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미카엘도 스텔라에서 린 도체스터와 비슷한 지령을 받고 온 건가? 하지만 그럼 왜 나처럼 위장하지 않고 이렇게 원래 신분으로 찾아온 거지? 그럼 역시 스텔라의 일 때문은 아닌가?
“그런데 그 손님 말이야. 사실은 숨겨진 다른 목적을 가지고 여기에 온 거 아니야?”
내가 그렇게 속으로 의구심을 품고 있을 때, 모리나가 꼭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의혹 어린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저택에서 누구를 찾는 것치고는 자리에 있을 때가 거의 없던데. 주말에 방을 비우는 건 기본이고, 평일에도 매번 어디론가 사라지고 안 보이잖아. 이 좁은 저택에 따로 숨을 데도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모습을 감추는지 모르겠어. 처음에는 흑심을 품고 몰래 얼쩡거리던 애들도 지금은 다들 귀신 같다고 숙덕거리는 게 이해가 돼.”
미카엘이 틈만 나면 방을 비우고 사라진다는 말에 나도 의문이 더해지는 것을 느꼈다.
모리나는 그 후로도 수수께끼 같은 저택의 손님에 대해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아무래도 그동안 미카엘에게 호기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내가 그리 열심히 호응하지 않는데도 그녀는 전혀 상관없는 눈치였다.
그렇게 한밤중의 자장가처럼 울리는 모리나의 목소리를 듣다가, 어느 순간 정신력이 한계에 다다라서 나는 그만 깜빡 잠들어 버렸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마리네즈가 보낸 고용인들의 눈을 피해 지하실에 들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밤새 몸이 쑤시더니, 새벽부터 고열까지 나기 시작한 것이다.
엠버의 몸은 진짜 약해도 너무 약했다. 그동안 린 도체스터의 몸으로 부상을 당한 적은 있어도 이런 잔병치레는 한 적이 없었다. 원래 현실에서의 내 몸도 건강한 편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크게 앓는 게 얼마 만인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모리나는 끙끙거리는 내 신음 소리에 깨어나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고 기겁했다. 아침 일찍부터 불려온 콘라드는 성가신 얼굴로 나를 진찰했다. 그는 혀를 차면서 내게 뭔지 모를 약을 먹여 줬다. 그러나 효과가 바로 있지는 않아서, 콘라드가 떠난 뒤에도 여전한 오한을 느끼며 고열에 시달려야 했다.
“가야… 되는데….”
“가긴 어딜 가? 아, 일하러? 이런 상태로 어떻게? 걸레질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어?”
“나, 가야 돼….”
정신이 혼몽한 와중에도 해야 할 일이 있어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내게는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일단 네 몸부터 살펴. 지금 네 상태로 손님 시중을 드는 게 오히려 민폐야. 당장 제인 님부터도 네가 이런 몰골로 손님 앞에 나섰다는 걸 알게 되면 메이드로서의 기본이 안 돼 있다고 무섭게 화내실걸?”
모리나가 짙은 한숨을 내쉬면서 그런 나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그녀의 가벼운 손짓 하나에도 무거운 몸은 쉽게 내 의지를 거슬렀다. 손가락 하나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뭐, 어제오늘 계속 자리를 비워서 눈치 보이는 마음은 알겠지만…. 이건 마리네즈 님 때문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닥터 콘라드도 악마의 화원에 들어갔다가 나온 후유증인 것 같다는데, 혹시 무리하다가 더 잘못되면 어떻게 해? 어차피 마리네즈 님 때문에 오늘 밖에 나가는 것도 불안했는데,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
모리나가 나를 설득하며 뭐라고 더 덧붙였지만, 어젯밤처럼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나는 엠버의 몸이 내게 강제로 선사한 깊은 수마에 빠져 잠시 후 완전히 의식을 잃고 말았다.
***
“엠버, 몸은 좀 괜찮니?”
“네, 많이 괜찮아졌어요….”
메이드장 제인의 물음에 나는 다소 맥아리 없이 대답했다.
이 저질 몸뚱이의 열이 겨우 떨어진 건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오늘이었다. 그동안 나는 열에 들떠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여긴 어디? 나는 누구?’ 같은 혼란을 반복해야 했다.
의식을 되찾은 이후에는, 이렇게 허망하게 이틀이나 시간을 낭비했다는 사실이 내게 적지 않은 정신적 타격을 입혔다. 지금도 몸 상태가 완전히 나아진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발로 걸을 수 있을 만큼은 상태가 호전되어서 바로 지하실로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때 메이드장 제인이 나를 호출했다.
“그래, 상태가 호전되었다니 다행이구나. 그래도 아직 몸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그리하여 마주하게 된 제인은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나는 지은 죄도 없이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지금의 나는 개인적인 병가 문제로 갑작스럽게 직장에서 사흘이나 내리 무단결근을 한 불량한 고용인이었기 때문이다. 매번 여기에 올 때마다 신세를 지는 룸메이트 모리나에게도 자꾸만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억울했다. 지난번에야 내 의지로 다이안을 공격하는 모로스와 결전을 벌여서 그 사달이 났다지만, 이번 일은 전적으로 다른 사람의 탓이 아닌가?
엠버의 빈혈은 둘째치고서라도,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마리네즈였다. 악마의 화원에 들어갔다가 나온 후유증으로 이렇게 앓은 건데, 이걸 내 탓이라고 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네?
나는 그렇게 내 무고함을 주장하는 눈빛으로 제인을 보았다. 분명 저택의 메이드장인 제인도 엠버의 사정을 알고 있을 게 뻔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탐탁지 않은 눈으로 나를 보면서도 다른 꾸중을 더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제인이 얕은 한숨을 내쉬며 꺼낸 말에 나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엠버. 내 생각에는 네가 이번 달까지만 일하고 저택에서 나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예?”
갑작스러운 제인의 말을 듣고 경악했다.
헐, 지금 엠버가 메이드장에게 해고 통지를 받았어?
하필이면 내가 이 몸 안에 들어와 있을 때 이런 일이 생겨서 더 당황스러웠다. 물론 고작 이번에 있었던 일 하나 때문에 엠버를 해고해야겠다는 판단을 내렸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마리네즈 때문에 엠버가 피해를 입는 거라면 이건 말도 안 됐다!
“네 사정이 딱해서 나도 웬만해서는 이런 결정을 내리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더는 이대로 널 여기에 놔두면 안 될 것 같구나.”
“하지만 메이드장님….”
“이건 널 위해서이기도 해. 1호실 양육자님이 네게 앙심을 품은 걸 너도 알지 않니? 물론 네 입장에서는 억울하겠지만, 자칫 잘못하다가는 의미 없이 목숨만 잃을 수도 있어.”
혹시 제인이 마리네즈의 눈치를 봐서 엠버를 저택에서 쫓아내려는 건가 싶었는데, 그녀의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제인은 정말 엠버를 염려하는 듯이, 진지한 눈으로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레드포드 저택에서는 양육자의 권한이 가장 우선이기 때문에 너를 비롯한 고용인들을 내 선에서 지켜 주지 못하는 걸 늘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냥 버티는 것만 능사는 아니라는 걸 너도 기억하렴. 네가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일부러 위험부담이 크더라도 임금이 높은 레드포드에 들어온 걸 알고 있어. 그래도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쩌겠니? 바깥에 내가 아는 다른 괜찮은 일자리가 몇 있는데 너만 좋다면 추천장을 써 주마. 네가 손이 야무진 편은 아니다만…. 네 사정을 배려해 줄 만한 좋은 곳을 소개해 줄게.”
뭐야, 메이드장 제인이 이렇게 좋은 사람이었나…?
그동안 제인은 튜토리얼에서만 잠깐 얼굴을 보고 바로 플레이어의 손에 죽게 설계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와 이런 식으로 깊은 대화를 나눈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제인은 정말 진심으로 엠버를 염려해서 위험한 레드포드 저택이 아닌 다른 좋은 직장을 알아봐 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조건이 좋은 직장이라고 해도, 목숨보다 중한 게 세상에 어디에 있겠니? 내 말 흘려듣지 말고 잘 생각해 보렴. 마음이 정해지면 언제든 찾아오고.”
나는 진심 어린 어른의 조언에 할 말을 잃고 메이드장의 방을 나섰다.
이상하다. 원래 엠버가 이렇게 빨리 해고되는 게 맞는 건가? 아니면 혹시 내가 이 몸에 들어와서 뭔가 바뀐 건가?
이대로 엠버가 해고되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지금의 내가 판단하기에는 애매했다. 영 기분이 찝찝하고 미묘한데,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제인과의 짧은 면담을 끝내고 방에서 나와 걸음을 옮기자마자, 복도에서 나를 보는 시선들을 포착했다.
혹시 또 마리네즈가 나를 잡아 오라고 보낸 사람들인가 싶어서 흠칫했다. 하지만 내가 경계심을 품으며 방어 동작을 취한 게 무색하게도, 고용인들은 나를 힐끔거리며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또 잠시 후에 마주친 고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냥 지나가던 평범한 고용인들이라 그렇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느낌이 뭔가 좀 이상했다.
심지어 손목에 붉은 리본을 맨 마리네즈의 전담 메이드들까지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발견한 뒤 당장 주리를 틀겠다며 덤벼들기는커녕, 오히려 움찔 몸을 떨면서 주춤거렸다. 그러고는 애초에 나를 보지 못하기라도 한 것처럼 모른 척 옆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더더욱 영문을 알 수가 없어졌다.
뭐야, 내가 방에 처박혀서 앓고 있던 이틀 사이에 분위기가 왜 이렇게 되었지?
불과 사흘 전까지만 해도 손님 방 앞까지 사람을 보내 엠버를 찾던 마리네즈가 아니던가. 하지만 지금은 내가 이렇게 대놓고 복도를 걸어가도 나를 위협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이틀 동안에도 엠버를 찾는 사람이 방에 왔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혹시 나를 노리고 있다면 내가 완전히 무력화되었던 그때가 가장 큰 기회였을 텐데.
물론 나를 해코지하려는 사람이 사라진 거라면 잘된 일이었지만…. 아직 안심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마리네즈가 혹시 나를 방심시킬 생각인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모리나가 메이드장을 만나고 오면 나한테 해 줄 말이 있다고 했었는데.’
어쩐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내게 꼭 전해 줘야 할 중요한 소식이 있다고 호들갑을 떨던 모리나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혹시 지금의 이 기묘한 상황과 연관이 있는 일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