 남자가 설마 진짜 너 때문에 그렇게까지 절박한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어.”
경직된 손을 움직여, 지금까지 잡고 있던 문고리를 놨다. 지금 이 상황이, 처음에 내가 생각했던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사실 난 좀 미심쩍었는데, 이제 완전히 너한테 마음이 기운 것 같아. 자기 때문에 몇 번이나 네가 험한 꼴을 당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죄책감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던데. 아주 그냥 널 꽁꽁 싸고돌면서 보호하려고 혈안이 됐어. 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위험 요소로부터 널 지키겠다고 작심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마리네즈가 아무렇지 않게 툭툭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단단한 돌멩이가 되어 내 뒤통수를 연달아 후려갈기는 느낌이었다. 엠버와 마리네즈를 둘러싼, 그동안 상상하지도 못했던 진실이 내 눈앞에서 수면 위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충격을 받은 머리가 얼얼하다 못해 멍해졌다.
“체스휘의 눈에는 네가 엄청나게 가련하고 불쌍한 여자라도 된 것처럼 보이나 봐? 뭐, 그렇게 되려고 그동안 네가 상당히 애쓴 모양이니…. 확실히 이런 상태면 앞으로도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너한테는 약해질 수밖에 없겠지.”
마리네즈가 우스꽝스러운 촌극이라도 관람한 듯이 입매를 비틀었다.
“그런데 너도 너무 못된 거 아니니? 그 순진한 남자를 이 정도로 이용해 먹고 말이야.”
그 순간, 나는 손을 들어 닭살이 돋은 것처럼 오싹거리는 팔을 문지를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부터 강제로 귀에 쑤셔 박히는 말을 듣고 점점 혹시… 싶기는 했다. 그런데 지금 막 마리네즈의 입에서 기어이 내뱉어진 소리를 듣고는 정말 소름이 끼쳐서 뒷덜미가 다 쭈뼛거리는 느낌이었다.
‘이게 뭐야…?’
혹시 지금 내가 눈을 뜬 채로 꿈이라도 꾸고 있나 싶을 지경이었다.
‘지금 내가 들은 말이 도대체 다 뭐야?’
체스휘를 둘러싼 엠버와 마리네즈의 마찰이 다 꾸며낸 가짜였다니, 지금 내 두 귀로 듣고도 도무지 믿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 마리네즈가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도대체 뭘 위해서?
그때, 문득 마리네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보던 눈을 찌푸렸다.
“그런데 왠지 좀 이상하네…. 너, 왜 아까부터 계속 멍청한 반응을 보이지?”
혼자서 떠들다가 갑자기 아무 말도 없는 내가 이상하게 여겨진 모양이다.
하긴, 지금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나조차 짐작이 가지 않았으니까. 애써 차분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기는 한데, 워낙 충격이 커서 그런지 이 망연한 마음이 어쩔 수 없이 겉으로도 표가 날 것 같았다.
“설마 정말 머리라도 이상해진 건가? 악마의 화원에 들어갔다 나온 후유증으로 앓았다는 게 연기가 아니라 진짜였어?”
마리네즈는 본격적으로 의심 어린 눈을 한 채 나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설령 그렇다 해도 내 책임 아니야. 혹시 그러다가 잘못돼도 난 책임지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어. 그런데도 강행한 건 너니까.”
꼭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이, 그녀의 입에서 악마의 화원에 들어간 건 엠버의 의지였다는 말이 다시 한번 내뱉어졌다.
나는 헛다리를 짚고 경계심을 드러내는 마리네즈를 보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지난번에도 뺨을 너무 세게 쳤다고 따지더니, 이번에도 그럴 셈이면 안 통해.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이려면 실제처럼 생생하게 연기해야 한다고 한 것도 너잖아.”
“당신 탓을… 할 리가 있나요. 내가 선택한 건데.”
다행스럽게도 뒤따른 내 목소리는 제법 침착하게 흘러나왔다.
“책임지라고 할 생각 없으니까 괜히 열 내지 마요.”
하지만 평소에 마리네즈를 대하던 엠버의 말투와 비슷한지는 알 수 없었다.
가늘게 좁혀진 마리네즈의 눈이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다가 그녀의 눈빛이 잠시 후 원래대로 돌아왔다.
“잘 알고 있군. 난 또 지난번처럼 짜증 나게 굴려나 했네.”
그러니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라고 마지막으로 못 박듯이 말한 뒤, 마리네즈가 다시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하여튼 너 때문에 나만 나쁜 년 됐지 뭐야. 게다가 수수께끼의 손님은 또 언제 구워삶은 건지…. 자기가 저택에 있는 동안에는 널 건드리지 말라니, 그 얘기를 듣고 진짜 깜짝 놀랐잖아.”
마리네즈는 메이드장과 총괄 집사가 양육자들까지 찾아와 따로 말을 전했노라며 실소했다.
“체스휘도 안 그렇게 생겨서 생각보다 단호하게 철벽을 치긴 했지만, 그쪽은 다른 의미로 만만치 않아 보이던데. 너도 얼마 전까지는 껄끄러운 기색 아니었던가?”
“그랬죠….”
의외로 마리네즈는 말이 많았다. 조금 전의 쌀쌀맞은 태도를 보면 엠버와 그리 친밀한 사이인 것 같지도 않은데.
아니면 평소에 그녀도 연기를 하느라, 이런 얘기를 나눌 상대가 딱히 없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 내 앞에서나마 속에 쌓여 있던 말들을 전부 시원하게 쏟아 내고 싶은 거라면 이해가 되긴 했다.
“뭐, 내 취향은 오히려 그 손님 쪽이긴 하지만. 어딘가 비밀스럽고 위험한 느낌을 풍기는 게 구미가 당겨. 허락 없이 건드리면 독니로 목을 콱 물어 버릴 것 같은 그 섬뜩함이 매력적이란 말이야….”
혼잣말처럼 나지막하게 읊조리던 마리네즈의 푸른 눈이 무언가를 떠올리듯이 그윽하게 가라앉았다.
“그런 남자가 너한테 관심을 보이다니….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그러다가 마뜩잖은 눈빛이 다시 한번 내 얼굴에 날아와 꽂혔다.
“너,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린다고 기세등등해져서 실수하지 말고 조심해. 체스휘는 몰라도 그 남자 같은 부류는 여자를 진심으로 아낄 리 없으니까. 이번 일만 봐도 그래. 다른 골 빈 고용인들이 망상하는 것처럼 진짜 널 마음에 둔 거면, ‘자기가 저택에 있는 동안’이라고 굳이 콕 짚어서 한정적으로 말했겠어?”
꼭 헛물켜지 말라는 듯한 냉소적인 반응이었다.
그 내용에는 나도 동의했지만, 지금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게 마리네즈와 나라는 사실이 여전히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러니 착각은 적당히 하란 말이야. 아직은 계획대로 전부 진행된 것도 아닌데, 까딱 잘못해서 전부 엎어져 버리면 얼마나 아까워? 그럼 너도 닭 쫓던 개 같은 꼴만 되는 거지.”
마리네즈는 마지막까지 그 엠버의 계획이란 게 성공하기를 바라며 충고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망하라고 고사를 지내는 건지 헷갈리는 말투로 덧붙였다. 나를 보는 눈에서 약간의 시기심이 엿보이는 걸 보면 아무래도 후자 쪽에 가까운 것 같았다.
“그런 얘기를 하려고 바쁜 사람을 여기까지 불렀어요?”
나는 마리네즈를 따라 느슨히 팔짱을 끼고 문에 기대섰다. 아직도 놀라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숨기고, 태연함을 가장해 앞에 있는 사람을 마주했다.
“서론은 여기까지만 하고, 그만 본론을 얘기했으면 좋겠는데.”
상황 파악은 충분히 됐고, 이제 그만 마리네즈와 엠버가 무엇을 위해 손을 잡은 사이인지 알고 싶었다. 내가 궁금한 부분에 대한 해답은 오늘 마리네즈가 나를 여기로 부른 목적에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리네즈에게는 이런 내 태도가 퍽 건방져 보였는지, 나를 향한 그녀의 눈이 다시금 가느스름하게 좁혀졌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넌 뭘 믿고 그렇게 대범하게 구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역시 두 사람의 사이가 썩 좋지는 않은 듯, 내게 꽂히는 시선이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방금의 대화로 유추한 대로, 원래 엠버의 말투가 그녀에게 썩 공손했던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래, 쓸데없이 사설이 길긴 했군. 너와 내가 순차적으로 저택에 투입되기 전에도 왕래가 없었고, 그래서 모처럼 동지 간에 친목이라도 다지면 좋을 것 같았는데. 하지만 그럴 마음이 없다고 하니.”
그리고 잇따라 귀를 파고든 말에 나는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단체로부터의 전언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제대로 숙지해서 닥터 콘라드에게도 전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