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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217)화 (217/300)

민들레 홀씨처럼 조용히 날아와 귓가에 앉은 목소리가 분위기를 한결 더 부드럽고 고즈넉하게 만들었다.

뭐지, 이 아련하게 그리운 느낌은…? 그러고 보니 체스휘를 만난 초창기에 이런 기분을 느꼈던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묘하게 살랑살랑 말랑말랑한 이 분위기는 왠지 연애 초기의 두근거리는 설렘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했다.

시간상으로 따져 보면 체스휘와 있을 때 이런 기분을 느낀 게 그렇게 오래전의 일도 아니었는데, 왠지 한참은 더 지난 과거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의 체스휘에게 이런 기분을 느낀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다소 복잡미묘하게 만들었다.

어쩐지 이건 좀 부적절한 상황인 것 같아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체스휘의 손이 내게서 떨어진 게 먼저였다.

“저기, 누가 오네요.”

고요한 목소리에 이어, 이마를 가볍게 덮었던 온기가 멀어졌다. 잠깐 내게서 시선을 떼고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체스휘가 다시 내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나를 향해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럼… 오늘은 내가 먼저 가 볼게요.”

“…….”

“안녕.”

체스휘는 우리가 함께 있는 모습이 다른 사람의 눈에 띄면 또 내가 곤란해질까 봐 신경 쓴 듯, 먼저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솔직히 이번만큼은 괜한 걱정이었다.

체스휘의 말처럼 다른 고용인이 복도에 들어선 건 사실이었지만, 그는 금방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지금까지 마주쳤던 다른 고용인들처럼 나와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인 듯했다.

아니, 뭐…. 그렇다고 해서 체스휘가 지나친 배려심으로 일찍 자리를 떠난 게 아쉽다거나 하다는 의미는 아니었고.

나는 체스휘의 모습이 사라진 초록빛 풍경을 잠깐 보다가 몸을 돌렸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잠깐 흐려졌던 내 이성도 조금씩 되돌아오는 느낌이었다. 따사로운 햇볕이 비추는 복도를 걸으면서 조금 전의 일을 곱씹었다. 역시 뭔가가 미묘했다.

‘뭐지? 이 썸타는 것 같은 풋풋한 느낌은…. 난 지금 엠버인데?’

방금 체스휘에게 나불거렸던 것도 너무 충동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뒤늦게 살짝 후회스러웠다. 이제는 정말 엠버의 몸으로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 기분대로 움직이지 말고 입 간수를 잘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막 다다른 문 앞에서 무의식중에 손을 움직였을 때였다.

“잠깐, 거기…! 지금 지하실 앞에서 뭘 하는 거지?”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온 큰 목소리에 몸이 경직되었다. 반사적으로 뒤돌아볼 뻔하다가 퍼뜩 움직임을 멈췄다. 지금 고개를 돌리면 얼굴을 들킬 것이다. 게다가 굳이 뒤쪽을 확인하지 않아도, 이 중후한 목소리의 주인이 총괄 집사 슈나우더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지하실의 출입은 내가 허가한 몇 사람 외에는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는 걸 모르나? 어디에 소속된 메이드지? 그러고 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 돌아서 보게.”

나는 한 3초쯤 굳어 있다가, 재빨리 문고리에서 손을 놓고 도주했다.

“앗! 잠깐, 거기 서…!”

얼굴을 가리며 전력 질주하는 나를 총괄 집사가 쫓아왔다.

제길, 그런데 말이 전력 질주지 정말 이게 엠버의 최선인가?! 엠버의 달리기 속도는 거북이 뺨치게 느렸다. 하지만 총괄 집사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만만치 않게 뜀박질에 능하지 못했다. 앗, 혹시 이런 발언은 노인 비하로 오해받을 수도 있으려나? 판사님, 저는 절대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헉, 허억…. 따돌렸나?”

다행히 저택의 구조에는 총괄 집사 못지않게 익숙했고, 또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모르는 비밀 통로 같은 것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금방 나를 추격하는 총괄 집사를 떼어 낼 수 있었다.

‘어우 씨. 지금까지 지하실을 들락거릴 때마다 누구한테 들킨 적이 없어서 방심하고 있었네.’

그래도 다행히 총괄 집사는 엠버의 뒷모습만 보고 정체를 알아내지 못한 것 같았다. 총괄 집사가 고용인들에게 지하실 앞에서 도주한 나를 목격한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 듯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운이 나쁘게도 바로 이후 내게 더 큰 불행이 닥쳐왔다.

총괄 집사가 침입자를 경계한 듯이 지하실에 자물쇠를 여러 개 덧댄 것으로도 모자라서, 아예 그 앞에서 직접 보초를 서기 시작한 것이다!

혹시라도 자리를 비울 때는 꼭 다른 사람을 앞에 세워 두고 가기까지 했다. 더군다나 지하실 앞쪽을 우연히라도 지나가는 여자 고용인을 발견하면 몹시 수상쩍어하며 신원 조회까지 하는 쪼잔함도 보였다.

이 망할 영감탱이! 아니, 사람이 지하실에 좀 들어갔다 나올 수도 있지, 더불어 사는 세상에 이렇게까지 치사하게 굴 일인가?

“엠버, 오늘은 어쩐 일로 머리를 풀었네? 메이드장님이 보면 혼낼 것 같은데… 하긴, 주말이니까 상관없겠다. 후훗, 아까까지만 해도 관심이 전혀 없는 듯하더니, 지금 보니까 그렇지만도 않은가 봐?”

결국 지하실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속으로 애만 태우고 있는데, 모리나가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이리 와 봐, 내가 좀 더 만져 줄게. 이왕이면 더 예쁘게 꾸미는 게 좋잖아. 어휴, 너는 어쩜 이런 데서도 손재주가 없니? 이 예쁜 머리카락을 왜 이렇게 산발하고 있어?”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얘는, 그럼 뭐가 중요한데? 또 내가 오해한 거라고 할 셈이야? 오늘은 주말인데 손님이 저택에 남은 것만 봐도 확실한걸! 원래는 매번 꼬박꼬박 방을 비웠으면서 이번만 예외잖아. 이게 뭘 의미하겠어?”

모리나는 아까부터 엄청난 착각을 하는 중이었다.

일단, 내가 하나로 땋고 있던 머리 모양을 바꾼 건 지하실의 문 앞에 서 있던 게 나라는 사실을 총괄 집사에게 들킬까 봐 그런 거였다. 그러니 모리나의 생각처럼 다른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절대로 아니었다. 미카엘 카드리고에 대한 모리나의 오해도 가당찮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냥 이번 주말에는 한가한가 보지. 아니면 매번 밖으로 나돌다가 피곤해서 쉬고 싶던지.”

“넌 참 여우 과처럼 생겨서는 속에 곰이 들어 있어서 문제야.”

하지만 모리나는 이번에도 나를 향해 답답한 소리를 한다는 듯이 혀를 찼다.

“글쎄, 그 손님이 저택에 있는 고용인들에게 널 건드리지 말라고 아예 엄포를 놨다니까! 네가 앓는 동안 메이드장님하고 총괄 집사님이 같이 내려와서 우리를 모아 놓고 그랬다고. 저택의 손님이 앞으로 또 누가 널 괴롭힌다는 소리를 들으면 절대 가만히 안 놔둘 거라고 했다고! 넌 자기 메이드니까 누구도 허락 없이 머리카락 한 올 상하게 할 수 없다고 그랬다는데, 그게 그냥 한 소리라고? 널 괴롭히려면 죽을 각오를 하라는 경고까지 했는데?!”

“모리나? 아까는 그런 내용 아니었잖아. 그냥 담당 메이드가 바뀌면 번거로우니까 자기가 저택에 있는 동안에 시끄럽게 굴지 말라고 그런 거라며.”

“아이참, 그거나 이거나 마찬가지지! 넌 지금 그런 게 중요해? 어쨌든 네가 아니면 싫다는 거잖아!”

모리나가 내 머리를 만지던 손을 멈추고 답답하다는 듯이 빽 소리를 질렀다. 나는 어휴, 한숨을 내쉬었다.

방에 와서 모리나에게 이 얘기를 듣는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몰랐다.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내용이 부풀려져서, 지금 모리나의 말에 의하면 저택의 고귀한 손님인 미카엘 카드리고와 일개 메이드인 엠버 사이에 희대의 로맨스라도 펼쳐지는 듯했다.

사실 나도 메이드장 제인과 총괄 집사 슈나우더가 이틀 전에 고용인들을 불러 모아 경고했다는 소식은 굉장히 의외였다.

물론 그들은 저택 내에서 있었던 엠버에 관한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대놓고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레드포드에 방문한 아주 귀하신 손님의 시중을 드는 메이드라고 하면 애초에 엠버 한 명밖에 없어서 대상을 쉽게 특정 지을 수 있었다.

어쨌든, 미카엘 카드리고가 마리네즈의 횡포를 막은 건 진짜인 듯했다. 게다가 모리나가 전해 준 또 다른 소식에 의하면, 이번에 고용인들에게 경고한 건 미카엘만이 아니었다.

체스휘 역시 앞으로 마리네즈의 명령을 듣고 엠버에게 해를 끼치려 하는 고용인이 있으면 묵과하지 않겠노라 노골적으로 위협했다고 하니 말이다.

고용인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귀하신 손님의 경고에 이어, 평소에 그들에게 상냥하던 체스휘까지 처음으로 위압적인 모습을 보이자 완전히 쭈그러든 모양이었다.

그리고 모리나처럼 로맨스에 목말라 있던 자는 완전히 물 만난 고기처럼 살판이 났다.

“물론 2호실 양육자님도 널 보호해 준 건 마찬가지이긴 한데…. 그래도 역시 내 생각에는 2호실 양육자님보다 손님 쪽이 나을 것 같아. 일단 2호실 양육자님한테는 너무 무시무시한 연적이 붙어 있잖아?”

그녀는 미카엘과 체스휘를 두고 무의미한 저울질까지 하기 시작했다.

“에휴, 난 시간이 돼서 나가 볼게.”

“그래, 파이팅! 엠버, 넌 할 수 있어…! 실세를 등에 업고 다들 묵사발로 만들어 버리는 거야!”

도대체 뭐가 파이팅인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방을 나섰다. 엠버의 업무인 미카엘 카드리고의 시중을 들기 위해서였다. 원래는 주말마다 그가 자리를 비워서 엠버도 할 일이 없었다고 하는데,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미카엘이 레드포드 저택에 남아 있어서 엠버의 휴일도 덩달아 날아갔다.

모리나에게는 아까 엠버의 일정을 미리 물어봤다.

물론 핑계를 대는 게 쉽지는 않았다. 이번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기억이 조금 가물가물하다고 했더니, 모리나가 콘라드를 불러오겠다고 호들갑을 떨어서 한바탕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렇게 모리나를 진정시키고 나서 들어 보니, 그동안 미카엘은 엠버에게 아주 기본적인 일만 시키고 있었던 듯했다. 방이 비어 있는 동안 청소를 하고, 침구를 갈고, 세탁물을 옮기는 정도였다. 개인 시중은 식사 시간에 방까지 음식을 가져다주는 것 외에는 일절 요구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레드포드 저택에서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아니, 레드포드 저택에서 제일가는 꿀 빠는 보직이라고 할 만했다.

‘어쩐지 엠버의 손이 아주 곱더라니만…. 노동의 흔적이 없어서 그런 거였어.’

지금 내가 미카엘의 방에 가려는 이유는 그에게 점심 식사를 가져다주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1층의 부엌으로 가는 길에 한 번 더 확인해 보았더니, 총괄 집사는 아직도 번견처럼 지하실의 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부아가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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