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210)화 (210/300)

어라? 게다가 공교롭게도, 이곳은 체스휘와 내가 콘라드를 가둬 놨던 그 방인 것 같았다. 별관에서도 제일 후미진 곳에 있는 방이라서 그런가?

‘아무튼, 왠지 이거 느낌이 좀 불길한데?’

지난번에 다짜고짜 마리네즈에게 뺨을 맞았을 때처럼, 하필이면 또 좋지 못한 타이밍에 내가 여기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내 경고를 몇 번이나 무시했지. 내가 만만했어? 지금까지 너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더니 우스워 보였냐고.”

흰 치마를 나풀거리며 다가온 마리네즈가 내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지난번에도 느낀 거지만, 역시 마리네즈는 손이 매웠다. 나는 머리 가죽이 통째로 뜯겨나가는 느낌에 눈살을 찌푸렸다.

내 얼굴… 아니, 이 경우에는 엠버의 얼굴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내 고개를 강제로 들어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니 화가 더 끓어오르는지, 마르네즈가 이를 갈았다. 이글거리는 그녀의 눈에서 당장 레이저라도 쏘아져 나올 것 같았다.

“하긴 그러니까 어제도 대놓고 체스휘와 붙어먹었겠지. 이 천박한 것…!”

뒤이어 마리네즈의 입에서 터져 나온 외침을 듣고 나는 무심코 손끝을 움찔 떨었다.

이 여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혹시 아까 체스휘에게 들었던, 둘 사이에 어제 있었다는 ‘그 일’을 말하는 건가? 뭔지는 잘 몰라도, 아무래도 그게 마리네즈를 몹시 자극한 듯했다.

하지만 체스휘가 그건 사고 같은 거라고 했는데? 적어도 마리네즈가 이렇게 광분할 만한 모종의 은밀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았단 말이다.

보나 마나 이 스토커 같은 여자가 또 별것도 아닌 일로 광분해서 발작하는 것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지난번에도 고작 체스휘의 팔을 한번 붙잡은 일로 엠버를 불러 뺨을 날린 전적이 있지 않았던가?

“아직 나도 한 번도 못 닿아 본 그 입술에 감히 네 더러운 주둥이를 비벼? 네가 죽고 싶어서 작정한 게 아니고서야, 감히 그런 간 큰 짓을 할 리가 없지!”

하지만 덧붙여진 마리네즈의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 엠버와 체스휘 사이에 그런 이벤트가 있었어?

내 머리카락을 움켜쥔 마리네즈의 손이 더욱 아프게 죄어들고, 나를 마주한 얼굴도 한결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다. 당장 나를 난도질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을 듯한 살기가 마리네즈에게서 넘실넘실 흘러나왔다.

“그런 짓을 하고도 내가 용서해 줄 거라고 착각한 거면 사람 잘못 봤어. 너처럼 수치를 모르는 계집에게는 본때를 보여 줘야 해.”

서슬 퍼렇게 읊조린 마리네즈가 나를 다시 바닥에 거칠게 패대기쳤다.

“이 아이, 오늘부터 내 눈에 안 띄게 해. 데려가!”

의외라고 해야 할지, 마리네즈는 그 이상 직접 내게 손을 대지는 않았다. 그 대신 나를 이곳까지 옮겨 온 고용인들이 마리네즈의 명령을 듣고 다시 내게 다가왔다.

바로 그때, 살짝 열린 방문 틈으로 나를 응시하는 푸른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문 너머에 서 있는 것은 검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가진 소년이었다.

처음에는 1호실의 루스카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지금은 마리엔이 아니라 마리네즈가 저택에 있는 시점이니까, 루스카도 이곳에 없을 때였다. 그럼 저 소년은 먼저 죽은 루스카의 쌍둥이 형제겠구나.

하지만 나를 지켜보던 소년은 금방 사라졌고, 내 머리 위에도 곧 아까의 포대 자루 같은 게 다시 씌워져 시야가 완전히 가려졌다.

“빨리빨리 걸어! 시간 별로 없다!”

나를 짊어진 사람들이 또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바람 소리와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또 잔디가 밟히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별관에서 나와 밖으로 이동한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파악하기 위해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서 몰래 내 손목을 묶은 매듭을 풀려고 시도했다.

“하, 이 짓만 도대체 몇 번째야.”

“내 말이. 여기만 들어왔다 나가면 꿈자리가 영 뒤숭숭하다니까.”

잠시 후 녹슨 쇠가 마찰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귀가 예민하게 곤두서는 것 같았다. 꼭 공간이 분리되기라도 한 것처럼, 으스스한 공기가 몸을 휘감았다. 사람들의 생활 소음이 은은하게 들리던 건물 안과 달리 이곳은 아주 고요했다.

“이쯤이면 되겠지? 빨리 두고 가자.”

“혹시 가까이에서 다가오는 거 없나 잘 보고 있어!”

이내 목적하던 곳에 다다랐는지, 고용인들이 나를 바닥에 내려놨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내 시야가 환해졌다. 포대 자루가 머리에 씌워졌다가 벗겨진 것치고는, 갑자기 나타난 빛에 눈을 적응시키기 어렵지 않았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야외치고 그리 밝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개가 낀 것처럼 뿌연 공기 너머로 낯설지 않은 풍경이 보였다.

여긴… 악마의 화원?

그제야 나는 이 저택의 양육자들이 그동안 큰 잘못을 저지른 고용인들을 처벌할 때 어떻게 했었는지 떠올렸다.

“하필이면 마리네즈 님의 눈에 띈 걸 탓해.”

“너도 참, 뒤에서 몰래 만나면 마리네즈 님이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본데…. 그분이 저택에 심어 둔 눈이 몇 개인데.”

“아무튼 미안하게 됐어. 우리도 너한테 굳이 이러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고용인들은 그래도 엠버에게 악감정은 없었던 듯이 동정심이 어린 얼굴을 한 채로 변명했다.

내 입장에서는 그래 봤자 나를 여기에 두고 갈 놈들이 쓸데없이 혀가 길다 싶었지만….

“이쯤하고 그만 가자. 주변 잘 살피고… 어?”

그런데 나를 등지고 돌아선 고용인들이 갑자기 무언가에 당황한 듯이 얼어붙었다. 나는 잘 풀리지 않는 손목의 끈을 열심히 만지작거리면서 이것들이 왜 이러나 고개를 들어 확인했다.

‘어?’

그러고 나서, 나 역시 고용인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우왕좌왕하는 고용인들의 앞쪽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내 시야를 찔러 들었다. 흑단 같은 검은 머리카락에 저무는 노을 같은 주홍색 눈을 가진 남자는 이런 상황에서도 혼자만 고요하고 담담했다. 그는 일전에 내가 봤던 것과 똑같은 무료하고 냉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언제부터 저곳에 서 있었던 건지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막 나를 버리고 가려 했던 고용인들도 무척이나 당황한 것 같았다.

“소, 손님?”

“아니…. 여긴 어떻게….”

그리고 그들의 동요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남자가 무심하게 답했다.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는데.”

조금 비스듬히 서서 고용인들을 응시하던 남자가 뒤이어 고개를 기울이며 내 쪽으로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단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남자에게서는 기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닌지, 내 앞에 있는 고용인들도 경직된 몸을 쉬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아까 체스휘를 만났을 때보다 더 긴장했다. 역시 미카엘 카드리고에게서는 내가 아는 체스휘의 느낌이 짙게 났다.

그런데 미카엘 카드리고가 아직도 레드포드 저택에 있다니…. 그럼 내가 일전에 여기에 왔던 이후로 시간이 많이 지나지는 않은 건가?

아무튼, 이 악마의 화원을 마침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다니 바보도 믿지 않을 소리였다. 고용인들은 혹시 그가 납치당해 여기까지 끌려 온 나를 도와주려는 건가 의심스러운 듯이, 마른침을 삼키며 서로 눈치를 보았다.

“예에, 그럼…. 마저 가던 길 가십시오.”

“너희야말로 빨리 나가지 않으면 곧 그게 몰려올걸.”

고용인들은 미카엘 카드리고를 먼저 보내려 했으나, 그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고용인들이 다시 한번 복잡한 눈빛을 저들끼리 교환했다.

미카엘의 말대로, 빨리 화원에서 나가지 않으면 곧 사람을 잡아먹는 그 괴물 꽃이 몰려올 터였다. 게다가 보아하니, 그들의 우려와 달리 저택의 귀하신 손님은 이 일에 끼어들 생각이 별로 없어 보였다. 미카엘의 태도는 고용인들의 만행을 막고 나를 구해 주러 이곳에 온 것이라기에는 시종일관 지나치게 무관심하고 권태로워 보이기만 했다.

고용인들이 길게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별안간 안개 너머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다가오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 저희 먼저 가 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 메이드는 큰 잘못을 저질러서 이곳에 데려온 겁니다. 저택의 규칙대로 처벌하는 것이니, 혹시라도 오해는 하지 마셨으면 하고….”

고용인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변명에도 미카엘 카드리고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꼭 길가의 개미를 보듯이 무기질적인 시선에 흠칫 몸을 떤 고용인들이 이내 부랴부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막 고용인들이 옆을 지나치려 하던 순간, 지금까지 미동이 없던 미카엘의 다리가 움직였다.

“으억!”

먼지 한 톨 앉지 않은 구둣발에 걸린 고용인이 바닥에 넘어졌다. 옆에 있던 다른 고용인들이 그 광경을 보고 주춤했다. 미카엘이 넘어진 고용인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왜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내 발에 걸려 넘어지고 그러지?”

“예, 예?”

“불쾌하군. 기분이 나빠졌어.”

미카엘의 발에 걸려 넘어진 고용인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는 눈치였다. 내가 보기에도 고용인을 일부러 넘어뜨린 건 미카엘 쪽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저 메이드보다 가벼운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미카엘의 시선이 다시 한번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나를 스쳤다.

“할 수 없이 저택의 규칙대로 처리해야 하나.”

다음 순간,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넘어진 고용인의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나를 이곳에 데려온 고용인들은 모두 장성한 사내들뿐이었는데도, 미카엘의 손아귀 안에서 그의 몸은 꼭 솜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가볍게 들어 올려졌다.

“왜, 왜 이러시는… 으아악!”

어느새 바로 코앞까지 가까이 다가온 거대한 식물들 속으로 비명이 퍼져 나갔다.

0