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고용인들이 급히 도망치려 했으나, 당연히 미카엘 카드리고가 더 빨랐다.
남은 고용인은 단둘뿐이었고, 그들도 미카엘에 의해 순식간에 거대한 식물들이 만들어 낸 검은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괴물 꽃들이 몸을 흔들 때마다 사각사각 이파리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꽃들 속에 완전히 파묻힌 사람들은 이미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꽃들은 일전에 체스휘에게 그랬던 것처럼, 미카엘 카드리고에게 실수로라도 닿지 않으려 조심하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신이 나서 집어삼켰던 꽃들이 미카엘의 자그마한 움직임 하나에도 예민하게 움찔거리며 그를 피해 몸을 물렸다.
나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말문이 막혔다. 고용인들에게 닿았던 손을 가볍게 털고 있는 미카엘 카드리고를 흔들리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뭐야… 혹시 지금 나를 도와준 건가? 설마 진짜 날 구해 주려고 여기 온 거야?
어느새 체스휘(미카엘 카드리고가 함유된)에 대한 불신이 짙어져 있던 상태라 그런가?
뜻하지 않게 마주한 미카엘 카드리고의 온정 넘치는 모습에 얼떨떨해졌다.
물론 미래의 체스휘이자 미카엘 카드리고에게는 여러 가지 도움을 받은 적이 많았지만, 지금의 나는 린 도체스터도 아닌데….
아, 그러고 보니 엠버는 손님인 미카엘이 저택에 머무는 동안 그의 접객을 담당하는 메이드였다. 그래서 도와준 건가? 물론 지금도 엠버가 미카엘의 담당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다 나는 문득, 내 입을 막고 있던 천의 조임이 조금 느슨해진 걸 느꼈다.
쓸데없이 단단하게 묶여서 아직도 풀어지지 않고 있는 손목의 끈과 달리 입을 막은 건 매듭이 좀 느슨했던 모양이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굴을 어깨에 문지르며 낑낑거리자, 금방 천이 풀어졌다.
나는 입이 자유로워진 상태로 잠깐 갈팡질팡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도,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일단 지금의 나는 엠버이니 그녀답게 보이기 위해서라도 도와준 사람에게 인사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도, 이렇게 본의 아니게 미카엘과 마주친 것도 껄끄럽긴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쪽의 체스휘와 미카엘 카드리고는, 내가 린 도체스터라는 걸 모르니 굳이 눈치를 보고 몸을 사릴 필요가 없지 않나 싶었다.
미카엘 카드리고는 팔을 내리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다가 이내, 그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어제하고 뭔가 좀 다른데.”
미카엘의 손에 턱이 붙들려서 고개가 위로 들렸다. 불편하게 뒤로 꺾인 목이 뻐근한 데다 갑자기 좁혀진 거리감이 부담스러워서 머리를 비틀었다. 하지만 내 얼굴을 고정한 손은 단단해서, 나를 훑는 시선으로부터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오히려 턱을 움켜쥔 손에 한결 강한 힘이 실린 탓에 괜히 붙잡힌 부분이 아리기만 했다.
미카엘은 그렇게 날카로운 이채가 서린 눈으로 나를 뜯어보면서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냥 기분 탓이었나.”
그러다가 이내 그가 내게서 손을 떼고, 살짝 앞으로 숙였던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런 뒤 미카엘이 뒤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응? 뭐야? 갑자기 어딜 가?
“저, 저기요? 저 아직 손발이 묶여 있는데요.”
“그런데?”
그런데? 지금 ‘그런데’라고?
“풀어 주셔야죠?”
“내가 왜?”
연달아 무미건조하고 뜨뜻미지근한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약간의 어리둥절함과 의구심, 그리고 황당함을 느끼며 입술을 달싹였다.
“도, 도와주려고 여기에 온 거 아니에요?”
마침내 내 눈앞에서 이어지던 남자의 걸음이 멈춰졌다. 다음 순간 나를 돌아본 미카엘의 얼굴에는 방금의 흥미가 완전히 가신 듯한 무관심만이 어려 있었다.
“내가 조금 전에 분명 지나가던 길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또 한 번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이 남자가 지금 뭐라는 거지? 아무래도 이런 상황에서 나랑 농담이나 하자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럼 정말 여기를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다고? 진짜? 지금 진심이야?
아니, 아니. 미카엘 카드리고가 여기를 우연히 왔든 일부러 왔든,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
“그래서… 지금 나만 여기에 이대로 놔두고, 진짜 그냥 혼자 가겠다고?”
“내가 굳이 수고롭게 그쪽을 도와줘야 할 이유가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냉담한 말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카엘은 조금 전에 처음 여기 나타났을 때처럼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나를 가만히 응시하기만 했다.
주변에서 작게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지금까지 미카엘을 꺼려 가까이 다가오지 않던 식물들이 그의 부재에 서서히 나를 향한 포위망을 좁혀 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바닥에 붙어 다가오는 꽃들을 올려다보니, 그들이 전보다 훨씬 더 거대해 보였다. 미카엘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그런 모습조차도 관망하듯이 온기 없는 눈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와, 저 녀석…. 진심인가 보네?
나는 허무함에 허허 헛웃음을 흘렸다.
어찌 보면 지금의 나는 린 도체스터가 아니라 엠버였으니, 이런 미카엘의 반응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맞닥뜨린 양 당황스럽고 망연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는 혹시라도 미래의 체스휘가 나를 잡으러 올까 봐 경계했으면서, 위기의 순간 나타난 미카엘 카드리고를 보고 무의식중에 안심했던 것도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모순적이었다. 나는 그런 내 이중성이 좀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졌다.
다가오는 꽃들 때문에 시야가 점점 가려졌다.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곳에 서 있던 미카엘 카드리고의 모습도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기괴한 꽃들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내 머리를 뒤덮었다. 결국 거대한 꽃의 이파리가 내게 닿았다.
“너는 내 경고를 몇 번이나 무시했지. 내가 만만했어? 지금까지 너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더니 우스워 보였냐고.”
“하긴 그러니까 어제도 대놓고 체스휘와 붙어먹었겠지. 이 천박한 것…!”
귓가에 아까 들었던 마리네즈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렸다.
이 악마의 화원에 사는 꽃들은 사람의 악의를 빨아먹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먹잇감에게 누군가로부터 악의 어린 마음을 받았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인지 가장 최근에 만났던 마리네즈의 목소리부터 생생한 환청으로 나타난 것 같았다.
지난번에 이곳에 들어왔을 때는 체스휘의 도움을 받았지만, 지금은 그런 요행을 기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당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손발이 묶인 상태로 바닥을 기어서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러나 사방에서 몰려든 꽃들에 둘러싸여 몸을 피할 곳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왜 너만 살아 돌아왔어?”
“내 딸이 너 때문에 죽었는데 왜 너만 살았냐고…!”
급기야 내 그리움을 자극하는 목소리까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덮쳤다. 나는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급소를 공격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일순간 모든 의욕이 사그라지며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하린아.”
그냥 목소리만으로도 버거운데, 환각까지 더해지자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꽃들은 내가 무엇에 취약한지 눈치챈 듯이, 계속 내 현실 속 과거의 기억만 눈앞에 쏟아 놨다.
마취약을 투여받기라도 한 것처럼 서서히 의식이 가라앉으면서 머리가 몽롱해졌다.
“…야.”
하지만 이를 악물어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다시금 반복되는 환청 사이로 내 숨소리와 바람 소리가 들렸다.
“야…!”
자꾸만 나를 현혹하는 기억을 뿌리치기 위해, 일부러 더 큰 목소리로 힘껏 악을 쓰듯이 소리쳐 미카엘 카드리고를 불렀다. 여전히 나를 둘러싼 꽃들 때문에 미카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아직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포기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열심히 손을 움직인 보람이 있기는 한지, 마침내 손목의 끈을 푸는 데 성공했다. 관절이 몹시도 쑤셨지만 뜸 들이지 않고 손을 바로 움직였다. 상황이 위급한 데다 화까지 나서 그런지, 속에 독기와 악이 차올랐다.
나한테 닿은 괴물 꽃의 줄기 중 하나를 억세게 움켜잡아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무참히 뜯어 발겨 버렸다.
그 순간 꽃들이 아우성치듯이 몸을 뒤틀었다. 꼭 고통에 비명이라도 지르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모양새가 참으로 괴기스러웠다.
그들이 당황한 듯이 일순간 뒤로 물러나 빽빽하게 막혀 있던 시야에 틈이 생겼다.
나는 그 사이로 다시 기어갔다. 내 몸에 닿았던 꽃들이 멀어지자 가까스로 환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바닥에 있는 돌멩이를 아무렇게나 움켜잡아 미카엘 카드리고가 있던 방향으로 냅다 집어 던졌다.
“나도… 데려가.”
바닥에 떨어져 굴러가는 돌멩이 너머로 아직도 아까와 같은 자리에 뿌리 박힌 듯이 멈춰 서 있는 검은 구두가 보였다.
“나도 데려가라고…!”
나는 거친 숨을 씨근덕거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차라리 아무 기대도 없으면 실망할 일도 없었을 텐데, 저 남자를 피해 도망친 지금도 무의식중에 그라면 당연히 나를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내 멍청함에 화가 났다. 다른 고용인들을 보던 눈빛과 똑같은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나를 보던 미카엘에게도 이가 갈렸다.
나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면서 그를 저주했다.
“너 혼자 가면 절대 가만 안 둬. 내가 여기서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라도 매일 네 옆에 달라붙어서 너도 똑같이 피 말려 버릴 테니까!”
지금의 미카엘은 모르겠지만, 그는 가까운 미래에 스토커 악령에게 찍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며 지긋지긋할 정도로 시달릴 예정이었다. 그만큼 내 저주는 진심 어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미카엘에게는 내 협박이 같잖게 들린 건지, 한순간 나를 향한 그의 눈에 낯선 광채가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