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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216)화 (216/300)

똑, 똑!

그렇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1층까지 내려와 복도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또 뭐야?’

무심코 시선을 돌리자, 후원 쪽으로 난 창문 너머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심녹색 나무 그림자 밑에 서서 나를 보고 있는 건 체스휘였다.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작게 벌렸다. 하지만 그의 입술은 내가 알아볼 수 있는 형상을 그리지 않고, 이내 그대로 다시 다물렸다. 이후 체스휘는 창문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어딘가 쓰게 느껴지는 미소를 짓기만 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먼저 복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지금 이곳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마 그래서 체스휘도 나를 아는 척한 것 같았다.

방금 막 내가 서 있는 복도로 들어선 고용인이 멀리서 언뜻 보였으나, 그는 나를 발견하기 무섭게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재빨리 몸을 돌려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까부터 느끼고 있던 고용인들의 이상 반응이 지금 이 상황에서는 도움이 되고 있었다.

나는 체스휘가 그냥 가 버리기 전에 그가 서 있는 창가로 걸어가, 잠금장치를 풀고 창문을 열었다.

“왜 거기에 혼자 그러고 서 있어요?”

내가 먼저 건넨 물음에 체스휘가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서 그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날렸다. 상쾌한 풀냄새도 같이 날아와 내 코끝을 간질였다.

왠지 체스휘와 이러고 서 있으니, 예전에 별관에서도 이것과 비슷한 일이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44회차 게임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라색 방과 연계된 퀘스트를 수행했을 때도 체스휘와 이렇게 창문을 사이에 두고 얘기했었는데. 물론 그때는 창문이 잠겨 있었고, 지금은 활짝 열려 있다는 점이 다르긴 했다.

“이거 돌려주려고요.”

내 얼굴을 잠깐 말없이 응시하던 체스휘가 곧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뭔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한테 받으라는 것 같아서 나도 손을 움직였다.

“그때 화원에서 나오는 길에 떨어뜨린 것 같아서.”

우연히 손끝이 스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매를 움찔 떨었다. 체스휘는 사흘 전보다 더 거리를 두는 모양새로 내게 손에 들고 있는 것만 건네준 뒤 다시 뒤로 물러났다.

이후에 그에게 받은 것을 확인해 보니 머리끈이었다. 그날 포대 자루가 머리가 씌워지고, 마리네즈에게 납치당해 바닥에 몇 번이나 패대기쳐지고, 또 미카엘에게 짐짝처럼 들쳐 메지느라 하도 정신이 없어서 묶은 머리가 풀린 줄도 몰랐던 모양이다.

“그냥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되었을 텐데…. 고마워요.”

나는 지금의 체스휘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 애매모호했다. 이런 복잡한 감정이 드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굳이 세세하게 되짚어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냥 머리끈의 답례로 어중간한 인사를 남긴 뒤 창문을 닫을 타이밍을 고민했다.

체스휘도 내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알아차렸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별다른 내색 없이 입을 열었다.

“사실 몸은 괜찮은지 알고 싶기도 하고, 되도록 직접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이 있기도 해서 핑계 삼아 온 거예요.”

불현듯 며칠 전 악마의 화원에서 마지막으로 체스휘를 보았을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인지 지금 그가 나… 아니, 엠버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건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어째서인지 엠버 씨에게는 자꾸 미안한 일만 생기는 것 같아요.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내 잘못이 압도적으로 커요.”

나는 손에 든 머리끈을 괜히 만지작거리면서 창틀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체스휘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는 말도 변명밖에 안 되겠죠. 내가 좀 더 처신을 잘 했어야 했는데.”

마냥 화사하고 청량하던 미남의 얼굴에는 전에 없던 어둑한 그림자가 어려 있었다. 체스휘는 이미 마음속으로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나를 향해 차분하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내 가벼운 행동 때문에 피해를 입게 되어서 정말 미안해요. 앞으로는 우연히 지나가다가 마주쳐도 아는 척하지 않겠다고… 오늘 그 얘기를 하려고 왔어요.”

체스휘의 말을 들을수록 기분이 묘하게 착잡해졌다.

사흘 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엠버와 인사하는 사이로 지내고 싶다고 하더니, 이번 일로 체스휘도 마음을 고쳐먹은 모양이었다.

‘지금의 난 엠버가 아닌데, 이런 말을 대신 들어도 되나?’

그래도 지난번에 마리네즈에게 뺨을 얻어맞은 것도 그렇고, 이번에 악마의 화원에 갇힐 뻔한 것도 엠버 대신 내가 당한 일이니까…. 나도 자격이 조금은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꼭 마지막 인사라도 하는 것처럼 진중한 얼굴로 사과하는 체스휘를 보니 왜인지 내 마음이 다 싱숭생숭했다.

물론 방금도 내가 체스휘를 보고 껄끄러운 기색을 내비친 건 사실이었다. 엠버를 연적으로 생각한 마리네즈에게 온갖 해코지를 당하게 되어서 화가 나는 것도 맞았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건 체스휘의 탓이 아니었다.

물론 체스휘의 머리가 꽃밭이라 엠버가 피해를 입든 말든 무시하고 혼자 희희낙락했다면 그에게도 짜증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악마의 화원 앞에서 보니까 체스휘도 마리네즈에게 장난 아니게 화를 내던데…. 말하는 걸 들어 보니, 이전에도 마리네즈에게 좋게 말하는 걸 그만두고 충분히 알아듣게 경고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 여자가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 스토커 짓을 하면서 악독하게 구는 걸 어떻게 한단 말인가? 체스휘가 하루 종일 마리네즈를 감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 저택에 경찰이 있어서, 그 미친 여자를 체포해서 어디에 확 가둬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한편으로는 체스휘도 이 문제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마리네즈 대신 그를 질책하며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비난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사실 내가 악마의 화원에 끌려갔을 때 체스휘가 바로 구하러 왔던 것에 대해서는 고마운 마음까지 있었다.

이번에 보니 악마의 화원에서 괴물 꽃들을 도망가게 할 수 있는 건 체스휘가 아니라 미카엘 쪽의 능력인 것 같았다. 그럼 미카엘과 한 몸으로 섞이기 전인 현재 시점의 체스휘는 일반 사람들처럼 괴물 꽃에 취약할 게 아닌가? 그런데도 그렇게 망설임 없이 화원 안으로 뛰어들어 오다니, 솔직히 조금 감동적이었다.

잘은 몰라도, 어쩌면 이틀 전부터 마리네즈가 고용인들을 보내 나를 찾는 걸 포기한 것도 체스휘의 덕분일지도 몰랐다.

“지금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하는 것도 불편한 거 알아요. 엠버 씨가 입은 피해에 대해 내가 어떻게든 보상할 방법이 있으면….”

“됐어요. 진짜 잘못한 사람은 사과 한마디도 안 하는데 체스휘 씨가 뭘 보상해요.”

그래도 나는 진짜 엠버가 아니니까 체스휘가 무슨 말을 하든 그냥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으려고 했다. 하지만 듣다 보니 꼭 체스휘가 마리네즈의 소행에 혼자 독박을 쓰려고 하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누가 보면 체스휘 씨… 님이 마리네즈 님한테 시켜서 일부러 날 괴롭히기라도 한 줄 알겠어요.”

“무슨, 절대 아니에요.”

“그러니까. 나도 안다고요.”

확실히 미카엘이 함유되지 않은 체스휘는 착하고 바른 청년인 것 같은데, 이러다가 엠버가 진짜 큰 대가라도 바라면 어쩌려고? 더군다나 엠버가 보통의 메이드도 아니고, 수상한 목적을 가지고 레드포드에 들어온 비밀 조직의 일원인데 말이다.

“반어법 아니에요. 체스휘… 님한테 화난 것도 아니고요. 그렇게 너무 자책하지 마요. 나한테 피해를 입히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애초에 같은 직장에서 일하면서 그냥 우연히 오다가다 마주쳐서 인사하고 얘기 좀 나눴다고 예민하게 구는 사람이 이상한 건데.”

“…….”

“그냥 우리 둘 다 피해자예요. 그러니까 사과도 더 하지 말아요.”

내가 왜 이렇게까지 체스휘를 두둔하고 위로해 주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젠장, 말하다 보니 쓸데없이 감정을 이입해 버렸네? 내가 알고 있는 매운맛 체스휘가 아니라 순한 버전의 체스휘를 눈앞에 두니까 뭔가 좀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그만.

“그렇게… 말해 줄 줄은 몰랐는데.”

그 말처럼, 체스휘는 뜻밖의 얘기를 듣기라도 한 듯이 잠깐 숨을 죽인 채 내 눈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왠지 얼마 전까지의 엠버 씨와는 좀 다른 느낌이네요. 정확히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 물론 좋은 의미니까, 혹시 오해하지는 말아요.”

뜨끔! 너무 내 자의식대로 말했나 보다.

“기분 탓이 아닐까요?”

“그러게요. 오랜만에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이 떠올라서 그런가 봐요. 그동안 엠버 씨가 왠지 좀 변한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던 것 같아요.”

체스휘가 나를 향해 어렴풋이 미소를 지었다. 어두운 느낌을 완전히 털어 버린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 전보다는 한결 가벼워 보이는 미소였다.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해 줘서 고마워요. 원망하거나 미워해도 이해할 텐데….”

그러고 나서 체스휘는 나를 또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풀 냄새와 꽃향기를 머금고 불어온 바람이 체스휘를 훑고 날아와 나를 간질였다. 짙게 드리워진 나뭇잎들이 흔들리면서 그 사이로 새어 든 햇빛이 체스휘의 얼굴을 비쳤다.

어째서인지 나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고요하고도 평온한 공기 속에서 눈을 마주했다.

왠지… 분위기가 좀 미묘한 것 같은데…. 이 솜털로 몸을 간질이는 듯한 느낌은 낯설지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체스휘가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사흘 전에 그랬던 것처럼 피하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는데도 바보같이 가만히 서 있었던 데에는,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의지가 반영되어 있었다.

잠시 후 이마에 부드럽게 닿아 온 손은 약간 서늘했다.

“아직 미열이 있네요.”

“…….”

“역시 한동안은 무리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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