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안 도련님…. 혹시 그동안 나 기다렸어요?”
“기다리긴 누가? 내가? 너를? 진짜 웃겨.”
내 은근한 물음에 다이안은 시니컬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며 잔뜩 독 오른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모습이 그의 본심을 대변해 주었다.
아이구, 이걸 어쩌나. 꼭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밤새 기다리다가 바람맞은 꼬마애 같은 반응이잖아?
그래도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다이안이 오매불망 나를 기다렸던 시일이 그렇게 많이 길지는 않은 것 같았다. 미카엘 카드리고가 아직도 레드포드 저택에 머무는 것을 포함해서, 왠지 느낌이 그랬다.
“미안해요. 사실은 그동안 일이 너무 많아서…. 그, 지금 저택에 머무는 중인 손님 아시죠?”
일단은 상처받은 소년의 영혼을 치유해 주는 게 급선무인 것 같아서 어설픈 변명이라도 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제가 접객 담당이 되었거든요. 그런데 어찌나 성미가 까다로운지,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라니까요?”
희생양은 너다, 미카엘!
“지금도 이 늦은 시간까지 손님 방에 있다가 나오는 길이에요. 일하느라 부르튼 이 손 좀 보세요!”
호들갑을 떨면서 엄살을 부리다가, 엠버의 손이 참으로 곱디고운 것을 발견하고 다이안의 시야에서 얼른 다시 감췄다.
“그래…? 그렇게 할 일이 많아?”
이렇게 거짓말을 일삼는 나쁜 어른이 된 나와 달리, 다이안은 참으로 순진한 소년이었다.
다이안이 약간 주저하다가, 맑은 눈망울에 걱정과 염려를 내비치며 나를 쳐다보았다. 이다지도 순수한 다이안을 속여 먹으려니 영 양심이 쓰려 왔다.
“레드포드의 손님이라면 그 상위 세계에서 왔다는 남자 맞지? 이 늦은 시간까지 일을 시킨단 말이야? 아무리 중요한 손님이라도 너무 지나친 노동을 시키는 것 같은데, 내가 메이드장한테 대신 말해 줄까?”
“앗, 괜찮아요! 그, 그래도 추가 수당은 확실히 받고 있으니까요!”
“추가 수당을 줘도 그렇지.”
“돈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그러니까 진짜 걱정해 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다이안이 너무 진지하게 신경 써 줘서 또 부랴부랴 둘러댔다. 그래도 다이안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다. 하지만 나한테도 사정이 있겠거니 싶은지, 더 이상 메이드장을 찾아가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다이안 도련님은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혼자 돌아다녀요? 위험하게.”
“이 시간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더 안전해.”
하긴, 갑자기 모로스로 변해서 공격할 인간들도 없으니 확실히 유동 인구가 적을 때가 더 안전할 수도 있겠다. 게다가 이 시기의 다이안에게는 돌봐 주는 양육자도 없었으니까….
갑자기 일전에 혼자서 모로스와 만나 위기에 처했던 다이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그를 뒤에서 몰래 질타하던 고용인들도.
다이안을 향한 안쓰러움에 부쩍 마음이 안 좋아져서 애써 웃는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제가 방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흥, 내가 어린애인 줄 알아? 혼자 방도 못 찾아가게.”
하지만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다이안은 나한테 먼저 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가 몸을 일으키며 손을 잡자, 다이안이 흠칫했다. 나로서는 이렇게 다이안의 손을 잡고 걷는 게 익숙해서 무심코 한 행동이었는데, 다이안은 이런 게 영 어색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다이안은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엠버 말이야, 진짜 아직도 손님 방에 있는 거야?”
그런데 다이안과 함께 막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을 때, 아래 층계참 쪽에서 작은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모르겠는데…. 직접 확인해 본 것도 아니니까. 우리가 손님 방에 마음대로 들어가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마리네즈 님은 왜 이렇게 자꾸만 확인해 보라고 우리를 다그치시는 거야?”
“어휴, 내 말이. 양육자님들도 함부로 못 하는 분인데 우리더러 뭘 어쩌라고. 아무튼, 곧 소등 시간이니까 대충 근처만 한번 살펴보고 가자.”
마리네즈가 엠버를 찾아오라고 보낸 사람들이구나! 이 늦은 시간까지 사람을 풀어서 미카엘의 방에 보내다니, 진짜 쓸데없이 부지런한 여자네.
나는 목소리의 주인들을 피해 얼른 발소리를 죽이고 계단을 올라갔다. 다행히 다이안은 밑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사실 그는 나와 붙잡은 손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취침 시간이 거의 다 된 때라 방에 도착한 다이안은 바로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다이안의 잠자리까지 봐 주기로 하고 그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너… 계속 많이 바빠? 다음에는 언제 또 볼 수 있어?”
그러다가 불현듯 고막을 찔러든 다이안의 물음에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일단 가장 큰 이유는, 내일도 내가 이곳에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답을 망설인 시간은 극히 찰나라고 할 만했는데, 다이안은 그 간격을 예민하게 알아차린 듯이 먼저 말을 이었다.
“됐어. 그냥 한번 물어본 거야.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돼.”
“…….”
“나도 딱히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건 아니니까.”
아니, 애기야. 네가 그렇게 말하면 이 누나 마음이 너무 아리는데? 막, 막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데?
“일단 급한 일이 정리되면…. 그때 다시 올게요.”
아, 이런 식으로 희망 고문하는 게 가장 나쁘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는데…. 하지만 다이안의 외로움을 알면서도 매정하게 나를 기다리지 말라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다이안은 내 말에 어렴풋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 사실은 그가 내 말을 믿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잘래. 너도 가서 쉬어.”
조용히 나를 등지고 돌아눕는 다이안에게 결국은 어떤 말도 더 하지 못했다.
***
젠장, 왠지 이럴 것 같았다. 다이안을 방까지 데려다주고 난 뒤 몰래 지하실에 찾아갔으나, 문은 또 작동하지 않았다. 당연히 상황이 마뜩잖았으나, 그나마 악령이 득시글하던 곳에 갇히지 않은 걸 요행이라고 여겨야 할지도 몰랐다.
할 수 없이 나는 마리네즈가 보낸 고용인들을 피해 엠버의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행히 그들과 마주쳐 봉변을 당하는 일은 없었고, 대신 먼저 방에 들어와 있던 모리나가 나를 보고 엄청나게 놀랐다.
“엠버! 너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난 그 손님 방에 내일까지 있을 줄 알았더니….”
“남의 방에서 어떻게 밤새 죽치고 있어? 여기에도 나 찾으러 온 사람들 있었지?”
“아휴, 그걸 말이라고 해? 너 이제 저택 생활 어떻게 하니? 그래도 지금까지는 마리네즈 님이 체스휘 님의 눈치를 봐서 몸이라도 사리더니, 이번에는 진짜 눈에 뵈는 게 없나 봐.”
모리나가 이렇게 노심초사할 정도니, 엠버의 가시밭길은 앞으로 빼도 박도 못하게 예약된 것이라 해도 무방할 듯했다.
“어제 네가 체스휘 님하고 그런 것도 우연히 부딪혀서 난 사고였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막말로 둘이 사귀는 것도 아니라는데!”
모리나의 분개한 목소리를 뒤로한 채 나는 비실비실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오늘 하루 동안 심신을 지나치게 혹사해서 그런가, 눈만 감으면 당장 기절하듯이 잠들 것 같았다. 가뜩이나 엠버의 몸은 최약체인데, 낮에는 빈혈로 기절한 데다가 납치당해서 험하게 굴려지고, 거기에 더해 괴물 꽃에게 정기까지 빨린 탓에 기력이 완전히 쇠한 듯했다.
그렇게 골골거리며 이불을 끌어 올리는데, 뒤에서 모리나의 은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엠버. 너 혹시 저택의 손님하고 뭐 있는 거야?”
“있긴 뭐가 있어.”
“아니, 오늘 보니까 악마의 화원까지 직접 들어가서 널 구해 주고 또 자기 방에 데려가기까지 하기에…. 널 보호해 주려고 그런 거 아니야?”
모리나의 말을 듣고 콧방귀를 뀌었다. 미카엘의 이상한 행동을 보고 모리나가 이런 생각을 한 것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딜 봐서 그게…. 정말 마음이 있는 거면 악마의 화원에서 진짜 나만 두고 가 버리려고 하지는 않았겠지. 또 그렇게 짐짝 들 듯이 거칠게 다루는 게 아니라, 금 도자기 다루듯이 곱게 안아서 옮겨 줬을 것이다. 나를 보는 눈빛도 훨씬 더 부드럽고 다정했을 테고, 한눈에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의 차이점이 느껴질 정도로 태도 하나하나에서 애정과 배려가 느껴졌을 텐데….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불을 움켜쥔 손끝을 움찔 떨었다. 어느새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상념을 흐트러뜨리며 말을 돌렸다.
“그보다 저택의 손님 말이야.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거래?”
“글쎄?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오히려 네가 담당 메이드잖아. 주워들은 거 없어?”
같은 방을 쓰는 모리나도 모르는 걸 보면, 엠버가 그녀에게 뭔가를 얘기한 건 없는 모양이다.
“하긴, 너도 그분이 무섭다고 했지. 매일 일만 후다닥 끝내고 말도 거의 안 섞고 나온다고 했는데…. 그럼 진짜 둘이 뭐가 있는 것 같았던 건 내 착각인가?”
모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내게 미심쩍은 눈빛을 보냈다.
“그래, 뭐…. 어쨌든, 벌써 손님이 저택에 머무른 지도 삼 주 가까이 되었으니까 오래되긴 했네. 누구를 찾는 중이라고 했었지, 아마? 그건 아직인 건가?”
이후에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나는 침대에서 반쯤 일어났다.
“그냥 저택에 있는 사람들을 다 불러다가 한 번씩 훑어보면 될 걸, 뭘 그렇게 오래 볼 게 있다고….”
“저택에서 찾는 사람이 있다고?”
내 물음에 모리나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왜 처음 듣는 소리처럼 그래? 네가 그랬잖아.”
“아… 그랬지. 깜빡했어.”
이런, 엠버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나? 이 몸에 있을 때는 반응을 좀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스르륵 침대에 누웠다.
모리나가 짐짓 우려스럽게 그런 나를 쳐다보았다.
“혹시 넘어질 때 부딪혀서 생긴 후유증 같은 건 아니지?”
“아냐. 진짜 괜찮아. 그냥 잠깐 깜빡한 거야.”
그녀에게 대충 대꾸하며 방금 들은 말을 되새겼다.
미카엘 카드리고가 레드포드 저택에서 찾는 사람이라니…. 그게 누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