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다만 내게 꽂힌 눈빛만큼은 기이할 정도로 강렬하기 짝이 없었다. 꼭 처음 보는 희귀한 짐승을 관찰하기라도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나를 쳐다보기만 하는 사이에, 잠깐 물러났던 기괴한 식물들이 다시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그림자에 가려져, 미카엘 카드리고의 모습이 또 시야에서 가려졌다.
하지만 잠시 후, 이번에는 눈앞이 완전히 환하게 개며 그 사이로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조금 전보다 훌쩍 가까워진 거리에서, 미카엘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짧은 시간이긴 했으나, 꽃에 닿았던 동안 정기를 몽땅 빨리기라도 한 것처럼 기력이 없고 손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포대 자루를 뒤집어썼던 머리는 산발이었고, 다리가 묶인 채 바닥을 기어서 몸이 흙으로 더러워져 있기도 했다. 그렇게 험한 몰골을 하고 있었는데도 미카엘은 여전히 동정심이라고는 한 톨도 느끼지 않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도 잔뜩 독이 오른 눈으로 내 앞에 선 남자의 반반한 얼굴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러다 이내 시야에 비친 입술에 가느스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데리고 나가 주지.”
나지막하게 울린 목소리 뒤로, 미카엘이 내게 몸을 숙였다.
“마음이 변했어.”
그의 손이 내게 닿는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미카엘은 나를 가볍게 들어 올려, 무슨 짐 더미를 나르는 것처럼 내 몸을 대충 어깨에 걸쳐 멨다. 몸이 반으로 접히면서 미카엘의 단단한 어깨에 배가 짓눌렸다. 불시에 명치를 공격당한 듯한 타격감에 나도 모르게 읍, 하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미카엘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긴 다리를 움직여 화원의 입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서두르는 기색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여유로운 발걸음인 반면, 오히려 꽃들은 그런 그를 피해 멀찍이 떨어지기 바빴다.
어쨌든 미카엘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가뜩이나 짓눌린 배가 더욱 강하게 압박되었다. 꼭 내장이 요동쳐서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식, 원래 나한테 그러던 것처럼 공주님 안기로 곱게 옮겨 주기를 바란 것까지는 아니지만, 이건 너무 막 대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그런 걸 따지는 대신 불편한 몸을 힘겹게 움직여 미카엘의 목을 덥석 끌어안은 건, 그가 좋아서가 아니라 미덥지 못해서였다.
아까 다른 고용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를 화원 밖으로 데려가는 척하면서 악마의 꽃들 사이에 던져 버릴 생각인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아니면 방금은 진심으로 한 말이라고 해도, 또 변덕을 부려서 갑자기 마음이 변했다며 나를 두고 갈지도 모르는 일이고.
이토록 짙은 불신에, 찰거머리처럼 미카엘의 몸을 칭칭 동여매었다. 내가 거의 목을 졸라 버릴 것처럼 팔로 세게 휘감아서 불편할 만도 한데, 미카엘은 그냥 나를 한번 힐끗 쳐다보았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나를 화원 밖으로 데려가겠다는 그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미카엘은 정말 나와 함께 화원의 출입문까지 이동했다.
“엠버 씨…!”
그리고 드디어 안개에 휩싸인 화원에서 막 벗어나려 했을 때, 누군가 엠버의 이름을 부르며 녹슨 철문 안으로 들이닥쳤다. 레드포드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피하는 악마의 화원인데도,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는 모습으로 이곳에 뛰어들었다. 그러는 바람에 문 앞에 서 있던 미카엘과 하마터면 충돌할 뻔하기까지 했다.
금갈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눈앞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체스휘였다. 일순간 그와 미카엘의 시선이 마주쳤다.
체스휘는 굉장히 서둘러 이곳까지 뛰어온 듯했는데, 이렇게 다급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는 나도 처음 봤다. 체스휘는 미카엘과 함께 있는 나를 발견하고 숨을 들이켰다.
“엠버 씨? 맙소사, 정말 악마의 화원에 버려졌었다고?”
아무래도 그는 누구인지 모를 사람에게 엠버의 소식을 듣고, 여기까지 찾아온 모양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일그러진 체스휘의 얼굴에 분노와 불신, 배신감 등의 격렬한 감정이 거칠게 소용돌이치는가 싶었다.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것은 곧 나를 향한 걱정과 안타까움 같은 감정에 떠밀려 잠시 사그라들었다.
“엠버 씨, 괜찮아요? 나 좀 봐요.”
체스휘가 짐짓 초조한 모습으로 내게 손을 뻗었다. 얼마 남지 않은 엠버의 기력이 거의 다 소진하기라도 한 듯이, 그때쯤 나는 시야가 가물가물했다.
“빨리 닥터 콘라드한테 가야….”
하지만 막 내게 닿으려던 체스휘의 손을 중간에 가로막은 사람이 있었다. 체스휘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미카엘에게 향했다. 나를 만지지 못하게 앞으로 뻗어지던 체스휘의 손을 쳐 낸 미카엘이 여전히 체스휘를 응시한 상태로 입을 열었다.
“마음대로 건드리지 마.”
“그게 무슨….”
“손을 대도 좋다고 허락하지 않았잖아, 내가.”
귓가에 울린 나지막한 음성에 체스휘의 얼굴이 굳었다. 반면 미카엘은 방금 꼭 내 소유권이라도 주장한 것처럼 오만한 소리를 내뱉은 것치고는 여전히 무미건조하고 나른한 눈빛을 띠고 있기만 했다.
나는 이 두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광경이 퍽 이상하게 여겨졌다. 그동안 미카엘과 체스휘가 합쳐진 완전체만 보다가, 이렇게 둘이 따로 한자리에 같이 있는 걸 보니 매우 낯설면서도 생소한 기분이었다.
“체스휘!”
바로 그때, 체스휘의 뒤쪽에서 찢어질 듯한 고성이 들려왔다. 다가오는 사람의 모습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리네즈의 목소리였다.
체스휘의 얼굴이 이번에는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차갑게 얼어붙었다. 미카엘이 그런 체스휘를 지나쳐 잠깐 화원의 입구 앞에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체스휘가 다시 나를 붙잡으려는 듯이 손을 들었으나, 결국 그는 입술을 굳게 사리물며 멀어지는 미카엘과 나를 가라앉은 눈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체스휘,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설마… 지금 저 계집애를 구하러 온 거야?”
“마리네즈, 지금 화를 낼 사람은 네가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곧 체스휘와 마리네즈가 다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체스휘에게서 감정을 몹시 억누르는 것 같은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매번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하냐고!”
하지만 감정을 완전히 절제하는 데 실패한 듯이, 이내 체스휘의 입에서 나왔다기에는 믿기지 않는 격양된 음성이 고막을 찔렀다. 멀리서 내가 듣기에도 저절로 기가 눌릴 정도로 냉연하고 날카롭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마리네즈도 그런 체스휘에게 놀란 것 같았다.
“지, 지금 저런 하찮은 메이드 하나 때문에 나한테 소리를 지르는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내 앞에서 다른 여자 편을 들면서….”
“내가 착각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내가 누구와 뭘 하든, 그게 너하고 무슨 상관이지?”
이후로도 체스휘의 써늘한 목소리와 마리네즈의 고양된 음성이 번갈아 울렸으나, 그들의 대화를 자세히 들을 여유는 없었다.
드디어 악마의 화원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해, 일단은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아슬아슬하게 붙들고 있던 엠버의 가느다란 정신 줄이 마침내 한계에 달해 툭 하고 끊어져 버렸다.
그래서 어느 순간, 미카엘의 어깨에 여전히 짐 더미처럼 매달린 상태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힘이 풀려 축 늘어진 나를 미카엘이 이번에는 편안한 자세로 다시 고쳐 안는 것 같았지만, 곧바로 눈앞이 완전히 암전되어 확신할 수는 없었다.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낯선 방이었다. 실내는 아주 조용했고, 나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침대에 눕혀져 있는 상태였다.
흐린 시야에 비치는 광경을 보고 잠깐 멍해져 있다가, 이내 내가 처한 상황을 깨닫고 깜짝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야 일어났군.”
그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밤이 늦을 때까지 눈을 뜨지 않으면 그냥 복도에 내다 버려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은 미카엘 카드리고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그는 방금까지 책을 읽고 있던 듯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재미없어 보이는 표지의 책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남자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긴 다리를 꼰 채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은 미카엘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방 안에 어스름하게 켜진 불빛이 그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덧그렸다.
“남의 방에서 이렇게 해가 다 질 때까지 숙면을 취하다니, 겁이 없다고 해야 할지…. 깨어날 때까지 한참이나 기다렸어.”
미카엘의 말을 듣고 다시금 내가 누워 있던 방 안의 풍경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뭐야? 왜, 왜 내가 엠버의 방이 아니라 여기에 눕혀져 있지?
이곳은 일전에 엠버의 몸으로 청소를 할 때 와 봤던 미카엘 카드리고가 머무는 저택의 손님방이었다. 그런데 악마의 화원을 벗어나자마자 정신을 잃었던 내가 왜 그의 침대에서 눈을 뜬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미카엘이 날 여기에 데려왔나? 그가 방의 주인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을 듯했다. 하지만 어째서? 악마의 화원에서 데리고 나가겠다는 약속은 지켰으니, 기껏해야 다른 고용인에게 나를 데려가라고 맡기거나 저택의 유일한 의사인 콘라드에게 대충 던져 주고 갈 줄 알았는데 말이다.
나는 창가에 앉은 미카엘을 힐끔거리며 주섬주섬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몸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